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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금술사 Mar 11. 2016

야간 숟가락

숟가락을 뜨니 마음이 가라앉다


당신, 오늘 하루도 수고했다.

갖은 어려운 상황과 속내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을 상대해 내느라 수고 많았다. 나이로는 어른이기에 싫은 순간에서 도망치지 않고 해야할 일을 묵묵히 해 내었다.


많은 돈을 버는 일을 한게 아니지만

그렇게 좋아하는 일은 한게 아니지만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 할만한 직업이 아니지만

당신의 오늘로 세상이 달라지진 않았지만

잘하고 있다는 칭찬과 격려를 해주는 사람하나 없지만


오늘 하루를 기특하게도 무사히 살아내었다. 사회가 원하는 금형에 당신을 꼭 맞추어냈다.


덕분에 뒷목과 어깨는 단단히 굳어있고 호흡과 맥박은 조금 빨라져 있다.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당신의 하루를 온종일 위협하던 외부세계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기위한 경계감이 풀리지 않았다.


퇴근길 밤거리 taken by JSL

밤이 내렸다.

낮의 팽팽한 긴장과 어수선은 녹기 시작했다.


00대리, 00학생, 00엄마, 00선생님, 00기사님, 00선배, 00회원님... 이 아닌


인간으로서 나 자신으로서 진짜 내 모습과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시간, 밤이 왔다.


역할놀이를 끝내자,

금형으로부터 딱딱하게 굳어진 몸을 끄집어내자,

선명해 오는 본능적 욕구, 허기.


"아, 배고프다"


낮동안 행여 삐져나올새라 꼭꼭 감추어 놓았던

철없이 보이고 싶지 않아 참아왔던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보내기위해 미뤄놓았던 우리의 보편적 욕구인 식욕이 꿈틀꿈틀 채비를 한다. 그리고 어김없이 초인종을 누른다.


딩동

"나 왔어"


날짜는 이미 바뀐 시간이다. 저 친구는 매일 이 시간에 찾아온다. 언제는 날이 밝아 스스로 돌아갈 때까지 문 바깥에서 기다리게 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못 이기는 척 나가 그를 맞는 날도 있다. 더 흔하다.

연신내역 6번 출구 포장마차 손칼국수, 4000원 taken by JSL

그를 들인 당신은 야간 숟가락을 들었다. 낮에 든 숟가락에선 차갑고 딱딱하게 느껴졌던 쇠 숟가락의 감촉이 야간 숟가락에선 따뜻하고 둥그런 안김으로 감싸안았다.


짠지 신지 뜨거운지도 모르고 해치웠던 밝은 낮의음식들은 어둠이 내리니 각자의 맛과 향 그리고 모양과 색을 드러냈다. 선명하고 뚜렷해졌다.


눈과 코, 입과 귀로 맞아들이는 먹을 것 그 자체. 거기엔 서두름도 긴장도 가식도 없다. 강요된 선택도 없다. 음식이 드러내는 오감의 존재감과 있는그대로의 당신이 만났다. 야간 숟가락 위에 진짜 음식이 올라가 있다.


야간 숟가락에 얹어지는 진짜들의 무게가 줄어들자 문득 깨달음이 온다. 내가 그토록 배고팠던건 실은 정신적 허기때문이 아니었을까하는.


인정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그 결핍의 마음을 돈으로 살 수 있는 음식으로라도 채우려 한 건 아니었을까. 그래서 뭔가 배부른 느낌으로 위안을 받고 싶은 바람, 채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를 고프게 한 걸까.


씹히는 재료의 식감을 온전히 느끼며 먹었던 한밤중의 새우 만두와 브라더소다 taken by JSL


주간 숟가락엔 음식만 서둘러 채워지고 비워지기를 반복한다.


야간 숟가락엔 위로와 격려, 보살핌이 더 얹어있다. 오늘, 처음으로 먹는 진짜 음식 위에.


오늘도 내 왼 손엔 야간 숟가락이 들려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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