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음주가의 시작
도쿄의 월요일. 50%는 노동자, 50%는 여행자로 이 곳에 있는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일상에 복귀했다. 그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서 이날의 일정은 오피스가 위주로 짰었다. 먼저 출세와 인연의 신사인 아타고 신사가 마루노우치 근방에 있었고, 그쪽에는 아네고 촬영지가 몇 군데 있었다. 아네고 뿐만 아니더라도 수많은 오피스 드라마가 도쿄의 동쪽에서 촬영됐을 터다.
먼저 아타고 신사. 일본에는 우리나라의 교회 만큼 신사가 많은데 장소에 따라 어떤 기도를 들어주는지가 달라지는 모양이다. 출세를 꿈꾸며 애인도 생기길 바라는 나에게 아타고 신사는 최적이었다. 찾아 본 바로는 신사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를 때는 쉬어서도, 뒤를 돌아봐서도 안 된다. 또 미신에 민감한 나는 시키는대로 100개 가까운 계단을 헐떡이며 올라갔다.
참배 전에는 기본적으로 손과 입을 헹궈야 한다. 여태는 그냥 신당 앞에 가서 남들 하는 것을 보며 기도를 했지만 출세와 연애를 위해서는 뭔가 요구사항을 전부 지켜야 할 것 같았다. 물 한 국자를 퍼서 손도 닦고 입도 헹궈야 하는데, 입을 헹군 물을 뱉으려다가 뭔가 실례되는 것 같아서 고민하다가 삼켜버리고 말았다. 바라는 것이 많아서 신이 짜증내지 않길 바라면서 기도를 한 후 오마모리를 골랐다. 한국에서도 결정장애로 악명이 높았던 내게는 너무 어려운 미션이었다. 물어물어 두 개를 산 후에는 피로가 몰려왔다. 또 내려갈 때는 신사 뒷계단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해서 시키는대로 했다.
이날은 긴자 쪽으로 가서 히츠마부시와 우니동을 먹는 것이 목표였다. 호화스러운 식사. 츠키지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는데 우니동이 유명한 곳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잠시 노천카페에 앉아 생크림 도넛과 커피를 먹으면서 다음 이동 장소를 결정했다. 츠키지는 아무리 봐도 무리인 것 같아서 긴자로 향했다.
긴자에서 히츠마부시를 먹을까 바이린 돈까스를 먹을까 고민하다가 일단 따로 먹는 방법이 정해져있지 않은 돈까스를 아점저 메뉴로 정했다. 돈까스를 먹고 한 두어 시간 돌아다니다가 배가 꺼지면 히츠마부시를 먹어도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한국인이 어지간히도 많이 오는 모양인지 한국어 메뉴도 준비돼 있었다. 금방 나온 한상차림은 가격에 비해 다소 초라했다. 맛은? 왜 이곳의 돈까스가 명물인지를 의심케 했다. 1천엔 미만의 돈까스 이상의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아까워서 꾸역꾸역 먹고 나왔다. 당연히 배가 불러 히츠마부시를 먹지 못했다.
담배를 피우지 못한 지 너무 오래된 관계로 르누아르 커피숍에 들어가 잠깐 쉬었다. 르누아르, 호시노, 우에시마 정도가 우리나라의 커피숍 체인 격인 듯했다. 그다지 재미 없는 하루를 보내고 나니 요요기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요요기 일대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또 다음날은 신주쿠로 숙소를 옮겨 이번 여행의 끝을 고르덴가이에서 장식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이제는 혼술이 가능한 시간을 기다리며 낮시간을 보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부야의 혼술 도전 레벨과 요요기 근방의 혼술 도전 레벨은 비슷하게 높지만 그 모양새는 약간 다르다. 시부야는 그룹 위주, 붐비는 분위기라면 요요기 쪽은 술집도 작고 단골 장사가 대부분이다. 넉살만 있으면 잘 섞여들기 좋겠지만 나는 샤이걸이라 조금 무리가 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어제 갔던 바에서 행복했던 기분을 되살리며 다른 술집을 물색했다. 쭉 걸으며 공기를 읽는데 사람이 아무도 없는 바가 있었다. 바로 옆에 붙은 집에는 사람이 꽉 들어차 있건만 여기는 주인 밖에 없었다. 여기다 싶어 진입했거늘 사람이 없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나는 평생 이렇게 말이 없는 바 주인은 처음 본다. 너무나 어색해서 내가 먼저 말을 시키는 수준이었다. 제이슨 므라즈 라이브를 틀어 뒀길래 “제이슨 므라즈 좋아하세요?”라고 물었지만 그조차도 긴 대화는 되지 않았다. 그래서 입에서 나오는대로 막 지껄였다. 이 근처에 밤 늦게까지 하는 카페는 없냐, 나 일 해야 되는데 일본에서는 그럴 만한 곳을 찾기가 힘들다, 우니 맛있는 곳 혹시 알고 계시냐, 지금 나오는 곡 한국에서는 오디션 프로그램 출연자가 불러서 유명하다는 둥 말을 시키다가 한계가 와서 계산하고 술집을 나왔다.
살짝 취한 상태에서 결정한 2차 장소는 전날 갔던 바였다. 어제보다는 사람이 많았다. 또 못 보던 애가 들어오니 시선이 집중됐다. 주인도 얘가 왜 또 왔지? 이런 눈치였다. 구석에 자리잡고 모히또를 주문했는데 1차에서 마신 술 때문에 얼굴이 빨개져 있었는지 주인이 마실 수 있겠냐고 물어봐 주었다. 괜찮다고 하고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내 람보르기니 담배에 대한 손님들의 궁금증이 폭발해 있었다. 그래서 한 대씩 쭉 돌렸다.
그리고는 화제의 중심이 내가 됐다. 한국에서 기자를 하고 있고, 여기 사는 사람 아니고, 잠깐 여행 비슷한 걸로 와서 일 하면서 놀고 있고, 일본어 따로 배운 적 없고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조금 말 할 수 있게 됐고... 진짜 녹음해야 되는 부분이었다. 똑같은 말 맨날 하기도 지치므로. 한국 사람이 이런 동네 바에 와서 마시니 뭐든 신기한 모양인지 손님들이 이것저것 물어왔다. 자신들이 아는 배우와 영화 이야기를 엄청 했다. 그저 대화가 된다는 것이 별난 경험으로 느껴지는 듯했다.
주인이 어제 히츠마부시를 먹으러 간다고 했던 것을 거 기억하고 물어 보길래 돈까스를 먼저 먹었는데 너무 배가 불러서 먹지 못했다고 말하니 “왜 못 참았어!”라고 호통을 쳤다. ㅋㅋㅋㅋㅋ 그러고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내가 진심 일본에 와서 데이빗 린치로 대화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한국에서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데 일본인들의 쩌는 문화적 저변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우리나라 시쳇말로는 가방끈 짧은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한국 고학력자보다 영화 이야기가 더 잘됐다.
내가 좋아한다고 했던 음악들을 BGM으로 쫙 깔아 주는데 고마움이 밀려왔다. 슬슬 취기가 차올라 집에 가려는데 캘리포니아에서 왔다는 외국인이 들어왔다. 이 자는 처음 온 것 같은데도 능청스럽게 잘 섞여서 부러웠다. 그 쪽에서 나에게 영어로 대화를 걸어 오길래 영어로 답했더니 주인이 너 영어도 되네? 천재~ 이래서 기분 좋은 가운데 새벽 두 시를 훌쩍 넘긴 시간에 귀가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