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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금술사 Jul 24. 2016

제주가 내게로 왔다 2

두 번째 플래시백 [이호테우 해변의 연극]




나 : 교수님 안녕하세요.
S교수 : 교수님이라고 부르지 마요. 이름 불러요. 00 씨라고 불러요 그냥.
나 : (조심스럽게) 00님, 이지수라고 합니다.



기회는 충분한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함부로 내어주지 않는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상상하고 그려보아도 좀처럼 그때 와주질 않는다.


하긴, 하나 둘 셋 짠! 하고 내가 세는 손가락에 세상이 컷을 외쳐주길 바라는 건 오만이다. 세상엔 셋을 세는 저마다의 손가락이 너무 많기에.


제주에서의 수요일.

감사한 분의 소개로 평소에 꿈꾸던 아이디어를 실현하는데 기술적으로 조언을 주실 분을 만났다.


갈치회가 인상적이었던 [taken by JS.L]


비 내리던 화요일 밤, 동문시장에서 사 온 모둠회를 초장에 찍으며 나눈 이야기가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나의 꿈을 듣던 세명의 천사는 진심으로 공감해주고 각자 다른 방식으로 응원해 주었다. 회보다 더 날것같이 싱싱하고 탱글탱글한 이야기를 신나게 하며 혀를 깨물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한 분의 눈이 갑자기 반짝였다. 궂은 날씨 속 두어 시간 만에 대어를 낚은 강태공의 눈빛이었다.


강태공 천사 : 지수님께 소개하여 드리고 싶은 분이 있어요. 홍콩과기대 컴퓨터공학 교수님인데 제주 모임 때 참여하시면서 알게 된 분이에요. 까치네라는 토종 포털을 개발한 분이신데 그분이라면 지수님의 이 아이디어에 보다 테크니컬한 피드백을 주실 수 있지 않을까요?


자리를 옮긴 맥도널드에서 그녀는 놀라운 제안을 했다. 그러고선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두 엄지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고 두 눈은 작은 화면 밖을 벗어나지 않았다. 카라멜 솔티드 아이스크림 콘을 먹던 나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이스크림은 광고처럼 더 이상 달고 짜지 않았다. 차게만 느껴졌다.


강태공 천사 : 내일 세시에 잠깐 시간이 나신 대요. 제주대학교에서 보기로 했어요.


제주에 오면서 이런 기회가 생길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내일이라니. 무엇부터 말해야 할까. 무엇을 뺄까. 무엇을 강조할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여행지에서의 기분 좋은 시끄러움 속에 안정을 취하던 나는 주변 환경과 사람들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 패스트푸드점답지 않은 엄숙함과 비장감에 나 홀로 둘러싸였다.


그날 밤, 게스트하우스 2층 침대에 누워 교수님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았다. 하나만 더 하나만 더 하던 게 날이 밝았다. 한두 시간이라도 잠을 청해보려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아니, 잠이 오기 전에 내가 마중조차나가지 않은 탓이다.


약속시간까지 한 시간여를 앞두고 교수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S교수 : 탑동에 계신 거면 이호테우 해변에서 보실까요. 물놀이나 하면서 이야기 나누시죠. 먼저 가서 자리 잡아놓겠습니다. 파란색 파라솔입니다.


나 : (해.. 해변이라고..?)


제주대학교 내의 카페에서 노트북 화면 뒤에서 앉아 차분히 설명을 하고 있던 내 시뮬레이션 영상을 제주의 푸른 바다가 단숨에 지워버렸다. 한편으로는 제주 해변에서 아이디어 피칭을 하는 사람이, 또 듣는 사람이 흔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묘한 호기심과 짜릿함도 들었다.


남은 시간은 30여분. 도무지 그려지지 않는 배경과 장소를 받아 든 나는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교수님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매우 자유로운 사고와 라이프스타일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나도 인위적으로 무언가를 준비하고 멘트 하나하나를 고민하지 말고 평소에 생각해 두었던 내 비전과 꿈을 솔직하고 편안하게 전해드리고 온다고 생각하자. 노트북을 덮었다. 내가 왜 이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었는지, 이것을 통해 내가 세상에 기여하고 싶은 가치는 무엇이었는지, 궁극적인 사명은 무엇인지를 되물었다. 여기 위에 살을 덧대는 것은 잠시 후 해변 위의 나에게 전적으로 맡기기로 했다. 그 친구는 어떻게든 잘 해낼 것이다. 오로지 지금의 '나' 가 관건이었다.


이국적 이름의 해변, '이호테우 극장'이라고 해도 멋지다 [taken by JS.L]


이호테우해변은 조금 이른 피서객들로 붐볐다. 그중엔 소탈하게 깔려있는 비치타월 앞에 바다의 들숨날숨에 청진기를 가져다 댄 듯한 표정의 교수님이 서 계셨다. 그는 이미 바다의 호흡에 여러 번 관여한 듯 웃통을 벗고 있었고 몸은 젖어 있었다. 수영을 즐기시는 분이셨다.


교수님은 제주 토박이 같은 순박한 웃음으로 우리 일행을 맞아주셨다.


처음 본 사이, 옷을 입은 자와 벗은 자, 교수님과 학생, 제주에 익숙한 자와 생경한 자가 성인 몸을 겨우 감쌀 타월 위에 좁디좁게 앉았다.


카페의 시원한 에어컨 대신 짭짤한 바닷바람이

푹신한 소파 대신 거무스름한 모래 방석이

세련된 배경음악 대신 찰싹거리는 파도소리가

차가운 아메리카노 대신 뻥 뚫린 하늘이

거기 준비되어 있었다.


첫 한마디 시작이 어려웠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팀원들은 사전에 약속도 없었건만 각자의 위치에서 보이지 않게 나를 도왔다. 교수님은 내 이야기에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시며 공감해주셨다. 이야기의 핵심인 세월호의 사례가 언급될 때는 유독 먼 바다를 아득히 바라보셨다.


이호테우 해변 위의 어수선한 주변 환경에 나는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이 들려주는 규칙과 엇박의 소리가 나를 집중하도록 도왔다. 나와 교수님이 무대에 올랐고 자연은 관객이 되어주었다. 그와 내가 주고받는 대화만이 바다를 밀고 끌어당기는 힘을 주재했다. 관객은 험하지 않은 파도와 따갑지 않은 햇살로 보답해 주었다.


무대를 밝게 비추던 핀 조명이 꺼졌다. 이제야 관객의 얼굴이 하나하나 들어왔다. 이호테우 해변의 명물인 목마 형상의 등대며 아름다운 해변.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과 행복한 표정의 연인, 짓궂은 장난을 치는 친구들 그리고 밀물 썰물에 까르르 좋아하는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부부들. 이들 모두가 각자의 극에 충실하고 있었던 배우이자 나의 소중한 관객들이었다.


막이 내렸고 온 몸에 힘은 다 빠졌다. 한 배우의 어설픈 독백을 듣던 노련한 배우는 곧바로 바다로 향했다. 체력을 소진한 신참 배우는 해변을, 무대를 지켰다.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다 전했다. 앞으로의 방향성에 큰 도움이 될 조언도 들었다.


발연기 해놓고 탈진한 아마추어 배우 [taken by JS.L]


무대는 언제든 어디서든 세워질 수 있었다. 나를 주목하고 내 목소리를 집중해 듣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곳이 무대였다. 상대 배우에 따라 무대 배경에 따라 이야기를 알맞게 편집하는 건 순간의 애드리브이었다. 그렇다고 준비와 계획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준비한 대로 계획한 대로 흘러가는 법은 없지만 그걸 미리 해보는 과정에서 애드리브를 칠 내공이 쌓인다는 것을 체감했다.


상대 배우와 관객은 그리고 무대는 나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나만을 기다려 주고 있지도 않다. 그들도 그들의 극이 바쁘게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이 전제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나름 호연(好演)의 무대였다.



그렇게 제주에서의 무대가 내게 왔다.




첫번째 이야기 [펜을 든 버스기사]

https://brunch.co.kr/@thealchemist/31 

에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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