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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원상 Jul 15. 2023

박완서를 읽고 좀 더 솔직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박완서가 첫 장편 '나목'을 쓰고 명예박사학위를 받기까지

진심과 솔직함은 사회관계 안에서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나는 당신이 좋습니다"를 말한다면 나 스스로 진실된 진심이면 충분한 걸까, 아니면 상대에게 가 닿아야 할 정도가 되어야 우리는 기꺼이 진심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을까.


전자와 후자 모두 맹점이 있다.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 아닌데도 스스로 "이게 진심이야"라며 속이는 일이 잦다. 나를 속이게 되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 당시 감정이 요동치고 기분이 치우쳐져서 고양된 착각일 수도 있고, 주변의 시선이나 평가를 의식해서 자기 검열을 거쳐 나온 일시적 판단일 수도 있다. 불과 방금 했던 결정과 판단을 깊게 후회하곤 한다.


그렇지만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게 아니다. 그때도 맞았고, 지금도 맞다. 진심은 때론 논리와 거리가 멀다. 진심을 무어라 규정하긴 어렵다. 이는 진심을 어떻게 표현하는지도 정도가 없다. 아니 그래서 '진심' 어쩌라는 건지 한 번 설명해 보련다.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해 진심과 진솔함을 세상에 내비칠 줄 아는 소설가가 있다. 소설가 박완서다. 박완서 소설가에 흠뻑 빠졌던 건 대학교 언론반에서다. 피디가 되려면 논술 시험지에 앞뒤 한 장 안팎에 완성된 글을 적어내는 작문 시험이 있다. 분량이나 기승전결을 갖추기 위해서 대개 초단편 소설이 안성맞춤이다. 그래서 가장 좋은 참고 자료는 훌륭한 소설가들이 쓴 단편이다.


매주 각기 다른 소설자 단편을 각자 읽어와 비평하는 스터디가 있었다. 세간에 전설이 된 소설가도 그 스터디에선 유독 박한 평가를 받고 무용한 작가로 전락한다. 당연히 다음 모임을 위한 책 선정에서 탈락했다. 그중 박복한 다섯 명 스터디원 전부를 만족시킨 주인공이 딱 한 명 있었는데, 바로 박완서였다. 박완서는 생전 100편이 넘는 단편을 썼는데, 그때 읽었던 단편 모두 만족스러웠다.


전쟁, 전후시대부터 산업화시대까지 이어지는 시간적 배경에서 여류 소설가가 주는 독창성은 말할 것도 없었고, 문체에 묻은 개성과 독특함은 요즘에도 유효했다. 아니, 오히려 노출 콘크리트나 채도 높은 색배합이 되레 힙함으로 여겨지는 요즘 시대에 새로이 부상하는 현대 소설가보다 더 힙한 문체와 표현을 갖췄다고 하는 게 더 자연스럽겠다.


박완서의 소설에 깃든 솔직함은 시종일관 인상적이었다. 등장인물은 다른 이의 마음을 당최 속이지 않으려 했고, 독자들도 함부로 소설에 속지 않는다. 진심과 솔직함에 돌돌 말린 인물들 덕분에 갈등과 사건은 과감하게 창발했다. 통신의 발달에 맞게 인스타그램, 카톡, 문자, 전화에 두루 걸맞게 상대방의 기분을 가늠하고 예측해야 하는 2023년 사람들에겐 보기 어려운 당돌함과 솔직함이 있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소설가 당신의 인격과 성품이 엿보인다. 등장인물들의 생각은 진솔하고 행동은 망설임 없다. 지저분한 시기와 질투도 여과 없이 흘러나오고, 반성과 깨달음 역시 부끄러움이란 암막을 찢으며 장면 장면에 솟구친다. 마음속 휘몰아치는 감정과 기분이 그대로 묘사된다. 격식을 차리는 건 나중 문제, 심지어 주변에 말하기 민망한 생각들도 과감히 발설된다. 그래서 때론 발칙함까지 느껴진다. 그러나 어쩌겠나. 발칙과 과감함이 넘실거리지 않으면 그건 솔직한 게 아닐 수도.


소설의 모티브가 된 나목이 있는 박수근 화백의 '나무와 두 여인'


박완서의 첫 데뷔작이자 첫 장편인 ‘나목’이 대표적이다. 1970년, 그의 나이 40세 문인으로는 다소 늦은 나이에 등단했다. 첫 장편 소설 ‘나목’은 자전적인 소설로, 박완서가 서울대에 입학한 지 한 달 만에 한국전쟁이 터지고 미군 PX(현 신세계백화점 본점)에서 일하면서 알게 된 박수근 화가와의 인연을 그렸다. ('나목'은 잎이 지고 가지만 앙상히 남은 나무를 뜻한다)


흥미로운 점은 박완서가 박수근과의 인연과 이야기를 연정으로 묘사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문제는 박수근을 모델로 한 등장인물 ‘옥희도’는 당시 박수근과 마찬가지로 중년의 유부남이었으며, 슬하에 자식 다섯을 뒀다. 다시 말해서 충분히 불륜이라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남편과 자식들도 볼 소설에서 박완서는 그 이야기를 전후시대, 산업화 시대 보수적인 가족관과 연애관에 가두지 않았다. 20살 주인공 ‘이경’은 일상과 사랑에 처절할 정도로 진심이다. 이경은 연이 닿았던 연애상대에게도 유보나 망설임 없이 자기주도적이었고 때론 거침없었다. 단 한 번도 자기를 속이지 않았다. 동시에 이경은 박완서가 그랬듯 전쟁의 그을음과 시대적 우울감에 시달리고 투쟁한다.


당시 미8군 PX였던 신세계백화점 본점. 이곳에서 두 거장이 만났다

한 사람은 민족을 대표할 거대한 화백으로 거듭나는 동안 반면 다른 한 사람은 주부로 억척 같이 살아가면서 끊어진 인연은 박수근 화백이 세상을 뜨고 나서 다시 이어졌다. 박완서는 1952년 결혼한 뒤 평범한 주부로 살아가다 1967년 박수근 화백의 유작전에 갔다. 소설의 마지막도 옥희도의 유작전에 간 이경의 이야기다. 이경은 고목이라고 알고 있었던 옥희도의 그림이 사실 이파리를 다 떨구고 겨울(전쟁과 고난)을 견디고 무던히 봄(평화와 행복)을 기다리는 의미임을 깨닫는다. 이렇게 박수근 화백의 작품을 보고 큰 감명을 받고 늦은 나이에 소설 집필에 나선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게 두 사람의 인연을 바탕으로 한 첫 장편 소설 ‘나목’이었다.


2년 전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도 박완서와 박수근을 엮은 전시회가 열렸다


박완서의 진심 가득한 태도와 솔직함은 첫 작품부터 스스로를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는 원동력이 됐다. 솔직함은 때때로 응큼함과 발칙함을 동반한다. 박완서 글 곳곳에 묻어있는 이 앙큼함과 발칙함은 글을 읽히게 하는 원동력이다.


얼마 전 한 저녁 모임이 있었다. 모임 중 비밀 연애를 하는 커플이 있었는데, 그 무리서 그 사실을 공식적으로 아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거기서 커플 중 한 사람이 연애 상담인 척 이런 고민을 던졌다. “연인이 집을 바래다주는데, 집 앞도 아니라 아파트 단지 입구까지만 데려다주는 건 어떤가요?”


“굳이 거기까지 와서 집 앞까지 데려다주지 않는 게 이상하다” 혹은 “그럴 수 있다”로 의견이 분분했다. 질문의 요지는 분명했다. 연인이 듣는 가운데서 다른 사람들에게 대놓고 앙큼한 투정을 부린 것이다. 누구 편을 들 수 있는 나는 황희 정승에 빙의돼 둘 다 편드는 의견을 던졌다. 자칫 둘이 있었을 때 이런 얘길 꺼내면 별거 아닌 걸로 싸우기 십상이었을 텐데, 즐거운 모임에서 평소 갖고 있는 불만을 솔직하게 투척하는 그 앙큼함이 나 홀로 유쾌했다.


나는 항상 솔직하긴 어려웠다. 내 최선을 다해 간접적인 제스처를 동원하고 우회적 표현을 활용했다. 그러나 이러면 내 진심이 전해질 것이라는 착각이었고 대부분 내 의도와 마음이 전해지지 못했다. 감사, 기쁨, 미안함, 유감을 전하는 마음에도 솔직하지 못했다. 아쉽게도.


‘나목’을 완독 하며 박완서 소설가의 솔직함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한다. 무례할 수도, 뻔뻔한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심이 주는 이로움을 이기지 못한다.






전쟁이 끝나도 가정에 헌신하느라 소설가가 된 이후로는 집필에 열중하느라 서울대 문리대로 복학하지 못했다. 박완서 소설가는 2006년 75세 나이로 명예박사 학위를 받는다. 문화예술인으로는 첫 사례다. 학위수여식에서 답사를 보면 박완서 작가의 솔직함이 고스란히 묻어 나온다. 명예박사에 큰 감흥이 없음을 가감 없이 말하면서, 학벌주의로 부당한 편익을 본 후일담과 격하된 인문학의 가치에 대한 소회를 솔직하게 소개했다. 그러나 가장 소박한 비유로 감사와 자랑스러움을 전하는 마지막 대목이 인상적이다. 여기에 박완서 소설의 정수가 묻어있다.


아래는 그 답사 전문이다. 길지 않은 글에서 소설가의 성품과 생각이 그 분량보다 훨씬 더 명확히 드러난다. 이 역시 솔직함 때문 아닐까.



<박완서 소설가 답사 : "명예박사학위를 받으면서">


먼저 절대로 안 받을 것처럼 강하게 반발을 해 실무자들을 당혹스럽게 해드렸던 점, 이 자리를 빌려 사과드립니다. 일단 마음을 바꾸고 나니 슬그머니 기뻐지기 시작했고 자랑까지 시키고 싶어 져서 이렇게 평소 제가 좋아했던 분들을 여러분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명예박사라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 왜 주는 것인지, 사전지식이 없고, 왠지 뜨악한 느낌까지 드는 걸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안 받고 싶어 한 건, 뭔지 모르겠는 걸, 준다고 덥석 받는 게 아니라는, 몸 사림 때문이었을 테고, 좋아지기 시작한 건 서울대에서 주는 거니까라는 서울대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 때문이었을 겁니다.


서울대에서 이렇게 까지 저를 챙겨주시지 않아도 저는 서울대 덕을 이미 많이 본 사람입니다. 저는 서울대를 한 달도 채 다니지 못했습니다. 제가 입학한 해는 1950년 6월이었습니다. 그때는 입시철과 학기말이 5월이었고, 6월에 신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해방되기 전까지 4월이었던 학기 초가 해방되던 이듬해부터 9월로 바뀌었다가, 다시 봄을 학기 초로 환원시키기 위한 일시적인 과도 조치로, 그 해에는 그 중간인 초여름을 학기 초로 삼았었으니까, 제도적인 학교교육이 생긴 이래 6월에 입학한 예는 아마 50학번이 유일한 경우일 겁니다. 다 아시다시피 그해 6월은 6ㆍ25가 난 달입니다. 여름에 서울을 사흘 만에 인민군에게 내주게 되었을 때는 대부분의 시민들이 남아서 당했지만, 그 이듬해 겨울 다시 한번 그들이 쳐들어왔을 때는 시민들은 완전히 철수하고, 거의 무인의 도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도 저희 집 식구들은 서울에 남아 고립과 궁핍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봄에 그들이 물러가고 서울이 수복되었지만 휴전이 될 때까지 정부도 시민들도 서울로 돌아온 건 아니어서 서울은 인구가 매우 희박하고 주야로 포성이 들리는 최전방 도시였습니다. 이웃도 하나 없이 어린 조카들, 넋 나간 노모를 부양해야 하는 소녀가장의 처지에 놓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피난 가서 비어있는 이웃집을 털어 몇 줌의 곡식이나 묵은 김치 따위를 구해오는 일이었습니다. 차마 못할 짓으로도 연명은 쉽지 않아, 혹시나 하고 일자리를 찾아 그래도 사람이 웅성대고, 시장이 형성된 도심의 남대문 시장 근처를 배회하다가 난데없이 행운을 잡게 되었는데, 그건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미 8군 피 엑스에 취직이 된 거였습니다. 제대로 된 취직자리가 전무할 때이기도 했지만 먹고 살만큼 봉급을 받을 수 있고, 요령만 부리면 큰돈도 벌 수 있다고 알려져 누구나 선망하는 꿈같은 일자리였습니다. 그런 일자리에 몇 십 대 일의 경쟁을 뚫고 발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서울대 학생이라는 자기소개 때문이었습니다. 담당자는 가장 초라한 저를 군계일학처럼 바라보았고, 거짓말처럼 쉽게 취직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서울대 학생이라는 레테르는 저를 따라다니면서 직장 생활을 편하게 해주었습니다. 누구나 저를 아껴주고 존중해 주었습니다. 그런 서울대학의 후광에 힘입어 저는 돈 벌기도 쉽지만 타락하기도 쉽다고 알려져 질시와 멸시를 동시에 받던 PX 생활을 홀로 고고한 척 안전하게 유지하면서 식구들을 배 불리 먹여 살릴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직장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해서 똘똘하고 건강한 아이를 낳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고, 그 직장에서 알게 되어 깊은 인상을 받았던 박수근 화백은 저의 처녀작 나목의 주인공이 되어, 저를 주부에서 작가로 거듭나게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학위를 5월에 받게 된 것이 저에게 불러일으킨 특별한 감동에 대해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때의 학년말은 5월이어서 대학 입시와 합격 발표를 보러 다니던 때도 물론 5월이었습니다. 문리대 동숭동 캠퍼스의 그 해 5월의 신록은 참으로 눈부시게 아름다웠습니다. 제 기억 속에 그해 5월이 유난히 아름다웠던 것은 아마도 그게 제 청춘의 마지막 5월이기 때문일 겁니다. 그때 이미 문리대 생으로 재학하던 선배들은 서울대 문리대를 대학의 대학이라 부르면서 다른 단과대학과 차별을 짓더군요. 그 오만과 기개가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그런 자부심은 문리대에 대학본부가 있어서가 아니라 서울대의 중추가 인문학에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 해 5월은 속절없이 가고 6월은 어김없이 오고, 그 싱그럽고 찬란한 젊음들은 양쪽 전쟁터에 내몰려 죽거나 행방불명이 되지 않았으면 살아남았다고 해도 극한적인 이념대립의 와중에서 고통받거나 왜소하게 마모되어야 했습니다. 전후의 시대적 요구도 빈곤 탈출과 경제성장이 최우선이 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사색과 반성과 요구하는 인문학도 자연히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학생이라 전쟁터엔 안 나갔지만 인공치하 내내 학교에 남아서 거기서 보고 겪고 참아낸 일들은 한때 제가 이상으로 했던 모든 것을 초토화시켰지만 사상적인 대안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 후 결혼으로 겨우 평범한 안정을 찾긴 했지만 대학의 대학을 외치던 그 충천하는 젊음은 어디로 갔으며, 인문학에 대한 그 도도한 자부심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저리고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게 짐승스러운 짓만 같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자기모멸이 그 시대를 증언하고, 동족상잔에 대한 혐오와 이념에 대한 허망감에 대해 말함으로써 사람 노릇을 하고 싶다는 참을 수 없는 욕구가 되어 저로 하여금 많은 작품을 쓰게 했습니다.


단지 서울대학에 입학했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그렇게 알뜰하게 서울대학 덕을 보았는데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주시는 이 학위는 어디 쓸데가 있을 것 같지도 않거니와 자기를 돋보이게 하는 속물스러운 일 따위에는 절대로 써먹지도 않을 것입니다. 실용성이 있을 것 같지 않고, 이용해 먹을 생각도 없기 때문에 받을 용기도 낼 수가 있었으니까요. 물론 서울대 문턱을 겨우 넘어본 데 불과한 저 같은 소설가에게 명예박사학위까지 줘서 기를 북돋아주는 파격적인 일이 혹시나 서울대가 인문학에 대한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조짐이 아닐까 하는 과대망상 같은 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고 이 학위가 자랑스럽지 않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작은 기적처럼, 또는 오랫동안 뒤통수만 보고 흠모하던 이가 뒤돌아보며 따뜻한 눈길을 보내준 짜릿한 기억처럼, 저 혼자만의 밀실에 두고 삶이 진부하고 지루해질 때마다 꺼내보고 위안을 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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