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플래시백 [바가지 장삿속의 반전]
할머니: 젊은이 나 사진 한 장만 찍어줘
나: 네 할머니
성산일출봉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봉을 한 폭에 담아내는 스타벅스에서 더위를 식혔다.
초록색 빨대로 올라오는 게 시원찮을 때 쯤,
알 수 없는 직감으로 우도행 표를 끊기로 했다.
뚱한 표정의 성산항 매표소 직원은
팸플릿에 적힌 시간표 맨 아래에
나오다 마는 빨간색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두 번 그렸다.
매표소 직원: 오늘 돌아오실 거죠?
나: 네
매표소 직원: 돌아오는 배가 여섯 시 반이에요. 한 시간 반밖에 안 남았어요
나: 네, 주세요
우도의 명물인 전기 스쿠터로
섬 주변을 달리며 둘러보고 싶은 마음에
초조해졌다.
나: (두 시간 기준이라던데 탈 수 있을까...)
최저가를 자처하는 많은 대여업체 중
한 곳에 들렸다.
하얗게 샌 코털이 제멋대로 삐져나와있는
할아버지 한 분이 서 계셨다.
나: (2만원을 쥐고 서성거리자)
흰 코털 할아버지: 뭐? 스쿠터?
나: 네. 배 시간 때문에 한 시간 반밖에 못 탈거 같은데...
흰 콧털 할아버지: 한 시간 반은 없어. 두 시간이야
나: (하.. 저녁 굶을까)
고뇌에 빠진 나를 보던 할아버지,
2만원을 내밀자
흰 콧털 할아버지: (무심한 듯) 5만원이야
나: (이런 순..) 네???
할아버지는 진지했고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관광지에 으레 있는 바가지 씌우는 상인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흰 콧털 할아버지: (시계를 보더니) 돈 아까우니까 그냥 해안도로 따라 쭉 걸어
나: 아..
흰 콧털 할아버지: 걸어서 갔다 와. 저기로 쭉 가. 다 볼 수 있어. 막배 시간까지
주어와 서술어로만 된 단문을 툭툭 내뱉던 그는
장사보다
나를 먼저 생각해주었다.
고개를 돌리면 널려 있는 타업체를 의식 않고
수익을 내는데 우선하지 않고
터무니없는 가격을 불러
나를 단념케 도왔다.
그래도 아쉬움이 드는 건 사실.
그가 대충 가리킨 방향을 따라 걷기 시작한 지 5분.
스쿠터에 오른 이들이 내 옆을
약올리듯 씽씽 지나갔다.
옆에 있는 다른 업체에선 스쿠터 여러 대가
막 출발하고 있었다.
다른 곳까지 가서 탈 마음은 없었다.
흰 콧털난 할아버지가 조금은 원망스러웠다.
자주 오는 곳도 아닌데..
내 돈 내고 타겠다는데..
진짜 타고 싶었는데..
(자기가 늦게 온 건 생각도 안 하고)
이왕 걷기로 한 거
내 신체가 구사하는 속도에 맞춰 걸었다.
파란 하늘에
파란 바다에
섬 특유의 고즈넉한 존재감을
하나하나씩 받아들이자,
점점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속도는 그들보다 한참 느렸지만
생동적으로 변하는 원근감을
주체적으로 느끼기엔
탁월했다.
수시로 멈추었고 수시로 좌우를 둘러보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다른 구도가 보이고
다른 생각이 들었다.
다른 기분이 났다.
눈 앞에 펼쳐지는 황홀함을 인지하고
내 감상을 담아 정리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자연히 확보되었다.
빠른 바퀴로 순식간에 지나가선
좀처럼 경험하지 못할
세밀한 카메라 워킹.
나만의 일시정지, 회전, 줌인, 줌아웃.
그리고 깊은 음미.
하이-커트
어느새,
나보다 앞서 걸어가시던 할머니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할머니는 혼자 걷고 계셨다.
윗풍경과 아랫 풍경이 구별 안 되는 제주의 바다를 향해
어색한 모습으로 스마트폰을 들이미셨다.
그 모습을 뒤에서 관찰하던 내가
그녀의 눈에 띄었다.
각자 일행이 없어 보이는데서 오는 묘한 친밀감.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여행자로의 동질감.
말을 걸어볼 수 있는 틈.
그 힘이 수줍은 그녀에게 용기를 주었나보다.
할머니: 젊은이 나 사진 한 장만 찍어줘
나: 네 할머니
할머니의 스마트폰을 받아든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공을 들여
그녀와 제주가 함께 담긴 화면에 버튼을 눌렀다.
5인치 화면 속 그녀는 소녀처럼 수줍게 웃었고
두 손을 굽힌 무릎에 가져다 대며
포즈를 취했다.
몇 장 찍어드리고 조심스럽게 여쭈었다.
나: 할머니 저희 같이 한 장 찍을까요?
할머니: 그려. 같이 찍어.
걷고 걸으며 사진을 찍고
두 눈에 담아가시는
할머니 여행자가 정말 멋졌다.
이 또한
스쿠터에 앉아 쌩쌩 지나다녔으면
만나지 못했을 인연.
할머니가 내 눈에 들어올 새도 없이
할머니가 나를 발견할 새도 없이
앞으로
전진하는 데에만
신나있었을 거다.
내가 걸어 다니게 되어서
할머니가 두고두고 보실 수 있는
사진을 남겨드린 것 같아 기뻤다.
할머니와 헤어진 뒤,
우도를 찾은 외국인들과도 대화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다.
모두들 반갑게 나를 대해주었다.
막 배에 올라
한 시선에 점점 담겨와 가는
우도를 바라보았다.
저녁 반주로
누리끼리한 잔에 땅콩 막걸리를 따르는
흰 콧털이 삐죽 나온 할아버지가 그려졌다.
한 청년에게
따뜻함이 그득 들은 바가지를 씌운 일을 떠올리며
혼자만 알, 보일 듯 말듯한 미소를 짓기 바랐다.
천천히 가니 제주가 다채롭게 다가왔다.
첫 번째 이야기 [펜을 든 버스기사]
https://brunch.co.kr/@thealchemist/31
두 번째 이야기 [이호테우 해변의 연극]
https://brunch.co.kr/@thealchemist/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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