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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바리 Sep 24. 2023

모욕과 상상력

왜 그들은 남반구를, 가난한 이들을 숨 쉬듯 모욕하나

* (10월 4일) 이 글을 깁고 다듬어 발전공부모임 띵동 블로그에 "저개발"이라는 모욕: 우리에겐 다른 상상력이 필요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올렸습니다. 

http://thinkndo.kr/column/?idx=16490778&bmode=view


연합뉴스가 윤 대통령이 이번 미국 뉴욕 순방 기간 정상회담을 했던 수많은 정상의 나라를 모욕했다.


최근 대통령실 관련 기사를 많이 쓴 두 기자는 기사에서 대통령이 순방 동안 부산 엑스포 유치를 위해 "전력투구"했으며, "이름도 처음 듣는 저개발국 정상들에 허리를 숙였다"라고 썼다. 이 짧은 문장에 한국은 "발전"했다고 으스대는 오만함과 "저개발" 국가에 대한 멸시,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익"을 위해 그런 "무명의 나라"에까지 "허리를 숙였"던 대통령에 대한 찬양까지 수많은 문제가 담겨있다. 그리고 몇몇 언론은 이 기사를 그대로 받아썼다.

연합뉴스 기사 화면 캡쳐
네이버 기사 검색 결과 캡쳐


문화인류학자들은 "마주침"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고들 한다. 예를 들어 국제 원조기구의 '개발' 프로그램이 일어나는 남반구 현장에서는 서방의 '전문성'과 '지원'이 일방적으로 전해지는 것 같지만 그 마주침의 현장에서는 수많은 긴장과 뒤섞임도 함께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마주침을 경험한 국제 원조기구, 그 직원, 그리고 프로그램의 대상이 되는 지역과 그 안의 사람들은 모두 그 전과 같지 않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마주침으로 인한 변화의 방향이 늘 더 나은 곳을 향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통해 혹은 방문 경험을 통해 아프리카를 경험하는 사람들을 봐도, 누군가는 아프리카에 대한 기존의 편견이 더 강해지거나 이러한 '저개발국'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가'로서 정체성을 더 단단히 하는가 하면, 누군가는 아프리카 경험을 통해 아프리카 뿐 아니라 자신이 서 있는 곳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본다.


많은 정상회담과 해외 순방을 취재했을 두 기자는 왜 지구촌에 존재하는 여러 나라를 "이름도 처음 듣는" "저개발국"이라 불렀을까? 후보 시절 "손발 노동은 아프리카나 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대통령의 세계관은 취임 이후 "기네스북 급"으로 많은 정상을 만나 이야기 나누면서 조금이라도 나아졌을까?


이번 기사에서 두 기자가 아무렇지 않게 모욕적인 표현을 쓴 것처럼, 수많은 "마주침"에도 불구하고 세계 각국을 경제 규모에 따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저개발국/후진국"으로 나누어 보는 시각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 세계관 속에서 문화 다양성과 사람들의 개성은 사라지고, 그들을 뭉뚱그려 "저개발"로 내려다보는 모욕은 일상화된다.


요즘 한국 정부는 "심리적 G8" 같은 말이 상징하듯 미국이 항상 선두를 지키고 미국이 가는 길이 곧 트랙이 되는 가상의 달리기에 열중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1949년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발전"의 약속은 수십 년째 실패를 거듭했고, 경제성장 달리기의 순위는 마치 기후 악당 순위처럼 보이곤 한다.


어제 있었던 9.23 기후정의행진에서는 기후위기를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는 노동자, 농민, 홈리스, 빈자가 끊임없이 언급되었다. 그 누구도 직접 주먹과 칼을 휘두르지 않지만, 지구촌 남반구와 모든 곳의 약자들은 이미 겪고 있는 "느린 폭력"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번 정부가 추진하는 원전 확대, 무기 판매, 일본 원전 오염수 방류 방관뿐만 아니라 대량으로 생산하고 대량으로 소비하는 삶의 양식, "개발"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대규모 건설과 삼림 파괴까지, 이 모든 것은 이미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재난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9.23 기후정의행진에서 '다잉 퍼포먼스'를 하고 있는 참여자들. 사진: 우승훈
9.23 기후정의행진에 참여한 다양한 단체들. 사진: 우승훈

우리는 하루아침에 망하지 않는다. 대신, 지구촌 남반구와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재난이란 이름의 폭력에 더 깊이 가담하는 과정을 겪을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가담하고 목격하며, 그 고통이 나에게도 다가오는 것을 보는 과정은 다 함께 멸망한다는 멸망론보다 훨씬 괴로울 것이다.


일상적 모욕과 느린 폭력에의 공모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미국을 정점에  두고 다른 나라를 줄 세우는 낡고 닳은 시각에서 벗어나 각국, 각 사람들의 다양한 삶과 세계를 상상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한 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이의 엄마에게 이상한 노인 취급을 받은 박완서 작가는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상상력은 남에 대한 배려, 존중, 친절, 겸손 등 우리가 남에게 바라는 심성의 원천이다. 그리하여 좋은 상상력은 길바닥의 걸인도 함부로 능멸할 수 없게 한다." - 박완서, 운수 안 좋은 날(2004)

박완서 '운수 안 좋은 날' 전문(서울신문):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40223015004


그 아이 엄마가 자신의 아이가 이야기를 나누는 저 노인에게도 손녀에 관한 추억이 있을 수 있고, 아이와 나눌 이야기가 있고, 결국은 삶이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었다면 "보자보자 하니 나잇살이나 먹어가지고"라며 아이를 낚아채가진 않았을 것이다. 이번 연합뉴스 기사를 쓴 기자들도, 예전에 "손발 노동은 아프리카나 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윤대통령도 다른 세계와 삶을 떠올릴 상상력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다른 나라와 사람들을 모욕하고 비하할 수 없었을 것이고 기후위기를 대하는 태도와 실천도 달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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