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 고요산책 이야기
숙박시설에도 장르가 있다. 그 장르는 여행자가 원하는 걸 좀 더 세심하게 만족시킨다. 빔 프로젝트 또는 대형 스크린, 음향시설을 갖추어서 그날의 여행을 마친 사람이 고화질/고음질의 오후를 보낼 수 있게 해주는 곳은 ‘엔터테인먼트형 숙소'다. 제철 채소나 지역의 특산물을 활용한 호스트의 집밥으로 건강한 이튿날을 열게하는 ‘조식형 숙소’도 있다. 북스테이는 실내에 밀도 있게 머무르기 위한 ‘휴식형 숙소'에 속한다. 지역별 랜드마크에 대한 접근성이나 동선의 효율성보다 더 중요한 게 잘 머무르기인 사람들을 위한 곳이다.
‘고요산책'은 2021년 여름, 제주 원도심에 문을 연 북스테이 숙소다. 공간 및 문화 커뮤니티를 기획하는 김소피 디렉터와 제주착한여행의 대표이사 허순영 대표가 공동 운영한다. 일찍이 순천기적의도서관 관장을 역임한 허순영 대표는, 제주에서 관광객, 주민, 여행지 모두가 행복한 공정여행을 위한 사회적기업을 책임진다. 수년 전 서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로 이주한 김소피 디렉터는, 밀도 있게 책을 읽는 시간을 가진 후 #읽고쓰는일년 이라는 타이틀로 3년 가까이 개인 블로그에서 독서 기록을 쌓아나갔다. 이러한 아카이빙은 ‘고요산책’의 북라운지와 이곳에서 열리는 모임에 반영 되었다. 고요산책은 김소피 디렉터가 제주에서 공간 기획 및 비주얼 디렉팅에 작업에 참여한 열 한번째 공간이기도 하다.
북스테이 숙소에는 물론 책이 있다. 책에 집중하게 만들기 위한 최적의 조명과 의자도 있다. 그렇지만 이곳은 책을 사거나 파는 책방이 아니며, 빌리거나 반납하는 도서관도 아니다. 그래서, 북스테이 숙소는 공간을 만든 사람의 성향이 잘 배어나는 대표적인 곳이다. 책을 위한 서가와 가구 배치가 쾌적한가, 어떤 책들을 구비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숙박이 더해지면, 이곳에 찾아온 사람은 책 곁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기 원할까 라는 질문이 따라붙게 된다. 매일 다를 것 하나 없는 생활의 궤도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사람들, 그리고 그 빠져나오기의 감각을 좋아하는 사람이 ‘북'과 ‘스테이'를 결합한다. 그런 사람이 만든 공간이라는 확신이 투숙객에게 전해진다면 성공이다.
제주공항에서 20분 거리, 원도심에 있는 노후한 5층 건물을 보수했다. 문을 열자마자 벽면 한 쪽을 채운 서가와 ㄷ자 원목테이블이 놓여있는, 조용한 북라운지를 마주하게 된다. 그러나, 조용함이라는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공간 이용 규칙이 지나치게 빡빡하지는 않으며 입장객의 연령을 제한하지도 않으니 안심이다. 원도심 안에서 주민들이 쉴 수 있는 곳이 될 수 있도록, 아이들을 위한 돌봄과 학습프로그램이 비정기적으로 열린다. 빼곡한 서가에 그림책이 여럿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3-4층은 스테이로 활용된다. 1-2인실과 3-4인실로 나뉘어 있으며, 단정하고 편안하다. 투숙객은 객실에서 책을 볼 수도 있고, 24시간 이용가능한 북라운지에 내려가볼 수도 있다. 꼭 읽고 싶었던 책을 여행지에 가져가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북스테이의 서가에 있는 책과의 우연한 만남을 기대해보는 편도 좋다. 한편, 이곳은 ‘느슨한 북클럽'을 위한 모임장소로도 쓰인다. 평일 저녁의 참가자들이 각자 원하는 책을 들고 와 독서에 몰입한 후, 정해진 시간에 모여 그날의 책과 문장에 대해 나누는 식이다. ‘혼자 또 함께 읽는 밤'이라는 슬로건에 걸맞는 시간이다.
대전에 대해 쓰고 말하는 서한나 작가는 일찍이 한 칼럼*에서 “지역이 관점이 되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넘치는 서울과 아무튼 비어 있는 지역을 오가며 이상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왜 이렇게 다를까, 다른 요소는 어떻게 다른 삶을 만들고 다른 정서를 만들고 다른 꿈을 만들까”라고 썼다. 이곳의 시간은 서울의 그것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서울에서도 얼마든지 책을 사고 읽고 메모할 수 있다는 걸 아는 데도 그렇다. 그리고 대개의 시도가 그렇듯이, 우리를 어지럽게 하는 소음과 목소리로부터의 온전한 차단은 어렵더라도 순간의 고요는 가능하다. 그런 기억을 간직한 채로 다시 일상을 이어가게 되는 힘을 전해 받는다. 고요산책은 미리 그런 시도를 했던 사람의 염원이 담겨있는 곳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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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말고] 넌 대체 누굴 보고 있는 거야 / 서한나
- 글. 서해인 에디터/공간 사진. the blank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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