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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금술사 Feb 07. 2016

두 번 씌는 글

회색글과 검정글 사이에서




몰랐다.


어제의 기억, 오늘의 생각, 내일의 상상이 물든

작은 파편 조각들이 모여

검은 잉크가 아닌 수백만 픽셀의 조합

음소를 채워내고 있을지,

오른손이 아닌 양 손의 분주함
자음과 모음의 조합을 엮고 있을지,
거친 종이가 아닌 매끄럽고 차가운 유리 아래에서
정렬된 문장을 한 줄 한 줄 쌓아나갈지,
일정한 박자로 껌뻑대는 커서를 멍하니 지켜보며

독촉되는 압박감을 느낄지는




타이핑은 신호의 연속에 불과하다.


타이핑을 하며 손끝으로부터 전해지는 에너지는

자음 모음 평등하게 전달된다.

'ㄱ'과 'ㅎ' 그리고 ''를 누르는 힘은 같다.

내게 무엇보다 중요한

''이라는 글자를 적겠다며

자판을 세게 누른 들, 오래 누른 들

하나의 음소는 그저 하나의 신호일뿐이다.


글쓴이의 개성 있는 곡선과 직선은 양보되고

표준화된 글꼴에 의해 거세된 감정의 고저는

활자의 굵기크기 그리고 으로

침착하게 표현된다.

쉼표줄 바꿈 그리고 탁월한 어휘 선택으로

무미건조한 신호에 생명의 호흡을 후 불어넣는다.




이미지는 폭력적이다.


이미지가 사랑받는 시대다.

이미지는 그러나

나만의 색깔, 나만의 곡선, 나만의 여백

 그려볼 기회를 앗아갔다.

이미지를 먼저 본 사람은

나만의 이미지를 채색할 수 없다.


열린 텍스트로부터 그려진 나만의 해리포터는

영화 속 해리포터에게 암살당했다.

죽은 그를 뒤늦게나마 추억하려 해도

절대적 이미지는 그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저마다의 해리포터는 이제 하나다.

빠르고 쉽지만 독점적이다.



다시, 글이다.


글은 읽는 이에게 상상할 기회를 준다.

이미지를 정해놓고 강요하지 않는다.

읽는 이에게 자유를 준다.


글은 읽혀짐에따라 다시 씐다.

글쓴이가 한 번, 으로 밑글을 쓰고

읽는 이가 한 번 더, 으로 마음으로 덧글을 쓴다.

작가와 독자가 두 손을 맞잡고 눈을 마주친 채

좌우의 심장소리를 번갈아 울리며

바른쪽으로 걸음을 옮겨간다.


필요한 것은 모두 짓는다.

도 짓고 도 짓고 집도 짓지만 도 짓는다.

돈이 없으면 의식주를 짓지 못한다.

겨우 지어도 남루하거나 기호는 무시된다.


글은 다르다.

맑은 정신 그리고

자판 위에서 움직여낼 만 있다면

누구든 지을 수 있다.

가난한 자도 글로서

멋진 집에서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밥을 먹으며 행복할 수 있고,

부유한 자도 글로서

생애 마지막 인사를

전할 수 있다.


글은 어떤 모습의 ''도 끌어안아줄  

넓은 가슴의 어머니와 같다.

나의 긴 하소연에도

스스로 결론을 내릴 때까지

침묵을 지키며 나를 지켜봐 준다.




두 번 씌여지는 글


브런치를 통해 신조어를 제안한다.


[ Wrider ]


'Writer'(작가)와 'Reader'(독자)를 합성어다.

발음은 /ˈraɪ·dər/, 'Rider'의 그것과 같다.


작가(첫 번째 글쓴이)와 함께 글을 완성해 가는

능동적 독자(두 번째 글쓴이)다.


고은 선생님께서는  온몸으로 글을 쓰는

신필(身筆)을 말씀하셨다.

'Reader'가 눈으로 글을 읽는 목독(目讀)을 한다면,
'Wrider'는 신독(身讀)을 한다.

가슴과 머리로

그리고

온몸으로 글을 읽는다.


한 권쯤 가지고 있던 글씨 연습 책처럼

Writer는 흰 종이 위에 회색으로 밑 글씨를 쓰고,

Wrider는 온몸을 검은색으로 적신 채

그 위를 구르며 덧쓴다.

비로소 글이 확정된다.


Writer가 쓴 책은 단 하나이지만
각자의 리듬으로 누빈 흔적으로 그득한

나만의 책은 Wrider 수만큼 무한하다.




맺으며


텍스트는 더 이상 라디오, TV, 신문 같은

단방향의 올드미디어가 아니다.

그건 기꺼이 글을 함께 지어나갈

Wrider 분들에 대한 무례다.


Writer와 Wrider가 함께
텍스트의 부활을 주도해야 한다.

텍스트야말로 위로의 언어이고,

자유의 언어다.

생명의 미디어다.


미디어로서의 텍스트는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이미지에 대응하는

가장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방법이다.


나부터

글을 통해 시끄럽게 '짖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짓기'위해 온 힘을 다하겠다.   

이제부터의 고민은

확정된 검은색 글을 쓸 것인가

아니면

미완의 회색 글을 쓸 것인가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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