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니쉬걸’의 자기애에 공감할 수 있을까

영화 ‘대니쉬걸’ 리뷰

by 나효진

영화 ‘대니쉬걸’은 제작사 워킹 타이틀의 작품들로 ‘홈런을 쳤던’ 이들의 손에서 탄생했다. ‘킹스 스피치’로 아카데미를 휩쓴 톰 후퍼 감독이 ‘레미제라블’에 이어 이 영화에서 두 번째로 에디 레드메인과 만났다. ‘사랑에 대한 모든 것’에서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역을 완벽히 소화한 에디 레드메인이 워킹 타이틀과 함께한 세 번째 영화이기도 하다. 이들의 조합은 언제나 옳았다. 그래서 ‘대니쉬걸’에 쏠린 평단과 영화 팬들의 기대도 상당했다. 이 영화는 골든글로브를 비롯한 세계 유수 영화제에 차례로 노미네이트되는 저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201602151810429410_1.jpg



‘대니쉬걸’은 1920년대, LGBT(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렌스젠더)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던 시절 자신의 진짜 성정체성을 깨달은 한 화가 에이나르 베게너(에디 레드메인 분)의 실화를 다룬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는 자신의 재능과 남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사회적 혜택을 포기하면서까지 여성으로 거듭나려 했던 에이나르의 용기와 결단이 고스란히 담겼다. 에이나르에서 ‘대니쉬걸’ 릴리로 새롭게 태어나는 고난의 과정들을 거친 에디 레드메인의 연기도 반짝였다.

프랑수아 오종의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닐 조단의 ‘플루토에서 아침을’, 존 카메론 미첼의 ‘헤드윅’ 등 트랜스젠더를 소재로 한 영화는 많았다. 그 가운데서도 이 영화가 새로웠던 점은 성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주인공 내면의 고군분투를 집중 조명한다는 점이다. 아내 게르다(알리시아 비칸데르 분)도, 릴리로 변한 에이나르의 아름다움에 빠진 헨릭(벤 위쇼 분)도 동요하는 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묵묵히 응원한다. 에이나르의 첫 키스 상대인 어릴 적 친구 한스(마티아스 쇼에나에츠 분)도 마찬가지다. 주변의 편견 어린 시선과 억압적 사회 분위기가 소거된 상태에서 온전히 자신의 욕망만을 바라보는 에이나르(릴리)를 만날 수 있다.

201602151810429410_2.jpg



그 덕에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내면의 여성을 완성하고 싶던 에이나르의 서글픈 자기애가 돋보였다. 그러나 이 같은 연출은 ‘대니쉬걸’에 있어 양날의 칼로도 작용한다. 관객들이 에이나르 주위 인물들의 행동에 공감할 수 있는지의 문제다. LGBT의 삶에 반드시 고난이 따라야 한다는 것은 아니더라도, 이들을 곁에서 지켜 보는 사람의 고통이 최소화된 채 연민을 부각한 것이 훌륭한 연출이었냐는 데는 의문이 남는다. 인정보다 이해가 앞섰던 게르다의 마음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뿌리부터 달라졌을 때의 충격의 농도는 이 영화 속에서 몹시 옅게 묘사됐던 것도 사실이다. 에이나르의 삶 이상으로 게르다의 삶도 안쓰럽게 다가왔던 이유다. 평범한 이성애자라면 의사를 붙잡고 “이건 내 몸이 아니에요. 벗어나게 해 주세요”라 절규하던 에이나르의 모습을 결코 완벽히 이해할 수 없을 터다. 이 모든 상황을 묵묵히 감내하는 게르다를 향한 연민 탓에 에이나르의 괴로움까지 희석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남는다.


공감의 측면에서 아쉽기는 했지만, 성정체성과 성지향성의 경계를 분명히 그었던 것은 감독의 섬세함이 빛났던 대목이다. 트렌스젠더는 성정체성이 생물학적 성별과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고, 게이는 성적 지향이 동성인 사람이다. 극 중 게이인 헨릭은 에이나르가 릴리로 변장한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사랑에 빠지지만, 성전환수술을 받고 나서는 더 이상 그에게 끌리지 않는다. 이 사소한 차이를 다뤘다는 점만으로도 ‘대니쉬걸’이라는 영화는 의미를 갖는다. 최근 레즈비언 영화 ‘캐롤’ 속 캐롤(케이트 블란쳇 분)과 테레즈(루니 마라 분)의 로맨스를 두고 ‘여자와 여자의 사랑이 아닌 사람과 사람의 사랑’이라고 평하는 등의 불필요한 해석이 난무했던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진] ‘대니쉬걸’ 스틸컷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