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말할 수 있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 리뷰

by 나효진

* 이 글에는 영화의 내용이 일부 포함돼 있습니다.


1910년 한일합병을 기점으로 봤을 때, 일제강점기는 약 35년 간이었다. 당시의 35년과 현재의 35년은 완전히 다르다. 게다가 그 시간들은 나라를 잃은 채로 흘러갔다.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길고도 괴로운 나날들이었을 터다. 빼앗긴 것은 나라 뿐만이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던 개개인의 인생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 피해국도 피해자도 전범국 일본의 제대로 된 사과를 받은 적이 없다. 치욕적 역사가 세월에 희석되는 와중에도 일본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여전한 이유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 강점기를 소재로 한 이야기들이 글과 영상으로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지만, 그저 당시의 기억을 폭력적으로 환기시켜 남아 있는 피해자들을 괴롭게 하는 경우도 왕왕 목격된다.


특히 일본군 위안부를 다룰 때가 그랬다. 지난 2004년 한 연예인은 위안부 누드를 제작했다가 거센 반발에 부딪혔고, 사진집을 전량 소각 폐기한 바 있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귀향’이 일본군의 성폭력을 스펙터클로 소비한 연출로 비판에 직면했던 적도 있다. 원체 민감한 소재인데다가, 생존했지만 고통 속에 살고 있는 피해자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그래서 극화하기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대부분의 위안부 이야기가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거나, 친구인 두 소녀가 일본군에 끌려가 무자비한 성폭력의 희생양이 되는 전개 위주로 만들어졌던 까닭이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 역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극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한국인이라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지 대강 짐작될 법도 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피해자를 중심에 세울 지언정 피해 사실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옥분(나문희 분)은 20여년 동안 8000여 건의 민원을 제출할 만큼 엄청난 오지랖을 자랑한다. 동네에서도, 구청에서도 그를 도깨비 할매로 부르며 반가워하지 않는다. 번호표 따윈 뽑아 본 적이 없는 막무가내 옥분 앞에 등장한 원칙주의자 9급 공무원 민재(이제훈 분)는 사사건건 그를 막아 세우며 대립 구도를 형성한다.


옥분은 한 평생을 운영해 온 수선집과 민원 넣기 말고도 영어 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실력은 좀처럼 늘지 않고, 느린 학습 속도 때문에 학원에서도 쫓겨났다. 그때 우연히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민재를 발견한 옥분은 그에게 자신의 영어 선생님이 돼 달라고 매달리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옥분을 떼어 내려고만 했던 민재는 그간 본 적 없던 도깨비 할매의 따뜻한 정에 이끌려 결국 그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기로 결심한다.


‘아이 캔 스피크’가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처럼 소소한 우여곡절들이 한참 흐른 뒤에 드러난다. 옥분이 그토록 영어를 배우고 싶어 했던 진짜 이유, 그리고 숨겨뒀던 그의 비밀은 이 영화의 반전으로서 관객들에게 묵직한 울림을 선사한다. ‘그 날’ 이후 누구에게도 마음을 준 적 없는 옥분이 세상을 향해 ‘아이 캔 스피크’라고 말할 용기, 한과 세월만 잔뜩 묻은 상처 투성이 속살을 드러낼 용기를 민재와 동네 사람들로부터 얻어 나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착하다’. 옥분과 민재를 비롯해 저마다의 아픔을 품고 제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는 인물들을 동네 곳곳에 배치해 소시민들의 우정을 특별하게 만든다. 그 덕에 이 영화는 피해 사실을 노골적으로 전시하지 않아도 보는 이들의 가슴을 건드리고, 불의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자극한다. 미국 하원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HR121)이 통과됐던 지난 2007년의 실화가 차용됐음에도, 그 역사에 휘둘리지 않는 탄탄하고 강한 내러티브는 기특하기까지 하다.


때문에 ‘아이 캔 스피크’는 관련 소재를 다룬 작품의 분수령이 될 만하다. 모두가 알고 있는 민족의 상처를 이보다 새롭고 따뜻하게 풀어낸 영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여태껏 만든 이와 보는 이들 중심으로 펼쳐지기 일쑤였던 위안부 이야기가 배려하지 못했던 실제 피해자들을 완벽히 감싸 안았다. 도깨비 할매의 주름진 얼굴에 십대 소녀의 수줍음을 띄울 줄 아는 나문희의 연기는 가히 압권이다. 또한 옥분으로 하여금 이제는 정말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도록 도운 민재 역의 이제훈 역시 모자람 없는 캐스팅이었음을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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