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랜만에 본가에 누나네 가족과 함께 온가족들이 모여 밥을 먹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만 4살 된 조카가 생글생글하게 대뜸 내게 물었다.
"삼촌은 엄마 아빠 있어?"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 질문의 의도가 맥락을 조금 생각해보는 동시에 "이거 완전 패드립 아니냐?"라며 모두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조카는 이제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구분할 줄 알고 그분들이 누구의 부모님인지도 알고, 한달에도 몇 번씩 보면서 잘 알고 있는 삼촌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다. (한편은 '이제서야 이런 질문을 하다니?'라는 생각이)
어른들은 웃음을 삼키며 설명했다. "저기 계신 할머니가 삼촌 엄마고, 할아버지가 삼촌 아빠야. 엄마랑 삼촌은 남매 사이고"라고 정석대로 설명해 주었다. 조카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벼운 해프닝으로 웃고 넘길 수 있는 일이었지만, 집으로 돌아와 곱씹어보니 이 질문은 꽤 생경하고도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생각해보면 조카에게 나는 '엄마의 동생'이나 '친척'이라는 사회적 촌수로 정의된 존재가 아니었다. 그저 항상 근처에 있던 사람, 이야기를 함께 만들던 사람이었다. 조카에게 삼촌이란 단어는 관계를 규정하는 지시어가 아니라 친밀감을 내포한 표상이었을 뿐이었다.
어른들은 혈연이라는 단어로 서로를 정의하지만, 아이에게 나는 그저 감정을 공유하고 순간을 함께 보낸 대상이었다. 조카가 내게 곁을 내주고, 말도 따르고, 뽀뽀도 해주었던 건 내가 삼촌이라는 타이틀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가 함께 웃고, 때로는 장난치고, 가끔은 내가 안 된다고 거절하기도 하면서 쌓아온 '순간의 공유' 때문이었던 것이다. 내가 조카를 '누나의 아이'로 인식한 것과는 사뭇 다른, 훨씬 직관적인 접근법이었다.
조카는 자아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에서 나와 종종 함께하며 희노애락을 느꼈을 것이다. 나에게 선물을 받으며 기뻐하고, 내 장난에 놀라기도 하고, 부탁과 요청을 거절당해 속상해하기도 했을 테다. 이때 편도체를 통해 감정의 강도가 평가되고, 그 강도에 따라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었을 것이다. 이 신경전달물질은 시냅스 가소성에 영향을 주어 단기기억이 장기기억으로 전환되는지를 결정한다. 조카가 잠을 자는 동안, 해마는 나와 겪은 비교적 강렬했던 경험들을 장기기억 저장소로 옮겼을 것이다.
'인사이드 아웃' 식으로 말하자면, 나와의 경험들이 지배적 감정에 따라 '구슬'이 되어 임시 보관되었다가, 장기기억으로 넘어가 삼촌이라는'성격의 섬'을 이루는 기반이 된 셈이다. 조카에게 나는 혈연이라는 텍스트가 아니라, 생물학적 감각과 경험으로 건축된 존재였다.
이 지점에 이르자, 아이의 격 없고 경계 없는 순수함이 어른들의 세계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어른들은 얼마나 많은 '연'에 얽매여 있는가. 학연, 지연, 혈연을 비롯한 수많은 인연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온갖 인연과 배경으로 판단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나는 그동안 어른이 된다는 건 새롭게 배우고, 판단의 근거를 개발하고 진보시키는 것이라 믿어왔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는 깨달음을 새삼스레 얻었다.
진정한 관계는 배경을 지운 자리에서, 서로가 주고받는 눈빛과 감정만으로 맺어지는 것임을. 어른이 되며 얻은 것이 지식이라면, 잃어버린 것은 세상을 편견 없이 바라보는 직관일지도 모른다. 아마 어른들은 지식밖에 없는 무식한 집단들일수도 있겠군.
"삼촌은 엄마 아빠 있어?"
이 엉뚱한 질문 하나가 나에게 관계의 본질을 다시 가르쳐 주었다. 앞으로도 조카에게 단순히 '엄마의 오빠'로 남기보다, 즐거운 감정의 구슬을 함께 굴리는 좋은 친구로 남고 싶다. 그러려면 항상 어른의 시각에서 한걸음 떨어져있어야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