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브스 아웃3로 보는 종교 이야기
부곡(釜谷)마을은 넓은 평야에 움푹 솟은 둔덕을 끼고 자리했다. 가마솥처럼 생긴 동네라 하여 '가마골'이라 불리던 그곳. 어린 시절 외할머니 댁은 가마솥 뚜껑 같은 그 야트막한 언덕 맨 꼭대기에 있었다.
마루에 오르면 그리 넓지 않은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선이 마을 어귀에 닿으면, 거기 오래된 교회가 하나 있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몇십 년에서 백 년은 족히 되었을 나이 지긋한 여느 시골 교회들처럼 말이다. 적당한 공간에서 최선을 다해 고딕 양식을 흉내 낸, 소박한 시골집들 사이에서 유난히 도드라진 높이감으로 상대적인 웅장함을 뽐내던 건축물이었다.
할머니 댁 큰 마루에서 바라본 교회는 멀리서 쓸쓸하면서도 마을 입구를 든든히 지키며 논밭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마루에서 내려와 작은 방 앞 툇마루에 올라 다시 그 교회를 내려다보면 느낌이 영 달랐다. 각도가 조금 틀어지고 시야에 걸친 근거리 풍경이 달라진 탓일까. 방금 전 봤던 그 교회와는 전혀 다른 건물처럼 보였다.
'같은 교회일까? 어쩌면 비슷하게 생긴 다른 교회일 수도 있지 않을까?'
어린 마음에도 내가 무언가에 미혹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뜩 스쳤다. 하지만 어른들에게 묻지는 않았다. 그들은 내가 원하는 명쾌한 답을 주지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한 예감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러 마루가 딸린 할머니 댁의 오래된 한옥은 헐렸고, 더 이상 서로 다른 마루에서 교회를 내려다볼 수 없게 되었다. 그 자리엔 현대식 주택이 들어섰고, 집주인들이 떠나며 그 '신식 집'은 또 다른 이에게 팔렸다. 할머니 집이 남의 손에 넘어가다니. 집이 집을 사고파는 세상의 이치가 어린 나에겐 퍽 묘하게 다가왔었다. 마을 사람들이 도시로 향하고 집들은 비어가도 여전히 그 교회는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
부곡마을은 어귀에 버티고 선 교회 덕분인지 교인이 퍽 많았다. 할머니도 그러셨고, 6남매 중 네 딸은 모두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우리 엄마도 그중 하나였다. 반면 믿음을 거부한 이들도 있었다. 할아버지와 큰 외삼촌은 성경보다 소주를 더 가까이 두셨고, 결국 평균보다 일찍이 부곡을 영영 떠나셨다. 할아버지는 임종을 앞둔 병중에서야 그 교회에서 세례를 받으셨다. 낡은 사진 속에 남은, 온 가족이 감정에 북받쳐 울던 그 세례식 장면. 그 사진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다시 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큰 이모는 여전히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찬송가를 불러대며 우리에게 뜻밖의 웃음을 선사하고, 작은 이모는 일찍이 목사님과 결혼했다. 어머니 덕에 나 역시 태어날 때부터 신앙을 '부여'받았다. 기억도 나지 않는 유아 세례를 시작으로 고등부, 청년부까지 꽤 열심인 교인이었다. 철학과에 입학했다는 소식에 목사이신 이모부는 진지하게 목회자의 길을 권하시기도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년 후, 나는 자연스레 교회를 떠났다. 자식들이 어떻게든 교회를 다니게 하려 애쓰는 이모들과 달리, 엄마는 종교를 강요하지 않으셨다. 매주 스마트폰으로 예배 영상을 챙겨 보시는 엄마가 아들이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는 모습은 한편으로 신기하기까지 했다.
오히려 종교에서 멀어지고 나니, 종교를 더 잘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마치 이별 후 상대방의 진면목을 보게 되거나, 한 발짝 떨어져서야 관계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이치랄까. 종교라는 거대한 관념, 그리고 한 종교를 대변하던 그 시골 교회의 건축물이 내게 남긴 최초의 기억은 이런 이야기들이다.
종교의 역할과 의의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넷플릭스 영화 '나이브스 아웃 3: 웨이크 업 데드 맨 (Knives Out: Wake Up Dead Man)'를 보고 흩어져 있던 생각들을 말끔히 정리할 수 있었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연기하는 사립 탐정 '브누아 블랑'의 세 번째 추리극인 이 영화는 미국 뉴욕의 한 성당을 배경으로 한다.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몰린 주인공 '주드 신부'와 사건 해결을 위해 현장을 찾은 탐정 '블랑'. 두 사람의 첫 만남에서 오가는 대화는 종교의 본질을 꿰뚫는 짧지만 강렬한 논박을 보여준다.
블랑은 성당에 들어서며 "참 근사하군요"라고 운을 뗀다. 주드 신부가 "그분의 존재가 느껴지는 곳이죠"라고 맞장구치자, 비신자인 블랑은 "그분이 누구냐"며 너스레를 떤다. 이어 자신을 "자랑스러운 이교도"이자 "이성의 제단 앞에 무릎 꿇는 사람"이라 소개하며 신부를 향해 살짝 도발을 시전한다.
성당을 둘러본 블랑에게 주드 신부가 솔직한 느낌을 묻자, 블랑은 작심한 듯 신랄한 비평을 쏟아낸다.
블랑: "건축 양식은 흥미롭군요. 웅장하고 신비롭고 감정을 자극하려는 의도가 읽히고 제가 믿지도 않는 얘기를 들이미는 기분이에요. 애들 동화 같은 헛된 약속 위에 악의와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를 자행하고 수많은 폭력과 잔혹함을 정당화하면서 자신들의 과오는 숨기고 있는 곳이죠. 고약한 노새가 뒷발질하듯이 기만적인 믿음의 거품을 터뜨려 파헤친 후에 제가 소화할 수 있는 진실에 도달하고 싶군요. (당황한 신부를 보며) 그래도 지붕 들보의 디테일은 훌륭하네요. 쫓아내고 싶으시면 그래도 됩니다."
이성에 기반한 차가운 직격탄. 그러나 주드 신부는 "정직한 건 좋은 거죠"라며 블랑을 두둔한다. 블랑은 멈추지 않고 "좋은 약이 입에는 쓸 때가 있으니까요. 신부님은 신자들에게 늘 정직할 순 없겠죠?"라며 마치 광야의 유혹처럼 신부를 시험한다.
이에 대한 주드 신부의 대답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명쾌한 통찰을 담고 있다.
주드: "맞는 말씀이에요. 이야기가 기반이죠. 그리고 여긴 중세 성당도 아니고 현대 뉴욕이잖아요. 이건 19세기 고딕 부흥 양식이에요. 노트르담보다는 디즈니랜드에 가깝죠. 의식이나 예법이나 복장까지 전부요. 결국은 이야기죠. 중요한 질문은 이거죠. 이 이야기들은 우릴 속이려 드는가? 아니면 내면의 진실과 공명하는가? 이야기라는 방식 말고는 표현 못 하는 진실과.."
블랑은 "한 방 먹었군요"라며 수긍한다.
블랑의 태도는 오늘날 종교를 가지지 않은 많은 이들의 입장을 대변한다. 증명과 재현만이 진실로 추앙받는 과학과 이성의 시대에, 종교는 낡은 유물이거나 비이성적인 맹신으로 치부되곤 한다. 역사책은 종교가 저지른 위선과 과오를 고발하고, 뉴스에는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혐오와 갈등이 넘쳐난다.
하지만 주드 신부는 현상 너머의 맥락, 즉 종교가 개인에게 주는 의미에 집중한다. 종교는 단순한 팩트의 나열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인간 내면의 진실을 건드리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웅장한 건축물이 주는 압도감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이야기가 나의 삶과 공명할 때 비로소 종교는 가치를 지닌다.
중동의 어느 청년이 명동성당을 보고 개종을 결심해 한국인으로 귀화하고, 타국에서 외로움에 지친 누군가가 한인 교회에서 마음 붙일 곳을 찾고, 심지어 신심 깊지 않은 이가 종교 관련 앱을 만들며 생계를 꾸려가는 것. 이 모든 것이 종교라는 이야기가 개인의 삶에서 파생시키는 다양한 양태들이다. 우리 주변엔 주드처럼 종교의 가르침을 대변하는 훌륭한 종교인도 많고, 이들의 역할로 많은 이들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처럼 무언가를 믿기 시작한다.
나에게도 블랑이 말한 '기만적인 믿음의 거품'이 아닌, 주드 신부가 말한 '내면의 진실과 공명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먼 땅에서 한국에 찾아와 수십 년간 타인을 위해 자신을 불태운 종교인들의 삶. 그들의 삶 자체가 나에게는 가장 강력한 종교적 스토리텔링이다.
첫 번째는 안나의 집 김하종(Vincenzo Bordo) 신부의 이야기다. 이탈리아에서 온 그는 1990년 한국 땅을 밟은 뒤, 성남 모란시장 뒷골목에서 노숙인들을 위한 무료 급식소 '안나의 집'을 열었다. IMF 시절 급증한 노숙인들을 보며 시작한 밥 한 끼의 나눔은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다. "밥은 하늘입니다"라는 말을 몸소 실천하며, 헐벗고 굶주린 이들을 'VIP'라 부르며 섬기는 그의 모습. 푸른 눈의 신부님이 한국인으로 귀화하여 스스로 '김하종(하느님의 종)'이라 칭하며 써 내려간 이 이야기는, 교리서의 어떤 문구보다도 강력하게 '사랑'을 증명한다.
두 번째는 소록도의 할매 천사,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의 이야기다. 20대 젊은 나이에 오스트리아에서 날아와 전남 고흥의 소록도에 들어간 두 간호사. 그들은 한센병 환자들의 고름을 맨손으로 짜내고, 가족조차 외면한 이들과 함께 밥을 먹으며 43년을 보냈다. 그리고 2005년, 일흔이 넘은 나이가 되어 자신들이 짐이 될까 봐 편지 한 장만 남긴 채 조용히 고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영면했다. 평생을 바친 헌신 끝에 빈손으로 떠난 그들의 뒷모습은, 종교가 가진 가장 순결한 형태의 진실을 보여주었다.
세 번째는 '파란 눈의 한국인' 안광훈(Brennan Robert John) 신부의 이야기다. 뉴질랜드에서 온 그는 강원도 정선과 삼척에서 신부로 섬기다가 경기도 목동성당 주임신부로 활동하면서 재개발 공사 때마다 피해받고 쫒겨나는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주민들과 함께 연대하며 서울 삼양동 달동네 판자촌으로 들어갔다. 철거민들이 쫓겨나는 현장에서 몸으로 용역 깡패를 막아내고, 가난한 이웃들의 보금자리를 지키기 위해 주민들과 함께 뒹굴었다. 높은 제단 위가 아닌 가장 낮은 진흙탕 속에서 민중과 함께한 그의 '현장 교회'는, 종교가 건물이 아니라 사람 속에 있음을 웅변한다.
다시 어린 시절 부곡마을의 그 교회를 떠올린다. 할머니 댁 큰 마루에서 보던 교회와 작은 마루에서 보던 교회가 달랐던 것처럼, 종교는 바라보는 위치와 마음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블랑의 말처럼 때로는 맹목적이고 배타적인 모습으로 실망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주드 신부의 말처럼, 그것이 우리 내면의 선한 의지와 공명하는 '이야기'로 다가올 때, 종교는 비로소 노트르담의 웅장함보다 더 깊은 울림을 준다.
나이브스 아웃 3가 던진 질문, "이 이야기는 우릴 속이려 드는가, 아니면 내면의 진실과 공명하는가?"에 대해, 나는 저 세 분의 삶을 통해 후자라고 답하고 싶다. 비록 지금은 교회를 떠나왔지만, 그들이 남긴 이야기는 여전히 내 마음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그러나 묵직하게 공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