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할아버지 회고록 Mar 05. 2024

망조

할아버지 회고록 35

이 글은 저의 할아버지가 1931년 일본에서 태어나시어 한국으로 귀국 후 약 70년간 겪어오신 삶이 담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로 실제 이야기입니다.



망조



 그때쯤은 해는 지고 가까이 있는 사람은 알아볼 수가 있을 정도였다. 누군가 하고 돌아봤더니 내 밑에 있다가 나보다 먼저 제대한 사람이었다. 결혼하고 신혼이란다. 내외가 장에 갔다 오는 길이란다. 자기네 집에 들렀다 가란다. 아니 집에 가야 한다고 했지만 한사코 들렀다 가란다. 그의 처도 그렇게 하라고 한다. 못 이긴 척 그들을 따라갔다. 길가 집이었다. 가자마자 그의 처가 부엌에 나가 무엇인가 장만하고 있다. 우리는 지난날 군대생활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밥상을 차려 들어왔다. 술과 안주도 곁들여 왔다. 장에서 사 왔는지 돼지고기찌개 등 먹음직스럽게 차려져 있다. 시장해서였던지 맛있게 먹었고 술도 좋아했던 터라 많이 마셨다. 술을 마시면서도 내가 그와 같이 근무하면서 잘해준 것보다도 혹시라도 가혹행위나 섭섭하게 대했던 일이 없었나 다시 생각해 본다. 그때(가설소대 선임하사관 때)는 잘못했을 때에는 향도인 이하사도 기합을 주었고 때로는 파견대 전원 밤중에 완전무장으로 불러들여 기합을 주기도 했다. 내가 최 군에게 잘해준 것도 못해준 것도 없었던 것 같다. 이야기하며 술을 마시다 보니 너무 늦었다. 아뿔싸 안 되겠다. 가야 하겠다고 일어섰더니 이 밤중에 어떻게 고개를 넘어가시느냐고 하면서 한사코 그들 내외가 말리는 것이다. 그러나 가야 한다. 그들은 신혼부부이고 또 단칸방이다.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혼자서 험한 고개 더욱이 돈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어쩔 수 없이 못 이기는 척 주저앉았다. 이부자리를 펴줘서 옷도 벗지 못하고 입은 채로 누웠다. 곤혹스러운 잠자리였다. 그래도 술김에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일찍 떠나기로 했다. 고마웠다고 인사를 하고 나왔다. 정말 고마웠다. 그들도 밖에까지 나와서 인사를 했다.


 혼자서 고갯길을 걸었다. 장날이면 행인들이 많지만 장날이 아닌 때는 행인도 드물었다. 혼자서 고개를 넘으면서 많은 것을 생각했다. 남을 미워하지 말고 원수를 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땀을 흘리며 재를 넘었다. 작천이 훤히 내려다 보인다. 산의 이름은 지도에는 비파산이라 되어있다. 골짝샛길로 내려갔다. 그곳에는 저수지가 있다. 저수지를 돌아서 가니 곧 사거리 작천장터가 나온다. 제대 후 처음으로 지나 본 길이다. 거기서 집에까지는 약 5리 정도 될 것이다. 평리를 지나오는데 한 노파가 나를 알아보고 눈물을 글썽인다. 알고 보니 내가 전쟁 시 949 고지에서 5사단과 교대할 때 만났던 김 군의 어머님이시라 내 아들은 전사했는데 살아 돌아와서 얼마나 좋으냐고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시는데 나 자신이 살아 돌아온 것이 송구스럽기도 하고 무어라고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가까스로 떼어놓고 발길을 돌렸다. 하염없이 나를 쳐다보고 서있는데 정말 가슴 아팠다. 집에 가면서 생각했다. 나 이대로는 안 되겠다. 그리고 나도 돈이 있어야 하겠다. 내 재주로는 돈 한 푼 구할 수가 없다. 꼭 필요할 때가 있을 것이다. 가지고 온 돈 중에서 한 달분을 내가 써야 하겠다. 양심에 가책이 되겠지만 어쩔 수가 없다. 기회는 이번뿐이니까. 부모님께는 죄송스럽지만! 집에 왔더니 왜 늦게 왔느냐고 행여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걱정하고 계셨다. 늦어서 자고 온 사실을 이야기했다. 어제 가지고 왔던 쌀과 보리쌀이 대청에 쌓여있으니 든든했다. 그리고 나머지 돈을 아버님께 드렸다. 아버지는 계산이 빠르시다. 짐작은 하셨겠지만 아무 말씀 안 하신다.


 아버님은 병으로 고생하고 계셨다. 여러 가지가 복합된 합병적 고질병세다. 지금 같으면 종합진찰을 받았겠지만 그 당시에는 엄두도 못했고 또 그러한 상식도 없었다. 보는 사람마다 다 의사다. 약은 수없이 많다. 다 써보았지만 백약이 무효하다. 동네에 자칭 한의사라는 노인이 한분 계셨다. 돌팔이 의사다. 그래도 그분을 청했다. 식사를 잘 못하셨다. 음식이 넘어가기만 하면 토하시니 위장병이었을 것이다. 부친의 연세가 환갑나이셨다. 약을 조제해 주셨지만 별 효과도 없었고 병만 더 악화될 뿐이다. 식사를 못하시니 걱정이다. 닭을 고아서 즙을 내서 드시게 했지만 별 효과도 보지 못했다. 광주에 가면 좋은 약을 구할까 해서 가기로 했다. 돈은 내 비자금으로(내가 갖다 드린 돈은 그동안 빚진 것 갚고 농사자금 그리고 양식구득하는데 거의 다 쓰고 없다). 장차 매부가 될 김봉석이 광주에서 택시회사 정비공으로 있을 때다. 광주지리도 모르지만 무작정 찾아갔다. 금남로에 있다는 것만 알고 갔다. 다행히 만날 수가 있었다. 아버님 병세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한약방에 가보잔다. 가까운 한약방에 가서 병세에 대해 이야기했다. 약을 처방해서 조제해 주었다. 효과가 있을 것이란다. 약값을 내가 지불하려고 했더니 봉석이 굳이 지가 내겠다고 한다. 못 이긴 척했다. 내 딴엔 고마웠다. 점심밥까지 사주어 얻어먹고 헤어지고 나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즉시 약을 달여서 해드렸다. 그런데 이 약 역시 약효도 없다. 그해는 참 이상하게도 매사가 잘되지 않는다. 돼지를 길러 새끼를 낳는데 몇 마리가 죽고 남은 새끼 중 숫 것은 거세를 하면 빨리 큰다고 해서 새금팔(그릇 깨진 조각)로 불알을 잘라내고 실로 꿰맸다. 그런데 부작용이 생겨 죽고 말았다. 이래저래 새끼가 다 죽어버렸다. 안되려 하니 돼지새끼까지 망조가 드는구나 싶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