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빈곤을 착취하다 (휴 싱클레어, 2012/2015)
휴 싱클레어의 「빈곤을 착취하다」의 영어판 제목은 Confession of a Microfinance Heretic이다. 직역하자면, "소액금융업계 이단아의 고백"정도 될 것 같다. 번역판 제목과 좀 거리가 멀다.
번역판 표지엔 가장 큰 글씨로 "빈곤을 착취하다"라고 적혀있고, 그보다 작은 글씨로 "서민을 위한 대출인가 21세기형 고리대금업인가"가 적혀있고, 같은 크기로 "소액 금융의 배신"이 적혀있다. 정작 영어판 제목이나 책의 내용에 가장 가까운 건 이 "소액 금융의 배신"인 것 같다. 하지만, 한국에선 소액금융이 크게 관심을 못 받다 보니, 국제개발업계 전반을 비판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빈곤을 착취하다"라는 제목을 뽑은 것 같다. 물론 이 책이 소액금융이 빈곤한 사람들을 착취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고, 싱클레어의 소액금융분야 비판을 국제개발분야에 대입해봐도 생각할 거리가 많으니, 엉뚱한 제목을 뽑은 건 아니다.
소액금융(Microfinance)과 소액대출(Microcredit)은 종종 같은 의미로 사용되곤 하는데, 사실은 약간 다르다. 소액대출은 소액금융이라는 큰 개념에 속하는 개념이며, 소액금융에는 소액대출을 비롯한 일반적인 금융 서비스(저축, 보험, 송금 등등, 다만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다)가 포함되어 있다.
나는 소액대출과 약간 관련이 있는 일을 하고 있고(내가 일하는 기관은 농촌 주민들에게 농업이나 축산에 투자할 수 있는 자금을 거의 무이자로 대출해준다.) 소액대출이 효과가 있는가에 대해서 고민이 많다. 그래서 이 책을 얻으면 일과 관련한 아이디어를 좀 얻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읽다 보니 소액금융은 꽤 다른 업계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이 책의 저자 싱클레어가 여러 나라를 거치며, 여러 기관을 거치며 소액금융업계의 이단아가 되어가는 과정, 업계의 위선에 맞서 싸우는 '무용담'들은 꽤나 재미있었다.
이 책의 서문의 첫 두 문단은 사뭇 비장하다.
소액 금융계는 광적인 종교 집단과 흡사해 보일 때가 많다. 비판은 이단으로 간주되며 결코 용인되지 않는다. 소액 금융계는 마치 무슨 신조라도 되는 양 소액 금융이 빈곤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 효과가 실제로 입증된 사례는 매우 드물다. 무엇보다 이 분야는 수익성이 매우 높은데 그 수익의 원천은 다름 아닌 빈민들이다.
소액 금융을 비판하면 이 분야에서 돈을 벌고 권력을 누리는 자들, 즉 소액 금융 기관의 소유주들과 그들에게 흘러들어 가는 자금을 관리하는 자들이 적개심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꺼이 이단아가 되어 이 책을 내는 이유는, 소액 금융 부문의 실상을 조명하는 동시에 조금이라도 빈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서다. (p.16)
르완다에도 소액금융업체가 많이 생기고 있는데, 나는 딱히 그쪽으로 협업하거나 할 일이 없어서 소액금융계를 잘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수익을 내고 세를 불리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소액금융계가 본질적으로 착취적일 수밖에 없는지, 각 업체별로 윤리적 측면에서 차이는 없는지에 대해선 잘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싱클레어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국제개발분야에 대해 가지고 있다. 다만 이 분야에서는 큰 경제적 수익 대신, 개인에게는 도덕적 우월감이나 개인적·종교적 만족감, 권력, 월금 같은 것들이, 정부차원에서는 경제·외교적 이익 등이 수익으로 돌아온다는 차이가 있을 것 같다. 내가 싱클레어처럼, 많은 고민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에 오래 남는다면, 그와 같은 이단아가 될 것 같다.
소액금융이 효과가 있느냐 없느냐는 여전히 논란 중이겠지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소액금융이 효과가 없는 여러 이유 중, 다음 내용이 가장 이해하기 쉬웠고,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소규모 사업이 이런 이자를 감당할 만큼 충분히 높은 수익을 장기간 창출하는 경우는 드물다. 설령 대출 덕분에 사업이 어느 정도 발전했다 할지라도 그 대신 시장의 다른 사업자들을 희생시킬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소도시에 월마트가 들어서면 주변의 많은 소규모 상점이 결국 문을 닫는다. 소액 금융 관계자들은 개발 도상국에서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문을 닫는 사업체들을 간과하는 얘기다. (p.31)
예를 들어서, 내가 일하는 기관이 한 그룹의 농민들에게 가게 창업 비용을 대출해주었고, 그들이 가게를 연다고, 그리고 그 마을에는 원래 다른 가게가 있었다고 생각해 보자. 한 마을에 가게가 두 개가 된다고 수요가 늘지는 않을 것이니까, 원래 있던 다른 가게 주인은, 외국 NGO로부터 돈을 빌리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날벼락 맞고, 문 닫고, 소득이 줄어들 것이다. 이러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 외에도 이 책에서는 다른 마을에 토마토를 파는 사람 이야기도 나온다. 소액 대출을 받아서 토마토가 싼 동네에서 토마토를 사서 비싼 동네에 가서 파는 사람은 결국 토마토 가격 인상에 기여하여 소비자들에게 손해를 안겨준다거나 뭐 그런다는 내용이다. 가게를 열거나 토마토를 다른 동네에 가서 팔거나, 결국 시장논리 내에 있는 이상, 누군가 얻으면, 누군가 손해를 입게 된다.
내가 일하는 기관은 '자립'과 '주민조직'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빈곤한 농민들의 자립을 돕는다는 일을 하고 있다. 자조그룹을 만들고, 소액대출도 하고, 생계 역량강화를 위한 농업기술교육, 문해교육도 한다. 하지만, 빈곤은 흔히 개인이 아닌 구조의 문제라고들 한다. 빈곤한 사람들의 자립을 돕겠다는 우리는, 어쩌면 기존의 부정의한 구조에 부역하고, 이 구조안에서 이길 수 있도록 돕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한편으로는, 구조와 싸우려면 정치화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외국(한국)의 자원을 활용하고 있고, 이 나라는 정치적 자유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가능한 선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스스로 위로해보기도 한다.
이 책의 대부분은 소액금융업계의 문제점과, 그에 맞서 싸운 자신의 무용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이 책의 마지막에 대안이 나올까 싶어서 책을 밤을 새워가며 읽었는데, 아쉽게도 책은 용두사미로 끝난다. 결론 혹은 대안 부분은 짧았지만, 실무적인 조언들로 채워져 있어 소액금융 실무자에겐 다르게 다가왔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무용담(?)과 소액 금융 기관의 여러 관행들을 꼬집는 부분은 꽤나 재미있다. 그중에서도 싱클레어가 소액 금융 기관들의 차량 운영에 대해서 언급한 부분이 가장 확 와 닿았다.
소액 금융 기관은 차량 운영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특권을 지닌 경영진은 사적으로 자동차를 사용하곤 한다. 선호되는 차량은 착색 유리창을 달고 측면에 로고를 새긴 대형 SUV이다.
여기서 '소액 금융 기관'을 NGO로, '경영진'을 소장/지부장 등으로 바꾸면, 그대로 국제개발 NGO의 이야기가 된다. 옛날에 인턴으로 모 NGO에 일할 땐, 차량 운영에 관여할 일이 없었고, 지금 일하는 NGO는 차량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분명 많은 NGO사람들이 기관 차량을 사적으로(출퇴근은 애매하다고 쳐도, 외식이나 심지어 휴가 등) 운영하는데, 기름값이나 차량 정비 비용 등은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아주 궁금하다.
리뷰라고 해놓고, 너무 마음대로 써서, 어떻게 마무리할지 난감하다. 아, 싱클레어가 말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정말 빈민을 위한 소액 금융은 분명히 존재하고, 몇몇 원칙에 충실한다면 더 많은 기관들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오랜 기간 온-오프라인에서 국제개발협력분야를 비판해왔다. 가끔은 비난을 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개발협력을 폐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싱클레어가 훌륭한 소액 금융이 존재한다고 한 것처럼, 훌륭한 개발협력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다른 사람들의 삶에 관여하는 일이니만큼, 더 신중하게, 더 잘 하자는 것이다. 나는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잘 사는 나라와 잘 사는 사람의 부가 못 사는 나라와 못 사는 사람에게로 급진적으로 분배되어야 믿는 사람이고, 여러 방법 중 하나로 국제개발도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나를 위한 변명으로, 엉망인 리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