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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바리 Oct 26. 2024

불편한 폭탄

[책]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 (마쓰시타 류이치, 2017/2024)

1974년에서 1975년 사이, 스스로를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의 부대원이라 주장하는 일본인들이 일본이 과거에 그리고 지금도 저지르는 제국주의적 행태에 반대하며, 동아시아에 대한 “기업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미쓰비시 중공업, 데이진, 오리엔탈메탈제조 등의 일본 기업과 한국산업경제연구소(도쿄 소재) 등에 폭탄을 터뜨렸다. 이때 무장전선의 부대원들은 한국, 대만, 태국 등 동아시아 국가와 일본의 아이누, 오키나와 인민의 반일 투쟁에 호응하여 무장투쟁을 벌인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이 폭탄을 터뜨린 이유와 그 결론에 도달한 과정은 여덟 명의 민간인을 죽음에 이르게 한 폭발과 함께 허공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심지어 당시 한국 언론은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을 북조선의 지령을 받아 한국과 일본의 경제교류를 방해하거나 한국을 공격하는 ‘반한’ 단체로 소개하기도 했다. 무장전선을 시작한 이들이 자신의 선언문이자 부대원 모집 선전물이었던 소책자의 이름을 <하라하라 토케이>(腹腹時計-직역하자면 배꼽배꼽 시계, 시한폭탄 제조법이 담긴 지하출판물의 위장 제목을 짓는 과정에서 나온 이름이다)로 지으면서 한국어의 ‘~하라’를 여러모로 떠올리며 좋다고 생각하는가 하면, 한국의 4.19 혁명일에 맞춰 1975년 긴자의 한국산업경제연구소 폭파일을 정하는 등 한국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금은 서글픈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미지: 힐데와소피


당시에는 ‘전선’을 확장하지 못했던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의 ‘반일’은 뜻밖에도 40년이 지난 뒤 한국에서 재발견된다. 2019년 김미례 감독이 이들의 이야기를 담아 다큐멘터리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을 만들었고, 2022년에는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을 가장 먼저 시작한 사람들이 모인 ‘늑대’ 부대의 일원인 다이도지 마사시가 옥살이를 하며 쓴 서신을 모아 낸 <최종 옥중 서신>(다이도지 마사시 지음, 강문희, 이정민 옮김)이 번역출간되었다. 그리고 2024년 8월 30일,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 1974-75년 일제 전범 기억 연쇄 폭파 사건>(마쓰시타 류이치 씀, 송태욱 옮김)이 일본어로 출간(원제: 狼煙を見よ:東アジア反日武装戦線"狼"部隊)된 지 7년 만에 한국어로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늑대’의 부대원들이 1974년 8월 30일, 전범기업이자 전후에도 동아시아 각국에 진출하여 일본의 우위를 유지하는데 기여한 미쓰비시중공업에 폭탄 공격을 감행했던 날로부터 꼭 50년이 지난날이다. 


반세기 만에 다시 우리에게 다가온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을 읽는 방식은 다양할 것이다. 누군가에겐 평범해 보이는 청년들이 사실은 폭탄 테러리스트였다는 반전이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엇나간 사회운동 세력의 잘못을 되짚으며 교훈을 얻을만한 이야기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폭력 투쟁 이후의 후회와 반성을 보여주는 이야기일 수 있다. 모두 폭발을 중심에 둔 방식이다. 하지만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이 지금 한국에서 다시 회자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 폭탄에 담긴 철저한 자기비판과 자기부정이 사람들이 여전히 애써 외면하는 불편한 현실을 직시하도록 하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이 불편함이 지금 한국에서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을 읽는 방법이자 의미라고 생각한다.


무장전선이 폭탄 공격으로 실천하고자 했던 그들의 ‘반일’은 우리가 흔히 듣는 '반일'과는 상당히 다르다. 우선 주체가 일본인이라는 점이 새롭고, 그 내용도 애국으로서의 '반일'이나 과거사 문제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반일', 혹은 일본에 대한 열등감 표출로서의 '반일'도 아니다. 무장전선의 '반일'은 단순히 일본, 혹은 국가로서의 일본에 대한 반대를 넘어 그것을 방관하며 누리는 ‘제국’의 일원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반대였다. 그들은 일본의 번영과 성장, 그리고 일본인들이 누리는 “평화롭고 안전하며 풍요로운 소시민 생활”(57쪽)이 동아시아 인민을 수탈하고 희생시킨 결과라는 불편한 진실을 전면에 내세웠다. 70년대 언론이 당사자들이 스스로 붙인 ‘반일’을 애써 무시하며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을 ‘반한’ 단체라고 부른 것은 일종의 예지였는지 모르겠지만, 무장전선이 연대하며 해방하려 했던 한국은 이제 그 일본이 되었다. 무장전선 부대원들이 ‘반일’이라는 자기부정에 도달한 과정을 한국과 풍요, 안전, 그리고 그 구성원의 관계로 다시 배치하면 지금 다시 그 '반일'을 이야기하는 이유, 그리고 나아가 '반한'의 가능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일보 1974년 10월 20일 기사.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을 '반한단체'로 의심하고 있다.


70년대 일본 청년들이 어떻게 자신을 억압하는 민족의 일원으로 인식하고, 무장전선을 만들며, 일본 기업을 폭파한다는 생각까지 나아가게 되었는지를 상세히 소개하는 책의 전반부는 상대적으로 읽기도 쉽고, 무장전선 구성원들의 생각도 비교적 선명하다. 책에 인용된 무장전선의 팜플랫과 성명의 힘찬 언어를 읽다 보면 착취하는 일본과 착취당하는 동아시아 민중의 선명한 구도에서 구성원들이 느꼈을 정의감과 흥분을 함께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폭탄이라는 충격적인 행위로 들이댄 ‘늑대’의 ‘반일 사상’은, 일본인의 생활에서 보이는 총체적인 풍요로움이 어떠한 침략과 수탈로 가져온 것이지를 추궁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다지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 나도 그 물음 앞에서는 쩔쩔매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다. 예컨대 나는 방글라데시와 비교하여 백 배의 에너지를 소비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이 나라에 사는 이상, 방자하고 방종하며 풍요로운 생활에서 일상적으로 도망치는 것은 어렵다. (353쪽)


하지만, 국가와 풍요는 마치 피부 같아서 벗기가 힘들고, 그래서 무장전선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불편함의 연속이다. 저자 마쓰시타도 무장전선의 이야기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지는 이유를 이와 비슷하게 설명했는데, 아무리 국내외의 불평등과 부정의를 비판하고, 일상에서 덜 쓰고, 덜 파괴하고, 덜 착취하는 삶을 실천하려 애쓴다 해도 한국이라는 집단이 국내외 곳곳에서 벌이는 파괴와 폭력, 착취를 묵인하거나 공모했다는 책임에서 자유로워지기는 어렵고, 가난한 이들과 나 사이에 있는 상상 이상의 격차를 줄이는 것은 더 어렵다. 그럼에도 피부와도 같은 국가와 풍요를 도려내기 위한 고민과 시도를 멈추지 않은 부대원들의 노력, 그리고 그 결과 터진 폭탄은 우리에게 이중의 불편함을 선사한다. 


나는 바로 이 불편함 때문에 책장을 멈추지 않고 계속 넘겼다. 일본인이자 대학생인 부대원들은 어떻게 '반일'을 생각했고 얼마나 진심일까, '반일'의 대상과 방법은 무엇이 될까, 무장투쟁은 어떻게 설명될까, 폭발로 인한 사상자에 대해 부대원들은 어떤 말을 할까, 부대원과 마쓰시타 그리고 사람들은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을 어떻게 평가할까 등등 때로는 너무 선명해서, 때로는 너무 혼란스러워서 느껴지는 불편함이 읽다 보면 나아질 거라 생각하며 읽어나갔다. 그 과정에서 착취함과 착취당함의 구분에 대하여, 느리고 빠른 폭력에 대하여, 국가와 민중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고민부터 실행, 뼈저린 반추까지의 과정이 담긴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의 이야기는 어떤 주제든 생각한 것보다 한 발짝 더 들어가도록 내몰았고, 결국 뭐 하나 명쾌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상태로 책을 덮었다. 물론 불편함도 여전히 남았다.


<동아시아 반일 무장 전선>은 불편한 책이다.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우리의 일부를 마주하게 하고, 어떤 생각과 실천을 끝까지 밀어붙여 본 사람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취재해 그 속의 혼란과 불안을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한다. 완벽한 안전과 풍요가 가능한 가상현실이 모두의 현실이 되어가는 것 같은 요즘 꼭 필요한 불편함이다. 이 불편함으로 인해 마쓰시타는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을 끈질기게 취재했고, 나는 이 책을 쉴 틈 없이 끝까지 읽으며 애써 외면하던 나의 위선과 넘어서지 못한 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어쩌면 부대원들도 그래서 전학공투회의(전공투) 학생운동에서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으로, 폭탄 공격으로, 그리고 옥중 투쟁으로 싸움을 이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더 많은 이들이 <동아시아 반일 무장전선>의 불편함을 통해 마주하고, 고뇌하고, 해나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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