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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효진 Jan 31. 2017

2017. 1. 27 ~ 28

31 평생 첫 술병

전날은 느끼지 못했는데 나중에야 생각해보니 정말 많이 오래도 마셨었다. 안주도 없이... 그래서 일어나니 배가 고팠다. 사 놓았던 우유빵을 먹고 다시 이불 속에 들어 갔는데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많이 마시긴 했구만... 하면서 오늘 시오링과의 약속에 갈 준비를 느릿느릿 했다.


그런데 속이 점점 안 좋아졌다. 단순한 문제가 아닌 듯했다. 결국 한 차례 속을 게워낸 후에는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괜찮아지지 않았다. 빵을 먹으면 빵을 토했고, 물을 마시면 물을 토했고, 콜라를 마시면 콜라를 토했다. 다행히 시오링이 또 한 번 재팬타임을 발동해 한 시간 약속을 미뤄 주었지만 물을 아무리 마셔도 뭔가 기분이 나쁜 느낌이 남아 있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나는 31년을 살면서 숙취를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병이 나서 토한 적은 있어도 술 때문에 그런 적은 없으며, 술 마신 다음날 기억이 안 난다거나 속과 머리가 괴로웠던 순간은 없었다. 그래서 이것이 술병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머리 감고 옷을 입는데 이것은 장난이 아니었다. 어쨌든 마지막날 약속을 취소할 수도 없고 신주쿠 역으로 나섰다. 시간을 미뤘는데도 조금 늦은 활기찬 임신부 시오링은 내가 엄마한테 줄 선물을 같이 골라주겠다고 백화점에 가자고 했다. 그 전에 신주쿠에서 가고 싶었던 49층 전망 식당으로 향했다. 신주쿠 역에서 조금 멀어서 걷다 보니 상태가 좋아진 건지 아닌지 모르게 됐다. 시오링에게 나 어제 너무 마셔서 속이 안 좋다고 언질은 준 상태였다.



식당에 도착해서 밥을 시켜 놓고 보니 난생 처음으로 고기 냄새가 역겨웠다. 그래도 사람이 앞에 있으니 두 점 정도를 억지로 먹고 젓가락을 내려 놓았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시오링이 내 고기까지 다 먹고 나서 식당을 나섰다. 이때까지는 괜찮았는데, 49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너무 초고속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토할 것 같았다. 시오링!! 화장실!! 나 토할 것 같아!!!


(더러움 주의)


"그러게 아까 갔다오라니까~"라고 하던 시오링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황급히 화장실을 찾았다. 하지만 나의 위는 그녀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토가 올라와서 필사적으로 입을 막고 삼키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빌딩 복도를 켁켁대면서 지하로 내려가서 결국 계단 뒤에 쏟아냈다. 무려 두 번 본 친구 앞에서... 그것도 임신부 앞에서... ^^... 한국의 수치였다...


처리하고 나서도 속은 불편했지만 그 전보다는 나았다. 시오링의 추천으로 헤파리제라는 숙취해소제를 두 병 샀다. 비싼 놈으로... 원샷하고 미친듯이 사과를 하며 그 와중에도 고슈인을 받으러 하나조노 신사까지 갔다. 받고 나와서 헤어지려는데 시오링이 이세탄 백화점에 들어가자고 해서 대충 보는 척을 하고 만난 지 한 시간 반 만에 헤어졌다. 시오링 내가 진짜 미안...


어쨌든 여행 마지막 날이고 가라오케 약속도 있어서 마시지 않으면 안 됐기 때문에 집에 도착해서 바로 자려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그 와중에 몸살기도 있었다. 약을 먹어야 겠다는 생각에 검색을 하니 파브론이라는 게 나왔다. 돈키호테에서 판다고 해서 그 몸을 이끌고 시부야 돈키호테까지 걸어갔다. 파브론에 헤파리제 하나를 더 사고 가라오케에 가야 하니 용각산까지 샀다.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



먹고 나니 그나마 잠이 왔다. 뜨뜻하게 방을 데우고 한참 잤다. 이제 목욕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때 치쨩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마지막 날이니 지금 늘 가던 바에서 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고 목욕까지 하고 나섰다. 남은 옷이 없어서 배가 좀 쫄리는 옷을 입었다.


좀 늦은 시간에 바에 들어서니 치쨩은 나를 기다리다 못해 가려던 참이었던 듯했다. 치쨩도 감기에 걸려서 상태가 좋지 않았다. 너무 미안했다. 그래서 나도 감기에 걸린 것 같다고 하니 걱정이 빗발쳤다. 어제 좀 많이 마셔서 그런 듯하다고 말하자 '후츠카요이'라는 단어가 들렸다. 후츠카요이가 뭐지? "술이 뱃 속에 남아 있어?"라고 하길래 '오줌으로 다 나왔는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야 안 것이지만 '후츠카요이'는 술병이다. '二日'+'醉い'거든...


아무튼 내가 파브론을 사러 돈키까지 갔다왔다니까 왜 그랬냐며 그거 아무데서나 살 수 있다고들 말해서 몹시 분했다... 치쨩은 선물을 주고 곧 가버렸고 나는 홀로 남아 이상한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눴다. 우에하라하이볼 한 잔을 시켜 놓고 한 방울씩 천천히 마셨다. 그러던 중 그룹이 들어와 시끄럽게 떠들다보니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는 상태로 두 시간 정도를 힘겹게 버텼다.


가라오케에 같이 가기로 약속한 미치코상이 선배를 데려와서 그나마 이야기를 하니 상태가 좋아진 것도 같았다. 주인상도 함께 가라오케에 가기로 했기 때문에 영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두 시 반 쯤 주인상들보고 따라오라고 하고 미치코상과 선배, 다른 손님과 함께 가라오케에 갔다. 진심 노래방 한국에서도 간 지가 오래 되었던 터라 쌓인 한을 분출하듯 심하게 열창을 했다. 한국에서 노래방 4시간도 가뿐한 나로서는 간주점프가 한큐에 되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노래를 불렀다. 노래 하당 용각산 한 알 씩을 몰래 먹었다. 주인상은 한 시간이 넘어도 오지 않았다. 히데상으로부터 라인이 와서 바에 내가 없다고 하길래 가라오케에 있으니 이리로 오라고 했다. 하지만 히데상은 나중에 보자고 하며 돌아간 듯했다.


주인상이 접때 봤던 키라상을 데리고 3시 반 정도 가라오케에 왔다. 슬슬 졸음이 밀려올 즈음이었다. 주인상을 위해 3연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러니 완전히 맛이 가버렸다. 히터 빵빵한데 몸이 으슬으슬하더니 드디어 제정신과 작별했다. 4시 반 쯤에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치쨩이랑 주인상이 준 선물도 놓고 가라오케를 나왔다.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마치 동네 사람처럼... 미치코상은 외투도 챙기지 않은 채 내가 택시 잡는 것을 도와줬다. 기본요금 거리인데도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해서 주인상이 사 준 포카리스웨트에 남은 파브론을 먹고 땀을 뻘뻘 흘리며 잠들었다.


그렇게 폐 아닌 폐를 끼친 다음날 하치만궁에 가서 고슈인을 받아야 한다는 일념 하나로 세 시간 자고 일어났다. 그래도 몸이 가뿐해졌다. 참배를 하고 고슈인 받고 집으로 돌아와서 마지막 정리를 하는데 마치 서울에서 수원 가는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기분이었다. 내일도 여기에 있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늘 가는 신주쿠 터미널에서 아슬아슬하게 리무진을 잡아 타고 공항에 도착하니 출발까지 한 시간 정도 남은 상태였다. 하네다는 이처럼 늘 여유롭다. 면세점에서 가족에게 줄 과자와 선물을 사고 나니 시간이 아직 남았길래 항상 들르는 공항 내 카페에 가서 친구들에게 작별 라인을 돌렸다. 다들 내가 매월 오는 줄 알고 있는데... 빨리 직장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국에 돌아와 떡국을 먹었다. 그래도 아직 일본 나이는 29살이다. 만 30세가 되기 전 다시 일본을 찾을 수 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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