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2. 20 ~ 21

6박6일이 10박10일로

by 나효진

전날 바에서 나오는 길에 주인과 페이스북 친구를 맺고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는 기분은 말로 설명하기 힘들 만큼 좋았다. 6박6일의 마지막 여정인 신주쿠로 가서도 요요기 생각만 났다. 그래서 과감히 항공권 리턴 연장을 도모했다. 페이스북에 항공권 연장이 제발 성공하길 바란다는 글을 적었다.


먼저 안 했던 일을 해야 했기에 호텔 체크인을 한 후 런치로 참치 스시를 먹은 후 가부키쵸 앞 횡단보도가 내려다 보이는 신주쿠 도토루에 자리를 잡았다. 집중해서 일을 하고 있노라니 머리가 팽팽 돌았다.



원래 이날은 저녁 당직을 마치고 고르덴가이에서 마시는 것이 계획이었지만 이미 이곳에 더 남기로 결심이 선 후라 당초의 결심들을 간단히 버렸다. 이 즈음부터는 식욕도 별로 돌지 않았다. 더 늦기 전에 항공사에 전화를 걸기 위해 호텔에 비치된 공중전화를 찾았지만 거는 법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친절한 직원들의 도움으로 항공사에 전화를 걸었고 대강 가닥은 잡혔다. 시점 자체가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남는 자리가 없을 법도 했기에 빠른 실행이 필요했다.


어찌저찌 당직을 잘 마치고 신주쿠에서의 새벽을 통째로 항공권 연장과 숙소 잡기에 할애했다. 한참을 통화한 끝에 토요일 저녁 귀국 표로 무료 변경에 성공하고 숙소도 눈여겨 보던 곳으로 확정했다. 금요일은 또 신주쿠로 돌아와 호텔에서 묵기로 정했는데 이 여행의 끝에서야 그딴 짓은 다시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어차피 예약 없이 리무진을 탈 수 있는 신주쿠 터미널은 호텔들이 밀집해 있는 동쪽 출구와는 거리가 있다. 요요기 근방에서 묵으면 오다큐선을 타고 얼마 가지 않아 신주쿠 터미널 바로 앞 출구로 나올 수 있다. 비행기 시간만 잘 조정한다면 부러 싫은 신주쿠에 묵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아무튼 이 호텔에 묵기만 하면 새벽에 잠을 못 잔다. 씻지도 않고 잠깐 눈을 붙였다가 조식을 먹으러 갔다. 전날 술도 안 마셨는데 얼굴이 아주 볼 만했다. 일본식 부페보다는 샌드위치 부페가 훨씬 나았다. 그런데 너무 직원들이 먹는 사람들을 주목하고 있어서 배부르게 먹지는 못했다. 그런 점에서는 한국 호텔이 훨씬 낫다.


체크아웃 후 짐을 맡겨 두고 가 보고 싶었던 호시노카페로 향했다. 그런데 담배가 단 한 대밖에 남아있지 않아서 오래 있지는 못했다. 엄청나게 맛있다거나 별난 맛은 아니었다.



그러고는 또 일을 해야 하기에 담배를 사 가지고 르누아르 카페에 들어갔다. 인터넷이 미친 듯이 느려서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며 일을 열심히 한 후 대망의 요요기 숙소로 나섰다. 정확히는 산구바시 역과 가장 가깝다. 요요기 공원 역보다 훨씬 동네 같은 분위기에 다소 당황했으나 그렇게 헤매지는 않았다. 여차저차 집에 도착했는데 이럴수가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당시 나의 짐 무게를 총합하면 약 25kg 정도는 나갔던 때다. 2층이어서 다행이지 크게 욕을 볼 뻔했다. 방도 좁고 집과 집 사이의 간격도 좁아 마치 도미토리 개인실을 쓰는 느낌이었지만 집 옆으로 철도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일본 드라마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침대도 무척 편했고 세탁기나 조리 시설 말고는 딱히 없는 것도 없었다.



혹시나 연장한 만큼 옷이 더 필요할까 싶어 속옷, 양말, 옷을 손빨래해서 널어 두고 잠들었다. 푹 쉬고 나서 고독한 음주가로 변신해 하치만부터 우에하라로 걸었다. 지난 번에 눈에 띄었던 가게가 있어서 들어갔더니 영업 시간이 12시까지라고 했다. 당시는 11시 50분... 어쩔 수 없이 나와 그냥 바로 옆 술집으로 갔다. 의외의 꿀잼 스팟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고급진 느낌이라 잘못들어왔나 싶었다. 내 옆에 혼자 온 여자분이 자꾸 주인과 교태 섞인 말투로 대화해서 좀 위험한 분위기도 났다. 그런데 역시 말을 트고 나니 정말 재미있었다. 처음에 자기소개를 읊으니 아라시를 좋아해서 일본어를 배운 아횬쨩 이야기를 했다. (이거 보시면 연락 주세요^^) 바의 손님 연령대는 거의 비슷한데 화제나 공기는 전혀 다른 것이 정말 신기했다. 내가 40대와 사랑 이야기를 나눌 줄은 또 몰랐다. 이 언니는 어제 싱가폴에서 왔는데 거기서는 같은 직장 남자가 좋아졌고 귀국하기 전 마지막으로 식사를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잠은 둘째 치고 키스는 커녕 허그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들 사이에 조성됐다는 편안함이 뭔지는 짐작이 가능하지만 주인 아저씨랑 나랑 좀 벙찐 부분이었다.



어딜 가나 아시아 문화권에선 '기쎈 여자' 라벨링 심한 것에 언니와 폭풍 공감하고... 일본 부동산 시세 좀 파악해 주고... 그래도 기리기리 쇼와 출생이라고 엄청 귀여워 해 줘서 고마웠다. 주인 아저씨는 엄청난 미중년이었는데 말투가 정말 철딱서니 없어서 즐거웠다. 막판에는 현재 일본에서 이 드라마 모르면 대화가 안 된다는 작품 속 남자 주인공의 춤까지 선보였다. (호시노 겐 코이댄스)


그러나 나의 가슴은 자꾸 특정 바로 향하라고 시키고 있었다. 두 시 쯤에 다시 만날 때는 꼭 이 바에서 보자는 낭만적인 이야기를 하고 자리를 털었다. 그리고 3일을 같은 바에 앉았다. 페친이 된 주인상은 내가 페이스북에 항공권 연장 때문에 징징댄 것을 언급하며 나를 반겼다. 또 자기소개를 하고 났는데 이때 나의 첫 일본인 친구 치쨩을 만났다. 92년생인데 벌써 4년차 유부라고 했다. 처음에는 약간 경계됐던 것도 사실이지만 몇 마디 나눠 보니 정말 착하고 순했다. 내가 라인을 안 한다니까 즉석에서 카톡까지 깔았다. 감독, 키라, 카츠와도 만나게 됐는데 한국 마인드였으면 뭔 닉네임이여 오글거린다고 했을텐데 니혼진이 다 됐는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비슷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네시 반 정도가 됐는데 이들이 또 마시러 가자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방금 시킨 하이볼 홀짝홀짝 마시고 얘네를 따라갔다. 바로 옆에 위치한 가게는 무슨 던젼 같았다. 엄청 좁고 경사가 심한 계단을 오르니 정말 조그만 바가 있었다. 어두워서 사진도 안 찍혔다. 늬들 덕에 별 구경을 다 한다 생각하면서 마음 속으로 감사했다.


나보다 일본어를 잘 하는 프랑스인까지 합세해 대화했다. 북조선 이야기, 정유라가 승마를 하는데 실력 개차반이라는 얘기, 한국 음식 맛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다음날 일어나면 같이 놀러 가자는 말까지 나왔다. 갑작스런 체류 연장으로 계획 따윈 없는 내게 고마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이들이 이미 취해 있기도 했고 빈말일 뿐이라 생각했다. 나도 취해 비틀거리며 아침을 여는 사람들과 함께 귀가해서 잠이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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