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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포드 Aug 17. 2021

내 인생, 급등주처럼

내게도 그날은 오는가

코로나를 거치며 핫 한 곳이 있다. 자본시장이다. 코인은 너무 야수적이다. 코스피를 살펴보자. 박스피라 불리며 지난 10년간 2,000 초반을 횡보했던 코스피다. 코로나 이후 변했다. 이제는 폭락해봤자 2,900이다. 1년 새 무려 50% 이상 튀어 오른 것이다(코로나 발 폭락 시기를 기준으로 한다면 상승폭은 더욱 가팔라진다). 소개팅 썰을 풀기 바빴던 동기들은, 이제 주식 얘기로 정신없다.


수능 따위


처음 증권계좌를 개설했던 때가 떠오른다. 벌써 14년 전이다. 중학교 졸업식을 막 마친 날이었다. 당시 나는 누구보다도 공부하는 ‘척’에 열중했다. 부모님이 집에 계시지 않을 때면 하루 종일 OCN을 돌려 봤다(세기 초 최고의 OTT이었다. 중간중간 전립선 강화 광고를 봐야 했지만). 다만 영화를 보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어떤 딴짓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마침 집에는 주식 관련 책이 많았다. 증권사에 다니는 아버지 덕분이었다. 젊은 나이에 수십억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밀려왔다. 당겼다. 닥치는 대로 읽었다. 대략 4권 정도? 깨달았다. 수능 공부란 부질없구나. 16 평생 수금해 둔 세뱃돈 통장을 꺼내 들었다. 집 근처 증권사 지점에 쳐들어 갔다.

어이 관상가 양반, 어디 내가 떡상할 상인가?

당시는 해외 신흥국 투자 펀드가 한창 인기이었을 때이었다. 누님과 형님들은 기억하실 게다. 신흥국의 상징 BRICS, CHINDA를 내세운 펀드들이 쏟아졌다. 버스에도 펀드 광고가 붙어 있었다. 객장 직원 분 역시 신흥국 펀드를 추천했다. 다만 나는 태생적으로 삐딱한 남고생이었다. 하라는 걸 하고 싶지 않았다. 대신 우리나라 주요 그룹사에 투자하는 펀드에 가입했다. 초심자의 운이 터졌다. 마침 그다음 해는 코스피가 사상 첫 2,000을 돌파했기 때문이다. 수익률은 120%. 단 1년 만의 일이었다. 역시 수능 따위는 필요 없음을 확신했다.


펀드를 해지했다. 과감히 한 종목에 올인했다.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터졌다. 전 세계가 곤두박질쳤다. 나도 마찬가지이었다. 개박살 났다. 마이너스 87%. 단 3개월 만의 일이었다. 일단 대학은 가야 하겠구나 싶었다. 그 길로 머리를 밀었다. 때 늦은 수능 공부를 시작했다. 삼수를 끝내고서야 마칠 수 있었다.


아픈 기억을 얻었지만 주식에 대한 관심은 이어갔다. 대학에서도, 회사에서도 그랬다. 다만 마이너스 87%라는 임팩트는 컸다. 누구보다도 보수적인 투자자로 살았다. 거래를 했다기 보단 묵혀두었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120%의 경험도 몸에 남아 있었다. 지난번처럼 올인은 지양했다. 개별주에 조금씩 돈을 부어봤다. 몇 번의 급등을 경험할 수 있었다. 액수가 적었기에 효과가 거대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익힌 게 하나 있었다. 급등주는 동일한 패턴을 그린다는 점. 상승폭과 대세 상승까지 횡보 기간은 각기 달랐다. 그래도 패턴만큼은 신기하리만큼 비슷했다.


고독 해도 그날을 향해

웅장하다.

급등주 패턴이란 무엇인가. '씨에스윈드'란 업체를 보자. 5년 넘게 Box를 형성했다. 아무리 올라도 4만 원대를 넘지 못했다. 1만 5천 원에서 4만 원 선까지 약 270%가 올랐고, 3만 원 선에서 4만 원 중반까지 150%가 올랐어도 그랬다. 상장 직후 가격인 4만 원 대에 매수한 이가 있었다면, 주가가 200%가 올라도 본전인 셈이었다. 그 와중 코로나가 왔다. 1만 원 대로 추락해버렸다.


비상은 여기서 시작됐다. 1만 원대 주가가 18만 9천 원을 찍은 것이다. 단 1년 만에 1,200% 상승이었다. 물론 주가는 다시 폭락했다. 그래도 이번엔 8만 원대에 안착했다. 4만 원대를 천장으로 유지되던 박스는 이제, 약 100%가 오른 8만 원 선에서 유지되고 있다.

돈을 쌓다 못해 터져 넘쳤다.

어째서 1,200%나 오를 수 있던 걸까. 재무 상태를 보자. 이 회사는 매년 실질적 영업이익을 꾸준히 냈다. 유보율은 무려 4,000% 선까지 쌓아왔다. 매년 실적 높이고 동시에 현금성 자산도 쌓은 거다. 주식시장에선 그래 봤자 4만 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씨에스윈드는 갈 길을 갔다. 그 와중 바이든이 당선되었다. 그린 에너지 산업이 부각되었다. 전기차 만이 아닌, 풍력 발전도 그 대상이었다. 마침 씨에스윈드의 주력 상품은 풍력발전 타워이었다. 씨에스윈드의 주식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재무 지표는 그간 쌓아온 실력을 입증하고 있었다. 돈이 몰렸다. 결과는 단 1년 만에 1,200%. 마침내 그날이 온 것이다. 주목받지 못하던 와중에도 고독하게 내실을 다져온 결과이었다.


씨에스윈드의 발자취에서 급등주의 패턴을 엿볼 수 있다. 주가는 짧게는 2년 길게는 10년 가까이 횡보하거나 하락한다. 딱히 관심이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묵묵히 영업이익을 내고 유보율을 쌓는다. 마치 언젠가는 오고야 말 대세 상승의 그날을 대비하는 듯. 그리고 기어이 그날은 온다. 모멘텀을 딛고 날아오른다. 고독해도 일단 계속 가고 봐야 된다는 걸 입증하는 듯한 모양새다.

웅장한 바람이 느껴진다.

식상하다 못해 화나는 클리세


급등주 차트를 보다 보면 생각나는 TV 프로그램이 있다. JTBC 싱어 게인이다. 앨범을 냈지만 여전히 무명인 가수들이 참여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그들의 처지는 상장은 되었으나 주목받지 못하며 박스권을 횡보하는 주식 같다. 라운드가 진행된다. 심사위원의 찬사를 받는 참가자들이 나타난다. 저 실력에 왜 여태껏 무명인지 모르겠다. 마치 박스권에 갇혀 주목받지 못하지만 매년 실적을 쌓아왔던 회사의 재무제표 같다. 회를 거듭할수록 참가자에 대한 관심은 커진다. 유튜브 클립 조회수는 기본 300만을 넘는다. 그간 쌓아온 실적을 기반으로 날아오르는 주가 같다. 어느덧 오디션은 막을 내린다. 각자의 활동을 이어간다. 프로그램이 한창일 때만큼의 주목은 받지 못한다. 그래도 이제는 더 이상 무명 가수는 아니다. 넓어진 팬덤은 유지된다. 폭등장은 꺾였지만 이전 박스권보다는 훨씬 상승한 가격대에서 다시 주가를 이어가는 회사 같다.


사람의 성장 패턴 역시 급등주 차트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당장 주목을 받는 말든 계속 자기 실력을 쌓다 보면, 언젠간 그날은 오는 듯하다. 그간 겪은 불안을 한 번에 떨쳐 버릴 대세 상승의 그날 말이다. 역시 성공의 비결은 끊임없는 노력과 인내인 것인가. 열심히 노력하며 존버 하다 보면 누구에게나 그날은 오는 것인가.


힘 빠지는 소리다. 주야장천 듣던 뻔한 자기 계발서 클리세 같다. 식상하다 못해 화가 난다. 일단 내게 떡상이 오기나 할까 싶다. 그게 보장이 안되는데 어떻게 존버를 하겠는가. 코로나를 거친 우리 이기에 더욱 그렇다. 친구가 샀다는 구축 아파트, 주식, 코인은 100% 넘게 치솟았다. 내 적금은 고작 2%다. 덕분에 노력과 인내는 기필코 배신함을 여실 없이 깨달았다. 그러니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하는 일이 의미가 있나 싶다. 하여간 보장되는 게 없다. 힘이 빠진다.


힘이 빠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열심히 해봤자 결과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그 막연함. 다만 그렇다면 해결책 또한 간단하지 않을는지. 만약 나를 급등시킬 분야와, 그 분야에서 노력했을 때 빛을 볼 시점을 미리 알 수 있다면? 만약 이게 가능하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막연함에서 오는 불안감이 어느 정도 해소된다. 나름 존버 할 만한 상황이다. 다만 그걸 어떻게 알아야 할지가 문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명리는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

고등학생 때 주식투자를 하고, 대학시절엔 여행기를 써대고, 직장인이 되어선 명리공부를 하는 나여서 일까. 자신을 애매한 경계인이라 표현한 이승윤 가수에게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명리  무슨  빠지는 소리인가.


명리는 개인 인생 범주를 짚어보는 철학이다. 해석 기반은 생년월일시. 사주팔자라 불리는 여덟 글자다. 각 글자에겐 역할이 있다. 사주의 주인을 전담하는 놈이 있다. 내가 던져진 사회영역을 나타내는 글자들이 있다. 내 사적 영역을 뜻하는 무리들도 있다. 이들은 상호작용하며 연결된다. 이 연결고리에서 사회영역 요소 중 내 영역으로 끌어올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뜯어볼 수 있다. 이를 원활하게 끌어오는 분야도 함께 찾아볼 수 있다. 바로 나를 급등시킬 가능성을 지닌 노력의 분야다. 개인이 급등한다는 건, 사회 특정 분야에 대한 노하우, 권한, 돈 등을 내 것으로 구체화하는데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다만 급등은 언제 온다는 말인가. 사주도 나이를 먹는다. 통상 젊은 시절 사회 역할을 찾고 수행한다(요즘엔 역할을 찾는 것 자체가 어려워서 문제지만). 이후 자리를 잡아가며 결과를 만들어 간다. 그렇기에 사주 속 사회 영역은 주인의 젊은 시절을 뜻한다. 반대로 사적 영역은 결과를 만들어가는 중장년 시기를 나타낸다.


결과는 중장년에? 또 그놈의 대기만성인가. 속단하긴 이르다. 여덟 글자는 10년마다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대운이라 불리는 에너지다. 이뿐이 아니다. 매년, 매달, 매일 새로운 에너지가 반응을 일으킨다. 이들은 기존 관계에 익숙해진 여덟 글자에게 충격을 가한다. 안 풀리던 이를 풀리게 할 수 있다. 잘 나가던 이를 고꾸러 뜨릴 수도 있다. 사주 속 관계에는 약간의 꼬임이 있기 마련인데(우리가 안 꼬인 적이 있던가), 운은 꼬인 지점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기존 사주에 사회와 사적 영역의 원활한 흐름을 막는 걸림돌이 있었다고 보자. 만약 새로 들어선 운이 이를 해소한다면? 바야흐로 급등의 순간이다.

귀여운 내 아이패드로 그려봤다.

급등주가 모두 1,000% 이상 튀어 오르지는 않는다. 특정 회사가 날아오르더라도, 동종 산업 내 다른 주식은 소폭 상승하고 말 수 있다. 그간 쌓아온 업력과 재무 건전성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나 똑같이 급등의 시기를 만났다고 해보자. 모두가 날아오르진 않는다. 그간 쌓아온 인생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주 좌표 주인인 동시에,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이다. 자유의지란 곧 선택의 자유다. 매순간 쌓아온 선택은 급등 모멘텀에서의 상승폭에 영향을 끼친다.


다만 여기서 강한 의문 하나가 생겨난다. 명리가 뭐길래 내 인생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다는 건가.


보텍스 중독


코스모스의 저자 칼 세이건은, 천문학 발전의 근간을 호기심이라고 봤다. 고대 인류는 밤하늘 속 빛나는 하얀 것들에 대해 궁금했다. 호기심은 상상으로 이어졌다. 각종 신화가 탄생했다. 여러 제도가 탄생했다. 제도를 뒷받침할 학문도 태어났다. 그중 천문학은 인류를 달로 보내버리기까지 했다. 달 표면에 발자국 하나가 찍혔다. 오래 묵은 인류의 호기심이 묻은 자국이었다.

호기심 1만 스푼

명리를 고안해낸 태곳적 인류도 마찬가지이었을 게다. 농사를 짓기 위해선 계절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다만 이게 곤욕이었다. 분명 일정한 패턴이 있긴 했다. 그러나 시시각각 발생하는 작용은 미세하게 달랐다. 같은 봄이지만 싹이 트는 날짜는 분명 작년과 달랐다. 다음 해 역시 그랬다. 그럼에도 여전히 봄이긴 했다. 동양 철학자들은 이를 에너지의 작용으로 여겼다. 그들은 우주가 수렴(음)과 확산(양)의 기운이 부딪히며 돌아간다고 봤다. 여기서 각종 물질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여겼다. 이를 오행(목, 화, 토, 금, 수)으로 비유했다. 즉 자연을 부딪힘 속에서 생성과 소멸이 반복되는 작용으로 본 것이다. 그들은 이런 반복이 계절이란 패턴을 이룬다고 봤다. 그 와중 일어나는 음, 양, 오행의 부딪힘이 매 순간의 미세한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여겼다. 명리는 이를 인간의 삶에 적용했다. 인간 역시 우주 속 여러 물질이 모여 생성된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물리학적으로 본다면 보텍스(Vortex) 운동이 이에 해당된다. 보텍스란 제자리에서 움직이며 만들어진 소용돌이가, 동시에 하나의 궤적을 그리며 나아가는 작용을 뜻한다. 지구가 바로 그렇다. 지구는 자전한다. 동시에 태양을 공전한다. 자전이란 소용돌이가 공전이란 궤적을 그리며 나아가는 것이다. 지구 만이 아니다. 태양도, 우리 은하도 죄다 보텍스 중독이다. 자기만의 소용돌이를 그리며 어디론가 이동 중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오늘은 작년의 오늘과 다를 수밖에 없다. 태양 공전 궤도로 한정한다면, 오늘 지구의 위치는 1년 전 그날과 같다. 다만 1년 간 태양 역시 은하를 따라 이동한 상황이다. 그렇기에 우주 전체에서 보면 오늘 지구의 위치는 1년 전 그날과는 다르다. 여기서 평년 대비 유독 짧은 장마, 유달리 추운 겨울 현상 등의 미세한 차이가 발생한다.

Vortex에 갇힌 우주


소용돌이 속 우리의 아이덴티티


우리는 영원한 보텍스 운동에 갇힌 채 살아가고 있다. 이 우주에 태어난 이상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이 지점에서 명리는 우리의 아이덴티티를 생년월일시로 잡았다. 무한한 보텍스 작용 속에 던져진 그 순간, 일어나고 있던 에너지 간 부딪힘을 좌표로 찍은 것이다. 이를 여덟 글자로 표현해 에너지 간 관계성을 뜯어본다. 내가 태어난 사회와 나만의 특성을 뽑아 본다. 그렇게 내가 사회에서 발휘할 무기를 찾아본다.


우리가 태어나든 말든 우주는 끝없는 보텍스의 향연을 이어간다. 그 향연은 내가 지닌 좌표와 반응을 일으킨다. 명리는 이를 운이라 일컫는다. 운과 내 좌표가 만나며 일어나는 부딪힘을 읽어 간다. 그 속에서 내 좌표 속 뒤틀린 관계성이 해소되는 타이밍을 짚어본다. 혹은 평온하던 좌표 관계가 특정 운에 부딪히며 꼬이는 시점이 있을지 검토해본다. 그렇게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파악한다. 급등 타이밍을 잡아 내 간다.


단 급등의 시기를 제대로 타기 위해선 그간 나만의 무기가 충분히 개발되어 왔어야 한다. 우주는 보텍스 운동을 통해 물질을 만들고 소멸시킨다. 그러나 씨앗을 심지 않았다면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명리는 내게 유리한 노력 포인트와 그간 개발해온 능력이 세상에 드러날 타이밍을 암시할 뿐이다. 그 작용을 이뤄내는 주체는 우리 자신이다.    

Siri는 이미 알고 있던 것인가.

또 노력만이 답이라는 건가. 아니다. 분명 사회적 뒷받침도 필요하다. 조선시대 백정으로 태어났다면 급등 시기는 의미가 없다. 무얼 해도 천시를 받는데 어쩌겠는가. 다만 사회 역시 보텍스 운동을 하는 걸까. 온갖 소용돌이를 거쳤으나, 개인이 역량을 펼칠 수 있는 범위는 넓어져 왔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럼에도 보텍스는 여전히 보텍스다. 끝없는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다. 아직도 수저 색깔의 제약은 존재한다. 게다가 넓어진 개인의 가능성은 또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옥죈다. 바로 능력주의다. 실패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개인의 탓으로 여겨진다. 가능성이 커졌지만 선뜻 나아가기가 겁난다.


현재 사회 구조적 문제는 어떻든 해결되어 가리라 믿는다. 그간 역사가 증명 해왔듯 말이다. 그럼에도 늘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날 게 뻔하다. 나아감의 추진력은 끝없는 소용돌이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인간은 계속해서 막연한 불안을 느낄 것이다. 그럴 때 명리를 레퍼런스로 잡아보는 건 어떨는지. 명리는 보텍스 세상 속 삶은 끝없이 꿍꽝거린다는 걸 인정하고 시작한다. 대신 소용돌이에 주저앉지 않고 이를 활용하며 나아갈 방법을 모색한다. 죽는 날까지 요동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면, 명리를 통해 소용돌이를 해쳐나갈 방안을 찾아보는 건 의미가 있지 않을까. 적어도 막연함에서 비롯되는 머뭇거림을 해소하고, 무언가라도 해볼 원동력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실행이 없다면 나아감도 없다.


“올해는 취업 못합니다.”


여전히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명리는 종종 중요 질문에 대해 삑사리를 낸다는 점이 그러하다. 또 왜 그렇게 안 좋을 일이 많을 거라는 건지. 인생이 통째로 재난이다. 이름만 몇 번을 바꾸라는 건지 모르겠다. 이러니 생년월일시를 지표로 삼는 게 말이 되는 건지 싶다.


하반기 공채 서류전형에 지원하고 있을 때이었다. 할머니께서 스님을 찾았다. 사주를 보기 위해서 이었다. 손자가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으리라. 역시나 답변은 불합격. 손자에게 전할 수 없었다. 대신 엄마에게 전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미이었다. 엄마 역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독실한 천주교 신자 이어서는 아니었다. 서류 탈락에 얻어맞던 아들에게 할 말이 아니었다. 4개월이 지났다. 12월이 되었다. 웬걸 나는 회사 세 곳에 합격했다. 심지어 한 곳은 오매불망 바라던 곳이었다. 역시 명리는 사기인 건가.         

삼수생 시절 답답한 마음에 사주를 보러 간 적이 있다. 그분은 내게 사주에 물이 없으니 물을 많이 먹으라고 했다. 정말 그랬다.

스님의 답변은 이해가 간다. 명리 공식으로만 본다면 할 수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공식은 공식일 뿐이다. 수학 공식을 모두 외웠다고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 삶은 어떻겠는가. 복잡함의 끝판왕이다. 단순한 공식만으로 읽힐 리 만무하다. 시대를 거치며 여러 명리 공식이 생겨난 건 맞다. 생년월일시 좌표 속 음양오행 작용은 특정 패턴을 이루기 때문이다. 다만 사회는 점차 다원화되어 간다. 개인의 가능성 발휘 범위는 넓어진다. 참고할 만한 성공스토리는 다양해진다(억대 연봉 먹방 유튜버를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A=B’라는 획일적 공식은 자리를 잃어간다.


흔히 쓰이는 명리 공식은 이전 시대에 생겨난 것이다. 당시에는 부정적으로만 적용되던 작용 일지 모른다. 지금은 다르다. 다원화된 사회인만큼 긍정적 포인트를 짚어낼 여지가 있다. 이는 음양오행의 부딪힘의 원리를 기반으로 짚어 봐야 한다. 동시에 사주 주인이 그려온 삶을 뜯어봐야 한다. 삶의 궤적은 음양오행의 부딪힘 속에서 쌓아온 선택의 패턴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만약 그간의 선택 방식이 급등을 가로막았다면, 새로운 방향성을 찾아보면 된다. 공식 암기만으론  심화 문제를 풀 수 없다. 증명 과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끝없는 실전 문제 풀이 과정이 수반되어야 한다. 할머니께서 찾았던 스님은 그간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묻지 않았다. 공식만을 대입했을 뿐이었다.


철학은 삶에 대해 사유하는 학문이다. 이는 삶의 긍정적 개척에 대한 욕망에서 비롯된다. 명리도 철학이다. 사유를 통해 긍정적 삶을 꾸리기 위한 현실적 방안을 도출해낼 때 의미가 있다. 허구한 날 겁만 준다면, 현실적 레퍼런스가 될 자격은 없다.


우상향을 향하여


우리 할머니와 같은 경험을 한 이가 많은 듯하다. 사주마저 좋지 않다니, 이번 생은 틀린 건가 싶다. 아니다. 정해진 결과는 없다. 대응이 관건일 뿐이다. 우리는 우주에 발맞춰 보텍스 운동을 하는 존재다. 엎치락뒤치락 해도, 어디론가 나아가는 방향성을 갖고 있다. 나는 코스피지수를 보며 이를 확신한다. 우리나라 경제는 대기업이 끌고 가는 구조다. 알바든,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우리의 경제활동은 대기업이 벌이는 어떠한 판에 엮여 있다. 코스피는 우리나라 대표 기업들을 모아둔 종합주가지수이다. 그렇기에 개인의 모든 돈벌이 활동은 코스피에 반영된다고 볼 수 있겠다. 코스피는 조정을 겪어도 늘 우상향을 그려왔다. 엎치락거려도 결국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네 모습이 담겨있다.


물론 무조건적 긍정은 금물이다. 코스피의 동생 코스닥을 보자. IT 버블 시기 2,000을 찍었다. 이후로는 20년 간 하락장이다. 코로나 시국 폭등장에서 겨우 1,000을 회복했다. 여기서 보텍스의 양면성이 드러난다. 우리는 어떻든 보텍스 운동을 하며 어디론가 간다. 다만 그 방향은 나아감일 수도, 퇴보일 수도 있다. 나아감의 보텍스를 그려내는 건, 결국 사주 주인의 몫이다.

출처: 조선비즈
출처: 뉴시스


오늘의 소용돌이가 나아감의 작용이기 위해선, 앞날에 대한 긍정성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명리는 의미가 없다. 명리는 원활한 나아감을 위한 방향성만 제시할 뿐, 선택은 온전히 우리에게 넘기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의 보텍스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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