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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효진 Oct 16. 2016

부산에서 건진 한국 영화의 미래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작 4편 단평

#1. 남연우 감독, ‘분장’


한밤 중, 쫓기듯 숨을 헐떡거리며 계단을 오르는 남자가 있다. 그는 허겁지겁 집 문을 열고는 식칼을 든 채 방으로 들어간다. 언뜻 스릴러 영화의 도입부가 연상되지만, 남자가 칼로 가른 것은 돼지 저금통의 배다. 꼬깃꼬깃한 지폐와 동전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주인에게 도살된 돼지의 배로부터 쏟아져 내린다. 주섬주섬 돈을 챙긴 남자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택시 기사 앞에서 사정을 한다. 가난한 연극배우 송준(남연우 분)은 택시삯 1만 원이 없어 이 찌질한 소동과 함께 이야기의 서막을 연다.



기약 없는 ‘한 방’에 매달리며 쪼들리는 하루를 버티는 청춘의 고생담은 지겨울 만큼 많이 다뤄졌다. 누군가는 끝내 감동의 성공을 이뤄냈고, 누군가는 새 삶을 찾아 판을 떠났고, 누군가는 비참한 죽음을 택하기도 했다. 이제는 대충 분위기만 보더라도 이런 사연들이 공유하는 서너 개의 결말들이 도출될 정도다. 그런데 ‘분장’은 더 이상 새로울 수 없을 전개 곳곳을 감독의 재기로 뒤틀고, 새로운 흐름들을 이야기에 갖다 붙여 풍성한 서사를 만든다. 대개 블랙 코미디를 표방하는 작품들이 한없이 ‘블랙’하느라 ‘코미디’를 놓치거나 그 반대의 경우를 보여주곤 했다면, ‘분장’은 장르적 매력을 완벽히 표현한 수작이다.


많은 사람들이 제3자의 눈으로 LGBT를 바라본다. 새빨간 남의 성적 지향이 뭐 그리 중요하겠냐만, 그럼에도 혐오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만은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오만을 부리는 이도 있다. 송준은 후자다. 트랜스젠더 다큐멘터리를 보며 눈물을 흘리고 호모포비아 친구에게 인권의 중요성을 역설하지만, 막상 남이 아닌 자가 동성애자임을 알게됐을 때 그는 분노를 표출한다. 여태 송준에게 성소수자는 그저 동정의 대상이었고, 화라도 내면 교정될 병리적 현상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된다.



송준의 동정은 사회적으로 학습된 우월감에서 기인한다. 아무리 별 볼 일 없는 무명배우라도 그가 이성애자 남성인 이상 잘 나가는 동성애자의 위에 있다는 어떤 불문율. 이는 송준이 이성애자임을 숨기지 않고 살아가도 되는 자연스러움 만큼이나 손쉬운 연민이다. 송준과 트랜스젠더 이나(홍정호 분)는 인정 욕망을 공유하지만, 송준이 이를 채운 후 두 사람 사이의 연대는 간단히 부서진다.


송준의 자기 기만적 태도는 단순히 성소수자를 대할 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극 중 연극배우인 송준의 분장은 인간의 내부에 오롯이 스스로 만든 옳고 그름의 기준을 속여야 할 때 쓰는 합리화의 가면과 다르지 않다. 영화 말미 “나 이제 어떡해야 돼”라고 부르짖는 송준의 절규가 오래도록 잔상으로 남는다. 감독 겸 배우 남연우의 연출과 연기는 감탄을 자아낸다.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MBC ‘W’에서 ‘미친개’ 역으로 안방극장을 웃음바다로 만든 연기파 배우 허정도의 깜짝 출연은 반가움과 폭소를 동시에 선사한다.



#2. 민제홍 감독, ‘소음들’


텅 빈 집, 자살을 시도하려는 한 남자가 있다. 목을 맬 로프가 걸려 있는 방 안에서 남자는 기도하고, 벗고, 얼굴을 단단히 묶인 매듭 안으로 밀어 넣는다.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조차 크게 들리는 흑백의 화면 위를 전화벨이 두드린다. 여행 중인 남자의 엄마다. 결정적 순간을 방해받은 남자는 귀찮은 듯 대화를 마무리한다. “바쁘니까 빨리 좀 얘기해 주세요. 사랑이요? 엄마, 저도 사랑해요.”


다시 한 번 목을 매려는 찰나, 이번엔 초인종이 울린다. 모르는 여자가 집에 들이닥치더니, 어젯밤 남자가 자신을 불렀다며 빨리 ‘할 일’(?)하고 보내달란다. 그런데 남자는 죽음의 고요만이 감돌던 방 안을 갑자기 메워 오는 이 소음이 퍽 달갑다. 결국 그, 준호(김준호 분)는 죽기 전 며칠을 그녀, 스칼렛(김민지 분)과 함께 보내기로 결심한다.



영화가 비추는 공간은 준호의 집과 동네가 전부다. 이 단조로운 배경을 다채롭게 만드는 것은 준호와 스칼렛의 대화다. 지난해 출품작인 이충현 감독의 단편 ‘몸 값’에서 발견했던 흥미로운 대본을 다시 만날 수 있다. 자기소개로 시작해 느닷없는 고백으로 끝을 맺는 두 남녀의 대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잘 짜여진 디제시스를 구축한다. 쉼 없이 이어지는 준호와 스칼렛의 발화와 이로부터 발생하는 황당한 에피소드들의 중첩을 건조하게 관찰하는 롱테이크는 기발하기까지 하다.



#3. 조훈현 감독, ‘꿈의 제인’ (CGV아트하우스상, 올해의 배우상 남녀부문 수상작)


영화는 가출 소녀 소현(이민지 분)의 자기 고백으로 시작한다. 가만히 듣고 있다 보면 이 고백이 누군가로 향하는 편지의 내용임을 눈치 챌 수 있다. 아무도 들어 주지 않는 사연을 품고 사는 소현에게 편지란 가장 탁월한 매체다. 공허한 배설에 지나지 않을 일기에 비해 수신인이 존재하는 편지는 어찌 됐든 하나의 대화다. 부치든 안 부치든 발신인의 자유지만, 그렇게 빽빽히 써 내려간 이야기에는 언젠가 공유될 것이라는 믿음이 깔려 있다.


혼자 살아가기에는 아직 어린 소현은 함께 지내던 정호(이학주 분)에게 버림받은 뒤 집을 나온 다른 또래들이 만든 공동체, ‘팸’의 일원이 된다. 소현은 팸의 결속을 위해 심신을 희생하지만, 시키는대로 하면 할수록 숨겨지지 않는 절박함 탓에 그는 팸에서 가장 하찮고 부담스러운 존재다.



그런 소현 앞에 등장한 첫 번째 구원자는 트랜스젠더 제인(구교환 분)이다. 진짜 가족에도 팸에도 권력의 정점에는 ‘아빠’가 있었지만, 제인의 팸에는 ‘엄마’가 있다. 제인은 항상 턱을 치켜든 채 눈을 내리 깐 오만한 표정을 하고도 소현의 이야기를 불평 없이 들어준다. 이 곳에서 소현은 팸의 결속보다 더 개인적인, 정호라는 목표를 제인과 나눈다. 정호에게 외면당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은 살기 위해 이 목표에 매달리며 잠깐의 행복을 맛본다. 그러나 마주하기 두려웠던 현실은 끝내 제인을 구원하지 못했다.


바뀐 시간 속 소현의 두 번째 구원자는 아빠의 팸에 새로 들어온 지수(이주영 분)였다. 하릴없이 스스로를 팸에 구겨 넣었던 소현과 달리 지수는 목적이 분명했다. 돈을 벌어 고모 집에 얹혀 사는 동생과 가족을 꾸리는 것. 때문에 지수는 당당하다. 그러나 그 당당함은 아빠를 흔들고, 팸의 결속을 방해했다. 지수는 정호에게 버림받은 제인과 소현처럼 부담스러운 이물질이 돼 버렸다. 결국 소현이 고통의 삶 속에서 마주친 두 구원자는 세상을 이겨내지 못했다. 소현은 수취인 불명의 편지를 자신의 계속되는 삶 속에 묻고, 처음 팸에 들어갔던 때처럼 제인과 지수가 없는 세상으로 스스로의 등을 떠민다.


‘꿈의 제인’은 시점과 시간을 넘나들며 보는 이로 하여금 누군가의 꿈 속을 들여다 보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그러나 의외로 이 영화 속 인물들이 꾸는 꿈은 단 두 개다. 매일 밤 정호와 연인이 되는 꿈을 꾼다는 제인의 것과,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거짓이었다는 고백을 하며 소현을 향해 웃는 제인의 모습이 담긴, 처절하면서도 달콤한 소녀의 환상. 각자에게 결핍된 것들의 환상통을 마취하는 꿈을 꾸며, 소현은 죽지 않고 불행하게 살아갈 것이다.


누구도 들여다 볼 수 없는 심연을 지니고 사는 듯하지만 가장 순수하고 솔직한 제인은 구교환의 말간 얼굴을 만나 더없이 반짝였다. 소현을 연기한 이민지는 사랑 받기 위해 사랑한다는, 가장 비참하고 간단한 삶의 방식을 너무 이르게 터득한 소녀의 공허한 눈으로 극의 전체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4. 김소윤 감독, ‘아는 사람’ (선재상 수상작)


‘아는 사람’은 고독에 관한 이야기다. 중년의 남자는 자신이 소유한 무인 빨래방에 설치된 CCTV 화면을 보며 소일한다. 까만 방 홀로 빛나는 커다란 모니터 앞에서 그는 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세탁기 말고는 늘 바뀌는 풍경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 남자가 있었다. 빨래가 다 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가져다 놓은 간이 의자와 탁자에 앉아 밥을 먹고 TV만 보다가 나가 버리는 소년이다. 처음엔 괘씸했지만, 보다 보니 그가 괜스레 눈에 밟히기 시작한다.



빨래방 주인은 CCTV의 줌 기능을 이용해 소년이 보는 프로그램이 뭔지 확인하려 하고, 그가 나타나지 않으면 걱정을 한다. 귀에 보청기를 꽂은 채 춤을 추곤 하는 소년을 멍하니 감상하기도 한다. 소년이 근처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빨래방 주인은 그를 향한 연민이 담긴 상상을 시작하게 된다. 손님의 말을 듣지 못해 안쓰러운 청각 장애인 아르바이트생과 그를 무심하게 대하면서도 결정적 순간에 도움을 주는 멋진 자신을.


여느 때처럼 CCTV 앞에서 소년을 기다리던 빨래방 주인은 동전 교환기를 털려는 남자를 발견하고 방을 뛰쳐 나간다. 그 남자는 빨래방 주인이 주시하던 소년이었다. 드디어 소년과 얼굴을 마주하게 된 빨래방 주인은 상상과 전혀 다른 그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김소윤 감독은 19분의 러닝타임 동안 소통의 부재와 거기서 오는 고독을 흥미로운 이야기로 풀어냈다. 일방향 매체인 CCTV와 자신 말고는 볼 수 없는 상상을 연결해 소재로 사용한 것은 주제의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적확한 선택이었다. 영화 말미의 반전은 짧은 서사에도 불구하고 여느 장편 못지 않은 충격을 주기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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