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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금술사 Jul 16. 2016

제주가 내게로 왔다 1

첫 번째 플래시백  [펜을 든 버스기사]


올해보다 내년에 더 가까워진 달, 7월.

닷새간 제주에 머물렀습니다.

여행과 일을 동시에 안고 가는 일정이었죠.

제가 제주에서 겪은 일이자,

제주가 저를 경험한

우연과 필연들.

그 속에서 만난 사람과 풍경을

옴니버스로 풀어봤습니다.


연재될 이야기는 창작이 아닌 실화이며,

동영상으로 된 세상에 사진기를 들어

순간순간을 직접 담아보았습니다.

이 사진 속의 사람들이나 물체는 정지해 있지만,

제 눈과 귀엔 그때의 생생한 현장입니다.

재생을 반복할수록 등장인물의 목이 상할까 봐

볼륨은 줄여 놓았습니다.


글로 된 영상을 관람하실 관객께

상영합니다.




나 : 제주시청 가나요?
기사님 :(절레절레)
나 : (실망감에 내리려 하자)
기사님 : 일단 타봐요. 갈아타는데서 내려줄 테니


팀원들과의 미팅을 위해 제주시청 인근에 위치한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에 가는 날.


6년 만의 제주여행으로 부풀어 오른 마음이 제주 도착과 함께 쏟아지기 시작한 야속한 비를 잔뜩 머금었다. 비바람을 맞아가며 한 시간 배차간격의 버스를 계속 낭만스럽게만 기다리기엔 내 수양이 부족했다.


내가 기다리는 버스는 늘 그렇듯, 내가 오기 직전에 떠난 모양이다. 30분이 넘도록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제자리에만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워 다른 버스를 잡아 탔다. 버스번호는 내 버스와 한참 차이가 났지만 들르는 곳은 근처이기를 이기적으로 바라면서. 나중에 알아본 바로는 두 버스노선의 차이는 버스번호의 간격보다 훨씬 컸다. 제주는 넓은 섬이었다.


이방인을 맞는 데 익숙하다는 듯, 나와 엇갈린 노선의 기사님은 기다리는데에 설렘을 모두 깎아먹은 여행자의 마음을 어우러 만져 주었다.


기사님 : 버스가 자주 안 오니까 이거 타고 내려서 갈아타고 가요. 제주시청 가는 건 많아. 저기 가면.


여행 첫날의 포부와 기대, 흥분이 컸던 만큼 제주의 날씨와 무심한 배차간격에 원망이 작지 않았다. 무표정한 기사님의 얼굴 그리고 툭 내뱉는 말투와는 어울리지 않는 손님에 대한 걱정과 챙김은 그만큼 더 따스했다.


기사님 : (버스 입구 쪽 맨 앞자리를 가리키며) 여기 앉아요.
나 : 네. 감사합니다.
기사님 : (펜과 종이를 꺼내며) 거기 내리면 한 다서 여서 정거장이면 가요. 시청까지.


기사님은 도로 위 대부분의 운전자와는 반대로 적색신호를 기다렸다. 운전대로부터 잠시 손을 거두기 위해. 전방으로부터 잠시 시선을 거두기 위해. 그리곤 거침없이 일련의 숫자들을 적어 내려갔다.



회색도로위 적색신호아래서 쓰여진 검정 숫자들 (taken by JS.L)


기사님 : (팔을 뻗어 나에게 건네주시며) 이게 제주시청 가는 버스니까 이거 중에서 먼저 오는 거 타세요. 500번이 제일 자주 오긴혀.
나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보다 더 나은 표현을 찾는데 실패한 나는 그 말을 반복하는 것으로 진심에 대한 진심의 감사를 전했다.


수없이 많은 버스를 타며 만났던, 세상에 불만이 가득했던 기사님들에 대한 미움이 사라졌다. 한 기사님이 수줍게 건넨 작은 종이 한 장으로.


버스를 탈 때마다 카드만 가져다 대지 않고 가볍게 목례를 하며 기사님께 인사하던 습관이 이곳, 제주에서야 작디작은 인상을 남겨드린 건지도 모르겠다.  



비에 젖게 할 수 없어 한 손엔 우산을 다른 손엔 종이를 가슴 쪽으로 당겨 쥐었다. 종이에 적힌 검은색 숫자들은 현무암으로 쓰인 것 같았다. 인정(人情)의 마그마가 녹아 흘러 굳은 현무암 세립질이 표현한 10개의 아라비아 숫자들.


내가 바라던 숫자가 적힌 버스는 끝내 오지 않았지만 뜻밖의 숫자들이 내 손에 들려있었다.



나는 제주에 갔고 제주도 내게 와 있었다.




두번째 이야기 [이호테우 해변의 연극]

https://brunch.co.kr/@thealchemist/32 

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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