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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금술사 Feb 10. 2016

놀라지 마라(1)

똘레랑스가 부족한 사람이 잘 놀란다




K교수의 선전포고


대학 첫 학기, 6과목의 첫 수업을 한 번씩 돌고 마지막 한 과목을 남겨 두었다. 앞선 교수님들에게서 고등학교 시절의 기시감을 지울 수 없던 나는 오늘 수업을 미리 상상해 보기도 했다.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읽고 토론하는 수업. 토론 수업이니 좀 낫겠지 하는 간절한 바람이 뒤에서 밀어 주어 가파른 언덕 위의 강의실에 금방 올랐다.  


K교수가 강의실로 들어서자 12년의 학창 시절 동안 훈련된 특유의 경직감이 공기를 얼렸다. 학생들은 흐트러졌던 자세를 꼭 그래야만 될 것처럼 바로 세웠고, 괜한 마른기침으로 각자의 존재감을 미약하게나마 알렸다.


그는 내 예상과 달리, 밟으면 삐거덕 소리가 나는 나무 단상에 오르지 않았다. 대신, 두려운 눈빛으로 가득한 학생들 자리로 다가왔다. 모두가 외면하던 맨 앞자리에 앉아버린 학생 자리 바로 옆 책상 위에 편하게 걸터앉았다. 다리는 꼬지 않았다. 오래되어 보이는 안경 너머로 우리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내 그가 입을 떼고 한 말은 내가 미리 써놓은 극본을 크게  비껴갔다.


"놀라지 마세요. 우리 같은 사회과학도들은 특히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놀란다는 것은 나와 다른 이질감의 반응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는 사회와 그 구성원들의 다양한 개성을 넓은 가슴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의 선전포고에 가까운 당부와 달리, 학생들은 이미 놀라버린 눈치였다. 나도 그랬다. 앞 과목들 수업들로 미루어 보건대, 따분한 강의 내용 설명과 성적평가 방식 그리고 어른 초보들에 대한 꼰대스러운 경고를 주는 것이 '놀라지'않을 만한 편안한 전개였다.


그는 아무래도 호흡을 멈춘 듯 해 보이는 학생들에게 이어 말했다.


"한 사회가 건강하려면 다양성을 존중하는 관용의 정신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우리도 주변의 특이성에 놀라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 봅시다. 자 이제, 리바이어던을 펼쳐 볼까요?"


그 뒤로 함께 읽기 시작한 리바이어던의 명문장들을 나는 눈으로만 겨우 쫒았다. '놀라지 마라'는 그 메시지에 압도되어 수업에 집중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이 놀랐던가. 조금만 나와 다르면, 내 예상과 다른 반응과 결과가 나타나면, 내 상식을 벗어나면 나는 주저 않고 놀랐다.  


"왜 저런 말을.."
"왜 저런 행동을.."
"왜 저런 모습을.."
"도대체 왜..."


나의 좁은 세계관을 평소의 감정표현의 정도와 빈도로서 스스로 확인하자 부끄러워졌다. 이해심이 많고 경청을 잘하는 아이라는 과분한 칭찬을 듣고 컸지만 그건 껍데기였던 것이다.





놀란다는 것


놀란다는 건 뒤로 자빠지듯이 화들짝 하거나 소리를 내질러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K교수가 말한 '놀람'은 외부 자극을 맞닥뜨리고 내면에서 나온 첫 반응을 가리키는 넓은 의미이다. 낯선 것에 대한 불편함과 어색함을 시작으로 '어떻게' 놀랄지가 결정될 뿐이다. 섬세한 사람은 혼자 조용히 놀라고, 솔직한 사람은 말과 행동으로서 그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또 용감한 이는 그 이질감을 직접 제거하려 나서기도 한다. 그 이질감과 낯선 느낌의 기준은 오로지 '나'였다. 내가 속한 사회가 만든 '나' 그리고 개인적 편견과 경험이 만들어 낸 '나'. 두 명의 '나'가 무엇에 얼마나 놀라야 할지 지침을 줬다.


사실, 인간은 잘 놀라도록 설계되어져 왔다. 맹수들의 위협에 늘 노출된 일상에서 생존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원시의 수렵 채취 사회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 변화가 빠르며 예측이 어려운 현대의 경쟁사회에서 나의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를 빠르게 감지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대비(對備)적 감정으로서 발달해 왔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위협적인 존재나 상황을 마주하고도 놀람이 없이 아무런 준비태세도 갖추지 않는다면 자신을 지켜낼 수 없다는 경험적 기억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나'와 '다른 세계'를 확인하고 그 차이를 인지하는 것은 외부 환경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인 면역 반응인 것이다.


따라서 놀람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좋은 놀람의 다른 사례를 들자면, 아무런 기대없이 생일을 맞은 내가 친구로부터 받은 깜짝 선물에 감격하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호의의 감정으로서의 놀람이다. 매번 서류전형에서 탈락하던 내가 최종면접 대상자로 선정된 소식을 접하며 뛸 듯이 기뻐하는 것은 그간의 자조와 체념을 날려버리는 긍정적 놀람이다. 한 분야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선 누군가를 경외하게 되는 것도 자기발전을 지속시키는 동기부여적 놀람이다. 다만, 우리는 이렇게 감격해서 또는  기뻐서 놀라는 일이 매우 드문 세상에 살고 있다. 기쁘고 벅찬 놀람이 없어도 좋으니, 그저 하루하루가 평화롭기만을 바라는 소극적 행복을 바라는 사람도 많아졌다. 평화롭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어떠한 종류의 놀랄 거리도 발생하지 않는 평시 상태다.


좋지 않은 놀람은 무엇일까. 사람 사이에서 서로에 대한 진정한 믿음이 있다면 상대에 대해 부정적 놀람을 느낄 일은 그렇게 많지 않다. 아니 많지 않아야 한다. 상대를 신뢰하고 처지를 이해할 수 있다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내가 손해를 조금 보더라도 양보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처음 보는 낯선 이와 친구가 똑같이 내 뒤통수를 때리고 달아나도 두 사람에 대한 나의 분노 수준이 다른 것은 곧 놀람의 정도가 달라서다. 믿을 수 있는 친구는 장난 삼아 그럴 수도 있지만, 믿지 못하는 남은 절대 그럴 수는 없다는 인식이 본능적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히 생판 남이 때린 뒤통수가 더 아프고 더 충격적이다. 전 세계 공통으로 세대 간의 갈등이 심해지고 남녀 간의 적대적 태도가 관찰되며 민족주의적 성향이 짙어지는 현상도 이러한 신뢰의 총체적 결핍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서로에 대해 잘 모르니 신뢰를 하기 어렵고 무슨 짓을 하면 더욱 놀랍다. 용납이 되질 않는다. 곧 서로를 더 알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믿을 수 있다면 덜 놀랄 수 있다. 그리고 덜 놀랄수록 더 너그러워진다. 저신뢰 사회가 가져온 배타적 성격의 놀람은 나 혹은 우리만이 정상(正常)이며 세계의 기준이라는 인식을 스스로 재확인함으로써 존재론적 불안을 해소하려는 몸부림으로 읽힌다.





놀람으로부터


의도를 갖든 갖지 않든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대부분의 부정적 놀람은 자기방어적이거나 심지어 적대적 태도로 이어지기 쉽다.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외부 자극에 대응하는 의식의 흐름 단계를 내 멋대로 세분화해 본다면

#1단계  낯선 사실 확인 (직접 관찰, 전해 들음, 과거 사실 회상)

#2단계  자신을 정상으로 가정하고 해당 존재와의 거리감을 인지 ('놀람' 발생)

#3단계  거리감을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적(으로 보이는) 명분을 찾아 나섬

#4단계  본인을 다수 속에 안정적으로 속한 '정상'으로 결론

#5단계  상대 존재를 열등한 것, 모자란 것, 어리석은 것으로 평가해, 나와 상대를 완전히 분리시킴

#6단계  이전 단계까지 진행한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 유무형적 집단을 형성해 소속감을 느낌

#7단계  본래의 차이를 넘어선 맹목적, 배타적, 감정적 인식 공고화


극단적인가. 5-7단계는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위의 '놀람 작동' 플로우는 동시에 우리 사회내 정치적 이념과 종교, 성별 등 극단으로 갈라설 때 보이는 흔한 갈등 전개 양상이기도 하다. 나와 우리만이 옳고 당신과 너희들은 무조건 틀리다는 발상, 상대의 생각과 입장이 나와 다를 수 있음을 의도적으로 망각하는 태도가 그것이다. 5단계 이후로 진행이 되었다면 단단한 매듭을 풀기 위해 길고 튼튼한 손톱을 길러야만 한다.


차이를 인정하고 차별하지 않는 것이 관용(똘레랑스)의 정신이라면 우리는 매우 관용적이지 않은 사회에 살고 있다.  좁디좁은 자기 세계를 기준으로 한 '놀람'이라는 사적인 초기 감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나와 너, 정상과 비정상, 다수와 소수, 강자와 약자, 갑과 을을 구분하는 기준으로까지 나아갔다. K교수가 말한 '놀람'과 '관용'의 고리가 이제 선명하게 보인다.





우리가 놀라야 할 것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모든 것에 놀라워하지 말고 사회와 사람에 무덤덤한 동상이 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놀라 마땅한 것들을 가뿐히 지나치고, 사회를 다양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것들에 대해선 과도하게 놀라며, 선과 악을 성급하게 분류해 사회 갈등을 부추기는 상황에 국한한 것이다. K교수도 이를 사회과학도의 자세로 전제한 바 있다.


세상엔 여전히 인간의 상상과 사고를 뛰어넘는, 놀람을 기다리는 찬란한 것들로 가득하다. 다만 우리는 무심했을 뿐이다. 당연하고 하찮게 여겼을 뿐이다. 단단하고 차가운 흙속을 뚫고 올라와 떡잎을 피워내는 씨앗의 생명력에 새삼 놀란다면, 내가 생각한 대로 자유롭게 움직여주는 내 손가락들에 새삼 놀란다면, 지구상의 어느 누구든 같은 달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면 우리는 삶에 무한한 감사와 겸손을 절절하게 느낄 수 있다.


오늘부터 내가 무엇에 놀라고 있는지 가만히 지켜보자.



후속 시리즈
[놀라지 마라(2) 뉴스에 놀라다]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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