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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금술사 Feb 07. 2020

0번 확진자의 양심 고백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 따위가 세상을 뒤덮었다.


사람들의 손과 얼굴을 덮었고,

집 밖을 나서려던 의지를 덮었고,

뉴스와 이야깃거리를 덮어버렸다.


1번, 2번,,,23번으로 냉혹히 매겨지는 순번과

양성과 음성으로 명료하게 갈리는 희비 사이에서

누가 어디를 다녀왔는지 모처럼 관심을 갖는 요즘이다.


매서운 추위로 얼릴 겨울은 그 답지 않았고

뽀드득 밟혀야 할 눈은 내리다 말았다.

현실의 겨울 왕국은 미지의 세계일 뿐이었다.


거대한 자연재해와 공기 중 바이러스 앞에서

인간은 무력하다.


자동차가 알아서 운전하고

걸어 다니며 끊김 없는 라이브 방송을 보는 세상에

우리가 할 수 있다는 일은

몇천 원짜리 흰 천 쪼가리로 코와 입을 가리는 것,

휘발성 알코올로 손을 헹구는 것뿐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0번째 확진자다.

신종플루, 메르스, 코로나 같은 바이러스든

심혈관질환, 희귀병, 암 같은 질병이든

교통사고, 실종, 살인 같은 사고든

숙환으로 인한 죽음까지 기다리지 않더라도

죽음의 순간을 코앞에 마주대고 있다.


바이러스처럼 살갗에 와 닿는 위협이 아니더라도

죽음을 직시하고 염두에 두어야 한다.

두려움과 경계심의 무게에 짓눌리라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내가 무언가의 몇 번째 확진자가 될 수 있다는

겸허하고 겸손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거다.


덕분에 아침 햇살이 감사하고

내 앞에 있는 사람에 집중하며

가지지 못한 것보다 이미 가진 것에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내 의지로 힘들이지 않고 호흡하며

좋아하는 음식을 선택해 맛볼 수 있고

누구의 도움 없이 두 다리로 원하는 곳을 갈 수 있음을

당연시 여기지만 않는다면,


가족과 친구와 동료와 이웃사촌에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다.  

내가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을 수 있다.

내일에 한번 더 희망을 걸어볼 수 있다.

가슴이 뛰는 일을 찾을 수 있다.

언젠가 행복할 것이라는 약속을

오늘 지킬 수 있다.


0번째 순서일 뿐,

내가 이미 확진자라는 사실을 안다면,

얼굴이 아닌 마음에 씌워진

두텁고 답답한 KF94 마스크부터 떼어낼 수 있지 않을까.



확진자가 꼭 죽음에 이른다는 결론을 지어놓고 쓴 글이 결코 아님을 알립니다.

우리가 요즘 두려워하는 대상은 코로나 바이러스 자체가 아니라, 명확한 치료법이 아직 나오지 않은 질병의 높은 위험성입니다. 어떠한 질병이든 그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바이러스 확진자를 포함해 극단적으로 '사망'이라는 잠재적 위험을 갖습니다.

우리가 현재 유행하는 바이러스를 '확진자'라는 분류 기준으로 두려워하고 이를 예방하려 철저히 노력하듯이, 평소에도 잠재적인 죽음의 가능성을 상기하자는 취지에서 적은 글로 읽히길 바랍니다.

더 이상 확진자가 추가되지 않기를 바라며, 기존 확진자 분들의 빠른 쾌유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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