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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F Sep 02. 2022

가족 몰래 했던 퇴사를 들켜버렸다.

29살 공공기관 대리의 퇴사일지 09


퇴사일지 2편에 기재했듯이 가족은 모르게 한 퇴사였다. 이렇게 빠른 기간 내에 퇴사를 들킬 줄은 몰랐다. 아직 퇴사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4대 보험 통지서를 숨기고자 그렇게 노력했는데 말이다. 우선 국민연금과 고용보험은 이메일 수령으로 변경해두었다. 건강보험은 지역가입자로 전환되었기에, 자동이체를 신청해두었다. 내 이름으로 오는 우편물은 어떤 것도 열어보지 못하도록, 가족 모두에게 진지하게 선포해두었다.


그런데!!! 내가 간과한 한 가지가 있다. 건강보험은 내 이름으로 오지 않는다. 아버지 이름으로 온다.



집에 있었다면 우편을 잽싸게 숨겼을 텐데, 아쉽게도 이날은 다른 지역에 일정이 있었다. 무려 고속버스를 타고 이동한 날이었다. 당일치기인데 왕복 7시간의 여정이었다. 잔뜩 지쳐서 행선지에 도착했는데, 성과가 좋아서 기분 좋게 집에 전화를 했다. 집에는 휴가를 내고 일정 소화하러 간다고 해두었었다.


그런데 전화기 너머에서 '퇴사'라는 단어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차분하게 머리를 굴려보았다. 일단 명확한 답을 하지 않은 채, 무슨 소리인지 되물었다. 건강보험에서 지역가입자로 변경되었다는 내용의 통지서가 왔다는 것이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한치 앞도 모른채 해맑게 소떡소떡을 먹으며 행선지로 향하던 시간


아이러니하게도, 그날 일정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의도치 않게 시간을 벌어주었기 때문이다. 우편을 확인하자마자 당장 통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상대방의 감정이 어느 정도 정리된 상황인 것 같았다.


사자후를 듣지 않아서 안심한 상태로 통화를 이어나갔다. 휴직인지, 퇴사인지 묻는 질문에 무급휴직이라고 황급하게 대답했다.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일단 그렇게 넘어가 주었다. 생각보다 조용한 공개 과정이었다. 끝까지 퇴사라고 말은  했지만, 어느 정도는  거라고 생각한다. 인생사라는   진실만으로 소통해야만 편안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속이면서도 마음이 안 좋은 건 사실이다.


회사에 안 나간 지  달이 됐다는  알고서는 그동안 어떻게 출근시간에 나갔는지, 뭐하고 지냈는지 가슴 아파했다. 매우 바빴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사실이다. 지금 회사 다닐 때보다 더욱 바쁘게 살고 있다. 하지만 가족이라서 계속 마음에 쓰이는 모양이다.


경각심도 없이 상행길에 또 핫도그를 먹었다.


내가 가족에게 퇴사를 얘기하지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의 다음 행방은 시간을 가지고 결정하고 싶다. 하지만 가족이 알게 되면 사람 마음이란 게 쫓기기 마련이다. 또한, 나는 내 마음 하나만 책임지고 싶다. 나의 상황에 대해서 가까운 사람들이 가지는 고민과 걱정까지 부채감으로 지고 싶지 않다.


가족이 휴직이라고 인지하고 나서는 조금 피곤했었다. 걱정이 많아서 자꾸 나의 계획을 물어본다. 물론 가족이니까 나를 아껴서 걱정하는 건 당연하다. 어느 정도 얘기해주고 더 이상 묻지 말라고 했고, 서로 납득하였다.


반면 편안해진 점도 있다. 위장 출근을 그만두게 된 것이다. 늦잠을 늘어지게 자고 비로소 백수처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요즘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스케줄이 계속하여 이어지고 있는 판국이라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일단 일주일 정도 늦잠을 즐기고, 다시 루틴을 만들어야겠다.



놀란 내 마음과 같이 불바다가 되어버린 상행길


일단, 이번 백수 생활에는 나만 생각해야겠다. 한 번도 그런 적 없으니, 향후 30년간은 다시 오지 않을 백수 기간을 나를 위해서 써보겠다.


누구보다 나를 아껴서 나를 걱정하고, 행여나 혼자 출근시간에 나가서 힘들진 않았는지 마음 아파하는, 몰래 퇴사했는데 화 한 번 내지 않은 가족에게 당당할 수 있도록 더 멋있는 삶을 살아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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