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토피아’가 말하는 차별 없는 세상

영화 ‘주토피아’ 리뷰

by 나효진
‘주토피아’에선,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될 수 있어!


흡사 “성공은 노력하기 나름”이라 말하며 아메리칸 드림의 도덕적 올바름까지 설파하려던 이민자 출신 미국 대부호의 성공담 속의 첫머리 같은 대사다. 뭇 사람들은 자신이 이 같은 신화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황금광으로, 미국으로, 서울로 향하곤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도전자들은 쓰디쓴 실패를 맛봤다. 성공은 소수의 몫이었다.

이러한 ‘신화’는 구성원으로 하여금 구조의 부품을 자처하게 만든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차별이 따른다. 목표가 될 만한 인간상에 요구되는 것들을 갖추지 못한 이들은 배제된다. 예를 들면 돈, 권력, 인기 같은 가치다. 이를 가진 성공자들은 위에서 도전자와 실패자들을 향해 신화를 주입함과 동시에 절대 그들이 서로 가까워질 수 없도록 하는 또 다른 구조를 만든다. 오늘날 차별과 배제, 감시가 더욱 치밀하게 자행되고 있는 이유다.


영화 ‘주토피아’는 이러한 현실을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이 한데 섞여 사는 거대 사회로 은유한 우화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전체주의를 풍자하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 돼지’가 전쟁과 파시즘을 조롱했던 것처럼. 자세히 짚어 보자면, 이 영화가 던지는 화두는 좀 더 미시적이다. ‘주토피아’는 다수의 고통을 통해 소수가 행복해지는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는 각종 차별들을 이야기한다.

극 중 동물 사회는 10%의 육식동물과 90%의 초식동물로 이뤄져 있다. 사악한 포식자와 온순한 사냥감으로 양분됐던 야만의 시대는 지나고, 문명이 발전했다. 주인공인 토끼 주디는 세상을 바꾸는 경찰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 어린 토끼의 장래희망을 가장 먼저 막아 세운 것은 다름 아닌 부모다. 그들은 “토끼가 경찰이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니 우리와 함께 홍당무 농사를 지으며 세상을 바꾸자”고 말한다. 꿈을 꾸는 것은 자유롭지만 그것을 이루는 것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논리다.

현실적으로 봤을 때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한계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무모한 희망은 실패와 직결된다. 세상이 가혹해서가 아니라, 하고 싶은 일과 잘 할 수 있는 일이 다른 탓이다. 그러나 경찰이라는 직업에 필요한 능력이 토끼가 가진 고유한 특질과 대치되지 않는 한, 주디 부모의 말이 주디에게까지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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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는 경찰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고 15년이 흐른 뒤 주토피아 경찰학교에 입학했다. 덩치 크고 사납게 생긴 동물들 사이에서 작고 연약한 주디는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노력에 노력을 거듭한 끝에 그는 경찰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게 됐다. 최초의 토끼 경찰관이 된 그는 세상을 바꿀 기회를 얻었다며 패기 넘치는 모습이지만, 주토피아 경찰서에 들어선 그에게 쏟아진 것은 차별과 무시였다.

이 순간들이 굉장히 현실적으로 묘사됐다. 이를테면 경찰서의 대문을 지키는 치타 클로하우저는 “정말 귀여운 토끼”라며 주디를 맞이한다. 이에 주디는 “토끼끼리 서로 귀엽다고 하는 건 괜찮지만 다른 동물이 그러는 건 실례”라고 일침을 놓는다. 흑인끼리 ‘Nigga(깜둥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방하지만 타 인종이 흑인을 그렇게 불렀다간 모욕이 되는 상황과 유사하다. 더 이상 국적이 인종적 특징을 대변하지 못하는 요즘, 생득적 요소들을 언급할 때는 예민하고 섬세해지는 것이 더불어 사는 지혜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코뿔소 보고 경찰서장이 주디에게 내린 첫 임무는 주차 딱지 끊기였다. 다른 동료들은 전부 ‘경찰다운’ 임무를 받아들고 경찰서를 나섰지만, 주디에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이 역시도 실제 우리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차별과 몹시 비슷하다. 소위 ‘결혼 적령기’인 여성들로부터 회사의 주요 프로젝트에서 제외됐다는 하소연이 적지 않다. 결혼을 할 수도 있고, 임신을 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면접장에서도 유독 여성에게는 “결혼 계획이 있냐”는 질문이 쇄도한다. 성별과 종(種)의 특성만으로 주요 임무에서 배척된 후 “저는 마스코트가 아니다”라며 한숨을 토해내는 주디의 모습이 이와 같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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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디와 화려한 콤비 플레이를 보여 주는 여우 닉 역시 “타고난 것은 바꿀 수 없다”며 체념조로 일관한다. 그에게도 ‘여우는 교활하다’는 편견과 몸에 맹수의 본능이 깃들어 있다는 까닭으로 차별당해온 역사가 있었다. 염세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던 과거를 가진 닉이 주디와 수달 실종 사건을 수사하면서 점점 긍정적으로 바뀌어 간다. 그러나 믿었던 주디의 입에서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을 생물학적 요소로 나누는 발언이 나왔을 때 그는 다시금 좌절한다. 주디가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고 진심 어린 사과를 한 후에야 두 동물은 다시 손을 맞잡는다.

이들이 추적에 추적을 거듭한 끝에 힘을 합쳐 소탕한 것은 조직 폭력배도, 맹수로 변한 육식동물도 아닌 구조의 맨 꼭대기에 있는 자들이었다. 완벽하진 못해도 평화롭던 사회에 ‘공공의 적’을 만들고 편을 갈라 반목하게 만들며 자신들이 득세하는 환경을 공고히 하려는 것조차 오늘날 위정자들과 다르지 않았다. 조금은 허술하고 환상에 가까웠던 ‘주토피아’의 결말조차 통쾌하게 다가왔던 까닭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주토피아’가 전하고 있는 메시지는 매우 뚜렷하다. 문명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여자라서, 남자라서, 흑인이라서, 백인이라서 그런 것은 이제 없다고 봐도 좋다. 하지만 그러한 특질의 차이를 인정할 필요도 분명히 존재한다. 세상은 그렇게 차별하는 것을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을 배제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잔혹할 정도로 현실을 적나라하게 반영했던 ‘주토피아’가 유독 결말만은 긍정적으로 냈다. ‘주토피아’가 전체이용가임을 차치하고라도 이 같은 끝맺음이 반가운 이유는, 아직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 ‘주토피아’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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