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칙하게 저항하는 포르노그라피의 가능성
어둡고 메마르고 고통스러운 이미지 위로 긴박함을 알리는 빨간 글씨들이 덕지덕지 붙은 모금 캠페인은 예고도 없이 벌컥 우리네 일상을 침범한다. 이런 일을 한두 번 당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캠페인을 하는 단체와 같은 업계에 몸담고 있기도 하지만, 모르는 사람의 약하고 고통스러운 모습을 갑자기 마주치는 일은 여전히 당황스럽다.
캠페인 속에서 한국의 잠재 후원자는 전지전능한 ‘구원자’다. 글로벌 불평등과 빈곤 해결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난제임에도, 캠페인은 한국의 ‘구원자’들이 돈을 내면 단체들이 ‘해결책’을 통해 아이들을 구해낼 것이라는 환상을 재생산한다. 또한, 국내외 정치 상황, 현지 문화, 다국적 기업의 약탈, 북반부가 초래한 기후위기의 영향 같은 복잡한 맥락을 철저히 외면한 캠페인은 그 ‘수혜자’와 그들의 세계를 무기력하고 암담한 곳으로 쪼그라트리고, '여기'와는 '돕는 일' 말고는 상관없는 곳으로 멀리 던져버린다.
이러한 국제개발협력, 자선 단체의 행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빈곤 포르노(Poverty Porn, Poverty Pornography)’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빈곤 포르노”라는 표현은 1981년 덴마크의 국제개발협력 활동가 요르겐 리스너(Jorgen Lissner)가 New Internationalist에 기고한 글 “비참함의 상인(Merchants of Misery)”에서 처음 쓴 것으로 알려졌다. 리스너는 TV, 신문, 광고판, 포스터 등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배가 불룩하게 부풀어 오르고 눈을 초췌하게 뜬 어린이의 이미지를 내세운 모금 캠페인을 비판하며, 이런 이미지는 “위험할 정도로 포르노에 가깝기 때문에” 윤리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리스너가 정의한 “포르노그래피”는 “인간의 신체와 영혼을 당사자에 대한 어떠한 존중이나 경건함도 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인데, 그는 굶주린 아프리카 어린이를 내세운 모금 광고 또한 “성(sexuality)만큼이나 섬세하고 지극히 개인적인 인간 삶의 일면, 즉 고통을 노출”하기에 포르노와 비슷하다고 보았다. 즉 포르노가 성을 관음하고 욕망하고 때로는 과장한다면 빈곤 포르노에서는 가난과 고통이 그 대상인 셈이다.
이렇게 모금 광고를 강도 높게 비판한 리스너도 그런 광고를 하는 사람들(그는 이들을 ‘광고주’라고 불렀다)이 설명하는 목적과 그 속의 딜레마를 알고 있다. 굶주린 아이의 이미지를 통해 사람들이 세계 어딘가의 참상에 대해 알게 된다는 점, 그리고 그런 광고가 보장하는 높은 ‘수익성’을 통해 돈이 돌고 단체와 지원이 지속한다는 점은 ‘빈곤 포르노’ 문제를 단순히 도덕적으로 심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리스너 이후, 빈곤 포르노라는 표현이 모금 광고를 넘어 TV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나 영화, 소설, 언론보도까지 확장된 지금도 마치 포르노에 예술이냐 외설이냐라는 논란이 따르듯 빈곤 포르노에는 정의와 진실 추구냐 빈곤 장사냐는 논란이 따른다.
리스너는 포르노를 부정적인 의미로 활용했지만, 포르노가 항상 원초적인 쾌락과 자극만 추구한 것은 아니다. <포르노그래피의 발명>(2016)을 쓴 역사학자 린 헌트(Lynn Hunt)에 따르면 포르노그라피라는 개념이 생기고 통제의 대상이 된 것은 19세기 중반이다. 물론 그전에도 성적 흥분을 일으키는 그림이나 조각은 인류 역사와 거의 함께하다시피 했고, 사회적으로 ‘음란한 것’으로 분류되는 것을 공개할 것인가 비공개할 것인가, 공개한다면 누구에게 공개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늘 있다가, 19세기가 되어서야 이런 것들이 포르노로 이름 붙여지고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다뤄져야 할 사안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는 역설적으로 포르노그라피의 발전을 이끌었다.
지금은 흐릿해졌지만, 한때 포르노그라피는 일종의 ‘발칙한 저항’이었다. 종교와 국가가 강요하는 도덕적 인간상이나 사회적 규칙, 순응하는 태도에 반감을 품은 사람들이 성과 성행위, 갖가지 금기를 노골적이고 과장되게 묘사하며 종교와 국가의 권위에 도전했다. 그리고 이를 막기 위한 금서 지정 같은 규제가 강해질수록 저항의 은밀함과 짜릿함은 강해졌다. 예를 들어 쪽방촌을 밀어버리고 부자들만 살 수 있는 고급 아파트를 지으면서 높은 삶의 수준이니 행복이니 공동체니 하는 광고로 포장된 가림막에 누군가 몰래 커다란 성기를 그리거나 성과 관련된 단어를 써 놨다고 상상해 보자. 묘한 짜릿함이 느껴지지 않는가? 그만큼 상대의 거창함과 권위를 단숨에 깎아내리고 거부 의사를 직설적으로 표현할 방법이 또 있을까?
이렇듯 포르노그라피의 전통 속에는 성행위의 노골적인 표현뿐 아니라, “여성끼리의 대화 양식, 매춘부의 행위에 대한 기술, 당대의 도덕 관습에 대한 도전”(44쪽)도 있다. 하지만, 18세기 후반, 이러한 전통 중 정치적 의미는 그 힘을 잃고 대신 “상업적인 ‘하드코어’”(63쪽)로서의 포르노그라피만 성행하게 된다. 빈곤 포르노가 비판받는 점도 바로 이 상업성과 하드코어함이다.
상업성과 하드코어, 나는 이 두 단어를 목적과 시선에 관한 문제로 이해했다. 굶주린 어린이의 이미지를 내세우는 모금 캠페인에도 변화를 위한 이니셔티브나 중장기 활동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호소하고, 단체가 추구하는 가치와 방향성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자금을 많이 모으려는 등의 여러 목적이 섞여 있을 것이다. 물론 굶주린 어린이를 둘러싼 맥락이 드러나지 않고, 특정 연령대가 TV 시청을 많이 하는 시간대에 광고를 집중적으로 편성한 것 같은 느낌은 캠페인이 어떤 목적에 가장 큰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지에 대해 충분한 의심을 품게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점은 이들 단체가 이 캠페인을 접하는 사람들과 단체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리스너는 앞선 글의 결론 부분에서 단체들이 “비참함의 상인” 대신 “연대의 영업사원(salesmen of solidarity)”이 되길 제안했다. 무엇이 빈곤 포르노다 아니다 딱 떨어지게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 두 구분은 유용한 기준이 된다. 각 실무자가 캠페인을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 단체가 어떤 목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 곳인지를, 캠페인을 접하는 각 시민이 빈곤 문제에 있어 비참함을 사는 소비자가 될 것인지, 연대자가 될 것인지를 생각한다면 빈곤 포르노 앞에서 각자 어떤 선택을 할지 결정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목적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시선의 문제는 남는다. 지금은 사라진 포르노그라피의 정치적 전통에 따라 외설을 통해 사회비판을 한다는 소설이나 영화는 많았다. 하지만, 그 시선이 지나치게 남성 중심적이라 이를 예술로 볼 것이냐 남성의 (여성 착취적인) 성적 환상을 충족하기 위한 의미 외엔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볼 것이냐는 논란을 일으킨 작품도 많았다. 무엇을 빈곤 포르노로 볼 것이냐는 것도 쉽지 않다. 누군가는 굶주린 아이의 몸 정도가 나와야 빈곤 포르노라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가난한 집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도 빈곤 포르노라고 할 것이다. 심지어 그러한 빈곤 포르노를 비판하며 대안으로 등장한 긍정적 이미지 또한 빈곤 포르노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이야기하긴 어렵다. 최근 <고통 구경하는 사회>(2023)라는 책을 쓴 김인정 기자는 책에서 단칸방에 살며 폐지를 주우며 생활하다가 연말이면 기부를 하는 한 할머니의 ‘미담’을 취재한 일화에 관해 썼다. 김인정 기자는 가난한 사람이 기부했다는 자칫 납작해질 수 있는 이야기를 더 잘 보여주고 싶어서 할머니와 더 많은 대화를 하고 집까지 찾아가 적은 세간을 영상에 담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가난을 역경으로 보는 태도”(131쪽)가 배어 있진 않았는지, 약자들을 도덕성이라는 새로운 틀에 가둔 것은 아닌지 오랫동안 의심하고 고민했다. 빈곤 포르노의 대안으로 긍정적인 이미지와 이야기를 활용하는 경우에도 이런 고민과 의심이 계속될 필요가 있지만, ‘포르노’라는 단어 때문인지 이미지에만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전혀 논의가 되지 않아 아쉽다.
할머니가 노년층의 기초생활수급자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그리고 뉴스를 만드는 우리가, 지나치게 범박한 기준을 적용하여 당연히 도움을 주어야 하는 연민의 대상으로만 소비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중략) 자본주의의 하층부에 있는 ‘이렇게나 가난한’ 사람이, 늘 더 많은 것을 욕망하는 자본주의의 논리에서 벗어나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눈다는 것에 놀라며 뉴스를 전하는 태도 자체가 자본주의의 비좁은 틀 안에서만 그녀의 삶을 협소하게 해석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중략) 혹여 이런 뉴스가 약자들의 도덕성에 대한 기대치를 높이고 행동의 폭을 더 옭아매는 것은 아닐까? 희망의 증거로 함부로 소비되는 건 이들이 과연 동의한 역할과 노동인 걸까? (131-132쪽)
이것도 고민이다 저것도 고민이라고 해서 빈곤을 드러내는 것을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민하면서 더 자세히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올 여름 홈리스행동 생애사 기록팀은 <그여자가방에들어가신다>(2023)라는 책을 냈다. 그간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던 홈리스, 특히 여성 홈리스의 삶을 담기 위해 홈리스행동 활동가들은 2년 동안 공원과 기차역, 거리 구석구석을 다니며 여성 홈리스와 이야기를, 시간을, 그리고 생활을 나눴다. 책의 내용은 그 어떤 캠페인 광고보다 놀라웠다. 10년 넘게 살아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서울의 새로운 차원을 마주했고, 있지만 알지 못했던 홈리스라는 이웃과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 차 올랐다.
<그여자가방에들어가신다>는 홈리스에 관한 남성 중심의 빈곤 서사에 균열을 낸다는 점에서, 그리고 ‘약자’를 그저 약하고 고분고분한 존재가 아닌 투쟁하고, 갈등하고, 고민하고, 타협하고, 기여하고, 교류하는 존재로 그렸다는 점에서 전복적이다. 나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가서 더 발칙한 ‘진짜’ 빈곤 포르노를 만들어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빈자를 무력하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낙인찍는 바로 그 권력과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이미지들, 예를 들자면 빈곤을 만들고 착취하는 기괴한 자본주의의 생산과 소비 양식, 온갖 욕망을 부추기는 마케팅, 성장에 대한 집착을 잘 보여주는 장면들, 혹은 마치 한국에는 빈곤도 문제도 없는 것처럼 ‘저개발국’ 앞에서 한국의 ‘선진성’을 뽐내는 우스꽝스러운 모습들, 더 직접적으로는 모금 광고를 촬영하기 위해 투입된 막대한 비용, 그림을 만들기 위한 노골적인 혹은 은근한 유도, 그리고 마치 사냥을 하듯 가난한 사람이 자신의 가장 취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포착하려 거대한 카메라를 들이미는 순간들을 담아 영상이나 사진집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특히 휴대전화의 보급으로 만인이 카메라를 가지게 된 오늘날 저항하고 전복하는 빈곤 포르노의 잠재력과 실현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도 더 크다. 작년 말, 대통령 부인이 캄보디아에서 찍은 사진을 두고 ‘빈곤 포르노’라는 논란이 일었을 때, 왜 그 사람이 아기처럼 안기에는 큰 소년을 그렇게 안았는지, 사진이 어떻게 그렇게 전형적이라는 느낌이 될 정도로 매끈하게 나왔는지, 그 광경이 얼마나 기괴했을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만약 그 상황에서 그 소년의 가족이나 친척, 동네 사람 중 한 명이 휴대전화를 들어 그 광경을 찍었더라면, 대통령실을 통해 발표된 그 사진보다 빈곤에 대한, 혹은 빈곤 포르노에 대한 더 다양하고 깊은 논의를 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다.
자극적인 이미지는 자주 노출되면 결국엔 무뎌진다. 그리고 업계의 ‘가짜’ 빈곤 포르노는 언제든 쏟아져 나올 준비가 된 ‘진짜’ 빈곤 포르노의 파도에 곧 쓸려나갈 것이다. 단체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지속가능성’을 생각한다면 “비참함”을 팔러 여기저기 찍고 다니는 대신 지금이라도 연대와 공감의 밭에 씨를 뿌려야 한다.
다행히도 국제개발협력 분야 내에서 빈곤 포르노, 혹은 빈곤극대화광고를 비판하고 변화를 촉구하는 단체들이 있다. 아프리카인사이트, 발전대안 피다, 공적인사적모임이 대표적인데, 이번 칼럼은 얼마 전 공적인사적모임과 발전대안 피다가 함께 개최한 <반 빈곤 포르노 오픈 포럼>에 토론자로 참여하기 위해 준비하면서 쓴 원고를 정리한 것이다. 빈곤, 타인의 고통, 그리고 다른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그릴 것인지 고민된다면, 이들 단체의 활동에 관심가지고 함께해보면 좋을 것 같다.
* 이 글은 발전공부모임 띵동 블로그의 '띵동 칼럼' 코너에도 게시되었습니다. 국제개발협력 NGO 출신으로 발전을 공부하는 연구활동가들의 활동과 글이 궁금하다면 띵동의 홈페이지와 인스타그램을 방문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