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아버지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

반쪽짜리 손녀라서 미안해요.

by 파드샤

외할아버지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흑백 결혼식 사진 속의 젊은 외할아버지의 모습을 매우 맘에 들어해서 핸드폰 속에 간직하며 언제든 꺼내 보곤 한다. 사진 속 젊은 남자는 커다란 눈망울과 오뚝한 콧날을 한 반박의 여지가 없는 미남이다. 중국의 소수민족인 묘족의 피가 있어선지, 여타 동북아인과는 확연하게 다른 이국적인 이목구비를 자랑하다. 이 화려한 미남은 외모만 출중할 뿐만이 아니라 마음이 매우 깊은 사람이어서, 죽는 날까지 주변 사람에게 깊은 사랑을 받았다.

외할아버지에 대한 최초의 추억은 내가 여섯 살 무렵의 일이다. 당시 방학을 맞아 엄마와 대만 외갓집에 방문한 나는 사촌동생들과 의미도 모르는 채로 텔레비전을 보며 소파에 앉아 있었다. 문제는 방송에 나오고 있던 것이 저녁 뉴스였음에도 불구하고, 콘텐츠가 상당이 자극적이어서 아이들이 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화면 속에는 트랜스젠더 유흥업소를 불시에 습격하여 단속하고 있었고, 모자이크 처리되었지만 알몸임을 알 수 있는 사람들이 얼굴을 가리며 도망치는 모습이 나왔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긴 머리의 사람에게 기자가 공격적으로 마이크를 들이댔다.

"왜 옷을 입지 않고 있나요?"

"입고 싶지 않아서요."

거의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런 하찮은 인터뷰 내용이 기억난다니, 어린 나에게 상당히 자극적인 내용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유치원생인 난 눈앞의 정보를 전혀 해석할 수가 없었다. 저 언니가 옷이 입고 싶지 않아서 옷을 입지 않았구나, 그래도 창피하니까 옷은 입어야지, 이 정도 생각만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외할아버지는 이 장면을 어린아이들이 잘못 받아들일까 봐 걱정이 되었던 모양인지, 뉴스 채널을 돌리고 우리를 앞에 앉혔다. 텔레비전 보던 도중에 갑자기 훈계 모드라니 영 귀찮은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초등학교 때 집을 나와 15살에 국민당 군대에 입대하여 대만에 정착한 20세기 초중반 중국 현대역사의 산물이 이렇게 말했다.

"아까 텔레비전 속 사람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들었니? 세상에 어떤 사람들은 남자의 몸을 가졌지만 여자가 되고 싶어 한단다. 이 사람들은 몹시 괴로운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손가락질을 해서는 안 돼. 괴롭지 않을 수 있도록 옆에서 이해하고 도와줘야 한단다."

당시 이 이야기를 들은 꼬마는 이 노인이 어떤 삶을 겪었길래 이런 진보적인 사상을 가졌는지 관심 갖지 않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 대화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리고 영영 질문할 기회를 놓쳐 버렸다. 하지만 이 말은 어린 마음 어딘가에 깊이 새겨져서 성인 된 후에는 LGBTQ 이슈에 관심을 갖는 데에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내가 사랑한 우리 외할아버지는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상냥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외할아버지가 후두암에 걸린 것은 내가 대학교 4학년 때의 일이었다. 2학기를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하기 직전의 겨울 방학 때 대만에 들어가 아픈 외할아버지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외할아버지는 병원 침상에 누워 낯선 형태의 튜브들을 온몸에 꽂고 있었다. 염색을 하지 않아 새하얀 외할아버지의 머리카락이 낯설었다. 금세 늙어버린 외할아버지의 모습 때문인지, 병실 특유의 약품 냄새 때문인지, 솔직히 겁이 났다.

"손 잡아 드려."

어색하게 잡았던 손의 촉감이 어땠는지 기억이 잘 나지도 않는다. 외할아버지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눈짓으로 우리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그러다가 몇 분이 지나서야 내가 한국에서 온 손녀인 것을 알아차리자, 흐릿했던 눈가에 금세 눈부신 기쁨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외할아버지는 그때도 눈이 크고 맑아서 참 예뻤다. 그것이 내가 본 외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대학원 석사과정 1학년 1학기가 시작한 3월의 첫째 주에 외할아버지는 영면하셨다. 이 소식을 전하면서 엄마가 나는 대학원 이제 막 시작했으니 장례식에 오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다. 외갓집 식구들에게도 이미 말했고, 다들 이해한다고 했다고 했다. 입에서 차마 그래도 가겠다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들 내가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에 굳이 참석할 필요도 없고, 가고 싶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도 그러할 것이, 한국에 쭉 살았던 난 외할아버지를 만나서 많은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었다. 특히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부터는 따로 전화로 안부를 드리거나 편지를 쓰는 일도 없었다. 외할아버지가 투병하는 모습을 온전히 지켜본 사촌동생들과 감히 동등한 손주라고 할 수는 없었다.

가족 중에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때 장례식에 가지 못한 일이 얼마나 나를 괴롭혔는지. 그 뒤에 대만에 방문할 때마다 묘소라도 찾고 싶었지만, 가족들에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한 것도. 돌아가시고 몇 년간 매일 외할아버지를 생각했다는 사실도. 자취방에서 외롭게 전공서적을 보다가 내 옆에 외할아버지가 나를 지켜보고 있을지 궁금했다는 사실도. 혼자 있을 때 그리운 생각에 많이 울었다는 사실도.

솔직히 아직도 식구들 앞에서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겠다. 나보다 더 슬퍼했을 외갓집 식구들에게 아픈 곳을 들추기 싫은 마음이어서 묘소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지를 못했다. 외할아버지가 계시는 동안 드라마에 나오는 행복한 가족과 다를 것 없었던 외갓집이 한순간에 달라졌다. 이제 와서 감히 나에게 그 아픔을 들출 자격이 없는 것 같다. 나는 내가 외할아버지의 반쪽짜리 손녀였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는 반쪽짜리 손녀였던 나는 친할아버지 친할머니에게는 온전한 한쪽짜리 손녀였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쓰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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