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피어나는 꽃에게

by 조영환


[바람이 남긴 편지, 나무가 들려준 이야기]

늦게 피어나는 꽃에게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봄, 경이로운 생명의 계절이다.

아기 솜털같이 올라오는 새 생명의 기운이 땅의 기운을 받아 움트는 계절이다.

겨우내 메마른 나뭇가지에 새순이 돋고 지난가을 떨어진 낙엽 틈을 뚫고 새 생명의 새싹들이 돋아난다.


알에서 깨어난 올챙이, 고치를 벗고 나온 애벌레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나 둘 피기 시작한 봄꽃들이 수놓는 생명의 향연이 시작된다.

봄은 그렇게 새 생명을 키우기 위한 준비를 한다.


3월은 겨우내 얼었던 땅속에서 움크리고 있던 새순들이 땅을 뚫고 올라오기 시작한다.

물이 오르기 시작하며 겨울눈을 틔운 갯버들도 겨우내 깊은 잠에서 깨어난다.

춘분이 다가오며 밤과 낮 길이가 같아진다.

'꽃샘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는 속담처럼 아직은 추위가 봄을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머무는 시기이다.






유난히도 춥게만 느껴졌던 겨울이 가고 창밖에는 화사한 봄이 찾아왔지만, 마음속 계절은 여전히 겨울 끝자락에 머물러 있을 때가 있다. 햇살은 부드럽게 스며들고 거리엔 꽃들이 피어나는데, 정작 내 안의 온도는 좀처럼 오르지 않는다. 모두가 새로운 시작을 이야기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눈에 띄면, 나만 멈춰 있는 것 같아 스스로를 다그치게 된다. "왜 나는 아직도 이러고 있지?"라는 물음이 자꾸만 고개를 든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봄이 오면 모든 것이 단번에 바뀌어야 한다는 건 누구의 기준일까? 꽃들도 각자의 시간이 있다. 어떤 꽃은 봄바람이 불자마자 피어나고, 어떤 꽃은 느릿느릿 따스함을 충분히 머금은 후에야 모습을 드러낸다. 내 마음의 봄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


겨울 끝자락에 머무는 내 모습도, 어쩌면 변화로 가는 과정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얼어붙은 땅이 녹으려면 시간이 필요하고, 움츠렸던 가지에 싹이 돋아나려면 충분한 햇살과 비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니 아직은 내 안의 계절이 겨울이라고 해도 괜찮다. 그 겨울도 언젠가 지나가고, 나는 내 속도로 피어날 테니까.


봄은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말해준다.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 벚꽃도, 개나리도, 목련도 저마다 피어나는 때가 다르다. 어떤 꽃은 3월에, 어떤 꽃은 4월에, 또 어떤 꽃은 더 늦은 시기에야 비로소 피어난다. 자연은 한 번도 우리에게 서두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우리는 그저 우리만의 속도로 살아가면 된다.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지금 내 상태를 인정해 주는 것. 나에게도 그런 봄날 같은 따스함이 필요하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내 마음이 준비되면, 나만의 계절이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찾아올 테니까.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건 조용하지만 강력한 위로다. 때가 되면 피어난다는 진실. 다른 꽃이 피었다고 해서 나도 당장 피어나야 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어떤 꽃은 빠르게 피어나 화려하게 빛나고, 어떤 꽃은 느리게 피어나 오래도록 향기를 남긴다. 결국 중요한 건, 내가 피어나기로 한 순간을 믿고 기다리는 용기 아닐까?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 새 계절을 맞이해야 한다는 게 버거울 때도 있다. 어쩌면 그런 마음마저도 자연의 순리일지도 모른다. 가지 끝에 돋아나는 새순도 오래된 껍질을 밀어내느라 아플 것이다. 부드럽게 보이는 꽃잎도 사실은 봉오리를 열며 안간힘을 다해 세상에 얼굴을 내민다. 그러나 나무는 그 아픔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더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언젠가 분명 푸른 잎을 펼칠 준비를 마치고 때를 기다린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다. 우리는 고장 난 게 아니다. 다만 회복의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뿐이다. 때로는 상처가 천천히 아물어가는 그 과정 자체가 우리의 삶을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들어줄지도 모른다. 낡은 것들을 밀어내며 아파도, 결국 새로운 잎과 꽃을 피우기 위해 우리는 다시금 살아간다.


흩날리는 꽃잎을 보고 있으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저 꽃들은 자신이 떨어지는 순간조차 아름답다는 걸 알까? 바람에 몸을 맡기며 허공에 떠오르는 꽃잎들은 마치 삶의 끝자락에 이른 누군가의 마지막 춤처럼 보인다. 이미 60년 넘게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봄은 단순히 새로운 시작이 아닐지도 모른다. 젊은 날의 봄처럼 설레고 희망으로 가득한 계절이 아니라, 조금 더 조용하고, 어쩌면 안타깝도록 아름다운 이별의 장면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봄이 우리에게 건네는 진짜 위로는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지금 모습 그대로도 충분히 예쁘다." 꼭 새로운 무언가를 이루지 않아도, 더 나아지지 않아도,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 꽃이 피어나는 순간뿐만 아니라, 꽃이 지는 순간마저도 아름답다는 걸 봄은 묵묵히 보여준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더 이상 무엇을 이루지 않아도, 어디에 도달하지 않아도, 지금의 나로서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고. 삶의 끝자락이 가까워진다고 해서 의미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오랜 시간 무너지지 않고 견뎌온 나에게 따스한 봄볕 같은 위로를 건네야 한다. 나에게도 그런 봄날 같은 따스함이 필요하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내 마음이 준비될 때, 나만의 계절이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찾아올 테니까. 그리고 그때의 나는, 더없이 아름다운 존재일 것이다. 때로는 꽃잎이 흩날리며 남기는 잔상만으로도, 존재했던 모든 순간들이 충분히 빛나는 것일 테니까.


그렇게 봄이 왔음에도 나는 아직 마음 한편에 놓지 못한 기억과 그리움이 자리 잡고 있다. 이미 오래된 기억일지라도, 여전히 내 마음에 남아 따뜻하게 머물러 있다면 그 감정을 억지로 밀어낼 필요는 없다. 그리움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감정이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고 있음을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움으로 바뀐 사랑했던 시간들이, 함께했던 순간들이 여전히 내 안에 남아 나를 지켜주는 버팀목이 된다. 그러니 나 자신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져도 괜찮다. 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피어나는 순간은 모두 다르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민들레씨앗처럼, 언젠가 흩날려 새로운 곳에 닿아 뿌리를 내릴 날을 기다리는 것처럼.


어쩌면 나의 봄은 조금 늦게 찾아올지도 모르니,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면, 그저 잠시 멈춰 때를 기다리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그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다. 나는 나의 속도로, 나만의 방식으로 피어날 테니까. 더딘 걸음일지라도, 그 안에는 나만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때로는 그리움이 발목을 붙잡고, 과거의 온기가 마음을 아릿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감정들 역시 나를 이루는 소중한 조각들이다.


봄이 와도 아직 준비되지 않은 당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괜찮다고, 천천히 가도 된다고. 당신이 느끼는 그 지연감과 늦어버린 것 같은 기분은, 사실 그 어떤 봄도 결코 탓하지 않는다. 봄은 언제나 자신만의 리듬을 타고 오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꽃들도 각자의 시간을 가진다. 우리는 그 시간 안에서 조금씩 성장하고, 결국 그때에 맞는 모습으로 피어날 것이다. 언젠가 나와 당신도 우리의 때에, 반드시 아름답게 피어날 것이다.


때로는 회복이 더디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괜찮다. 나만 뒤처진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또한 괜찮다. 천천히 가도 괜찮다. 봄은 늦게 피어난 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저 피어나기만 하면 된다. 그 시기가 지나면 여름이 오고, 가을과 겨울을 지나 또 다른 봄이 온다. 이 계절이 끝나도 우리는 계속 살아갈 것이고, 그 과정 속에서 다시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햇살이 조금 더 따뜻해지고, 바람이 부드러워질 때쯤, 나는 알게 될 것이다. 내가 품고 있던 그리움이 사실은 나를 더 단단하게, 더 깊이 있게 만들어왔다는 것을. 지나간 사랑과 잃어버린 시간들도 결국에는 나를 더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늦게 피는 꽃은 더 오래 피어 있기도 한다는 사실을. 조금 늦게 찾아온 나의 봄은, 더 깊고 더 따뜻한 색으로 나를 감싸줄 것임을. 기다림 끝에 피어난 꽃은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그리고 지나가 버린 봄이지만, 그리움도 희미한 빛이 되어 나를 부드럽게 안아준다는 사실을.


당신이 피어나고 싶은 그 순간, 그것이 바로 당신만의 봄이다. 지금 어떤 모습이든, 어떤 감정을 품고 있든, 그건 모두 괜찮다. 봄은 항상 당신을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기다림 속에서, 어느 순간 불현듯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그때가 바로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일 것이다. 그리고 기억하라. 언제나 늦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 봄에 당신도 당신만의 꽃을 피우기를.

@thebc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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