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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멘트 Jul 17. 2019

조금은 불편한 이야기

#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에서 본 우리의 미래

#1

얼마 전 페루 내에서도 낙후된 지방으로 출장을 다녀올 일이 있었다. 밤늦게 도착한 탓에 비몽사몽으로 택시를 타고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골아떨어졌다. 다음 날 아침, 정장을 차려입은 웨이터들이 쉴 새 없이 왔다 갔다 하는 호텔 옥상 테라스에 차려진 조식 뷔페에 도착해 한숨을 돌리며 아래를 내려보는 순간,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급스럽게 지어 놓은 호텔에서 내려다본모습은 잠시 내가 어디에 서있는지를 아찔하게 망각하게 했다. 포장이 되어 있지 않은 도로 위에서는 먼지가 끊임없이 날리고, 그 사이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 그 길 위에서 튀긴 바나나를 파는 상인들, 등교하는 아이들, 그리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판잣집들이 활기차지만 고단한 삶의 단편을 보여주고 있었다. 호텔 밖의 세상은 그곳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이들의 현실 공간이었고, 호텔 테라스 위에서 우아하게 아침을 먹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나와 같이 아주 잠시 그곳을 방문한 백인 위주의 외국인들 뿐이었다.

그 날 호텔 테라스 위에서 당신들을 내려다본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비포장 도로의 먼지를 마시며 매일 아침을 시작하는 당신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페루의 한 동네를 지나며

#2

최근 이 곳에서 이사를 하게 되면서 내가 쓰던 침대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됐다. 거의 새 것과 같은 침대를 버리기도 뭐해서 현지 인터넷 중고마켓에 싸게 내놨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사람에게 연락이 왔다. 친구와 함께 차에 침대를 싣고 갔더니 한 볼리비아에서 온 가족이 문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과 아버지가 침대를 들어 올려 집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것을 밖에서 잠깐 지켜보니 그 집은 그 가족만 사는 집이 아니었다. 집은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번 증축을 한 듯 보였고 방은 대여섯 개 정도가 있었는데, 그 집에는 그 가족뿐만 아니라 거의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주방과 욕실을 공유하며 살고 있었다. 내부 공기는 차고 공간은 열악했다. 우리가 쉽게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주거 공간이었다.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서는 내게 그는 덧붙였다. 뭐라도 괜찮으니 혹시 필요 없는 것들 처분하게 되면 언제든지 연락해달라고.

그 볼리비아 가족이 사는 집의 방 한 칸보다 훨씬 넓은 공간을 혼자 쓰고 있는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고국을 떠나와 비좁고 열악한 공간을 나눠서 쓰고 있는 그 볼리비아 사람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즈의 길거리에서


#3

평일 아침 출근 시간부터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난 늦은 오후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하철 입구 앞에 꼼짝 않고 서서 맨바닥에 얇은 천 한 장 위에 목도리 몇 개를 놓고 파는 한 아이티 청년이 있다. 살을 에는 추위에 사람들은 그를 무심히 지나쳐 지하철에 몸을 싣기에 급하다. 어떤 날은 출근할 때 본 천 위의 목도리들이 퇴근할 때도 똑같은 경우가 있다. 그래도 그 청년은 그다음 날도, 그리고 그다음 날도 지하철 입구에 서있다.

쾌적하고 따뜻한 사무실에서 일하며 그 아이티 청년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버는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기회의 장벽으로 인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청소나 막노동 정도가 전부인 아이티 인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지난달, 아이티의 폭력적 시위 현장 (출처: elPeriódic)


한국에서 살 때 내게 '가난'이라는 것은 절대적이기보다는 보다 상대적인 개념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곳 남미에서는 집을 나서면서부터 가난이라는 것이 한 사람의 삶을 얼마나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지와 노숙자들, 눈이 흐리멍덩한 내일이 없는 청년들, 오랜 세월을 거쳐 이제는 가난함이 삶의 일부처럼 되어버린 많은 사람들과 그나마 더 나은 땅을 찾아 고국을 떠나 닥치는 대로 일을 하는 이민자들을 적나라하게 마주하게 된다. 한국에서 태어나 순전한 나의 개인적인 선택으로 이 곳까지 별 계획 없이 왔다가 운이 좋게도 일자리를 얻어 경험도 쌓고,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월급으로 큰 부족함 없이 여행도 다니는 내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된 노동을 하면서도 결코 풍족하지 못한 삶을 사는 그들을 보며 '너희는 노력을 하지 않아서 가난한 거야.'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내가 하는 노동은 내가 버는 돈과 그들이 손에 쥐는 돈의 차이만큼 그들의 노동보다 더 가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민망하게도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나의 답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라틴아메리카의 많은 국가들은 언제부터, 어떻게, 왜 가난해졌을까? 왜 그들은 좀처럼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그리고 우리는 그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 잉카문명의 몰락과 함께 시작된 스페인의 만행

오늘날 페루와 볼리비아 근처에 존재했던 잉카 문명은 50여 년 만에 오늘날의 대도시의 기본시설을 갖춘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을 정도로 큰 문명이었으나 1532년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허무하게 정복된다. 그렇게 잉카제국을 정복한 스페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재 볼리비아에 위치한 포토시에 은광을 발견한다. 해발 4천 미터가 넘는 곳에 위치한 포토시는 돈이 모이는 곳으로 알려지며 그 당시 유럽의 큰 대도시에 맞먹는 규모와 부를 자랑하게 된다. 포토시에 사는 유럽 부자들의 사치는 극을 달렸고 그렇게 볼리비아의 은광은 스페인의 지갑을 약 이백 년 간이나 두둑하게 해 주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볼리비아와 그 노동자들이 받은 피해는 만만치 않았다. 은을 제련하기 위해서는 광석을 아주 뜨겁게 해야 하는데 이를 처음에는 나무를 태워 달궜으나 포토시는 고산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나무들이 잘 자라지 않았고 숲은 금방 고갈되었으며, 대안으로 그들은 수은을 이용해 은을 걸러내는 방법을 택했는데, 이 무서운 독성물질로 인해 수많은 원주민이 수은중독으로 생을 마감했다. 광산에서 일한 원주민의 3분의 2 이상이 수은 중독으로 사망했으며 대부분 30살 미만의 젊은이들이었다. 갈수록 더 광산을 깊게 파야 했고, 노동자들은 40도가 넘는 광산 안에서 1주일 이상씩을 먹고 자며 강제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게 원주민 노동자들이 계속 죽어가자 스페인은 마지막엔 아프리카의 흑인 노예까지 동원해서 광산을 채굴했다. 그렇게 은은 시간이 흐르며 바닥이 났고, 부유한 도시 포토시는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 중남미의 슬픈 자화상, 바나나 공화국

에콰도르 위쪽에서부터 시작해서 콜롬비아, 그리고 과테말라, 온두라스 등의 중미까지 펼쳐지는 바나나 밭은 정말 거대하다. 이들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많은 바나나를 생산하게 됐을까? 바나나 공화국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바나나 등의 한정된 일차산품의 수출에 절대적으로 의지해 주로 미국 등의 외국 자본에 제어받으며 부패한 독재자와 그 수하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정치적으로 불안한 작은 나라를 가리키는 경멸어'. 현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국의 대표적인 과일회사인 Dole이나 Chiquita 등이 바나나 공화국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기업들이다. 이런 미국의 대기업들은 중미 여러 국가들에게 철도 공사 등 도시 인프라 건설을 해주는 대신 해당 국가들의 국토의 많은 부분을 바나나 밭으로 만들 수 있도록 토지를 불하받아 그 나라의 자연을 파괴했고, 정부로부터는 엄청난 세금 혜택을 받았으며 무엇보다 해당 국가의 국민들을 노예 수준으로 부려먹었다. 농장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얻는 대신 기업이 만들어 놓은 매점에서만 모든 생필품을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구매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일을 하면 할수록 빚만 늘어갔다. 빚은 그들의 자녀에게로 세속 되어 자녀들에 손자들까지 해당 농장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생활을 벗어날 수 없었다. 광고를 통해 양심적인 기업 이미지를 만들고 있는 이러한 미국의 대기업들은 과거 중남미 국가들의 지배자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을 경우 무력을 행사해서 정권을 말살하고 미국의 꼭두각시 역할을 할 지배자들을 자리에 앉힘으로써 중미 전역을 그들의 식민지화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형태의 무자비한 자원 식민지화는 미국과 유럽의 성장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지만, 이 과정에서 노예처럼 일하다가 죽어간 많은 이들의 영혼은 달랠 길이 없다.


### 현대판 노예 국가. 짓밟힌 땅, 아이티  

'아이티'라는 나라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2010년 1월에 발생한 아이티의 대지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이때 아이티에 발생한 지진 강도는 7.0, 사망자와 부상자, 이재민 수만 300만 명 가까이 발생하며 현대사 최악의 대지진으로 꼽힌다. 같은 해 2월, 칠레에서도 지진이 발생했다. 이때의 지진 강도는 8.8로 아이티보다 더 큰 지진이었으나, 사망자는 약 700명 정도였다. 


아이티의 원래 주민은 아메리카 원주민이었으나 유럽에서 넘어온 '총, 균, 쇠'로 인해 17세기 말에는 대부분의 원주민이 사망했다. 스페인의 관심이 은광으로 쏠린 틈을 타 아이티에 정착한 프랑스인들이 아이티에 설탕 농장을 운영하기 위해서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데려온 이후 흑인에 대한 백인들의 끊임없는 폭력과 탄압에 못 이긴 흑인 노예들이 혁명을 일으켰고 그렇게 아이티는 역경 속에서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한동안 아이티의 독립을 서구 강대국들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이 인정하지 않았고 아이티 경제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설탕까지 불매하면서 아이티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맞아야 했다. 경제가 무너지면서 정치 사회의 많은 부분들이 혼란스러워졌고, 이런 혼란을 틈타 미국과 독일을 비롯한 여러 유럽 국가들은 아이티에 경제적, 군사적으로 개입하며 나라를 들쑤셨다. 급기야 아이티는 1957년부터 1986년까지 독재를 겪으며 미국의 최소한의 지원들까지 끊겨, 경제는 더 바닥으로 치달았고, 국민들은 먹고살기 위해 무성했던 나무들을 모두 베어 남은 땅은 농작지로 사용하고 나무는 난방과 생필품, 집을 짓는 데 사용하면서 현재는 원래 보유하고 있던 삼림의 3%도 채 남지 않게 돼버렸다. 그렇게 국토는 자연재해에 점점 취약하게 되었고 2010년 대지진의 피해 또한 온전히 그들의 것이었다. 이것을 100% 자연재해라고만 볼 수 있을까? 이 곳 칠레에서도 아이티 이민자의 숫자는 급증하고 있으며, (2014년에 비해 2017년 아이티 이민자 숫자는 4,000% 증가) 그들은 이 곳에서 번 돈을 고국의 가족들에게 송금한다. 아이티의 주요 수입원이 이 외화송금이라니, 한 국가의 경제와 사회 시스템이 무너지면 국민들이 짊어져야 하는 고통이 얼마나 막대한지를 알 수 있다.

   



이런 이야기들이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그저 다른 세상 이야기 같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각 국가마다 지리적, 환경적, 기후적인 영향 등 특수하며 개별적인 조건들이 해당 국가의 성장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도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반복되고 세계는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단단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강대국이 만들어낸 경제적 식민지 구조 속에서 아직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중남미 국가들의 가난이 단순히 그 나라들에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별생각 없이 우러러보는 미국과 많은 유럽 국가들의 성장 이면에 있는 중남미와 아프리카 국민들의 피와 눈물을 볼 수 있어야 하는 동시에 진짜 실력 없이 한정된 자원에만 의존해 인기영합 정책을 핀 결과 부국에서 한 순간 거지꼴이 된 베네수엘라나 아르헨티나 같은 국가들의 전차를 밟지 않기 위해 이들을 우리의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타인을 희생양으로 삼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진짜 실력 향상을 통한 성장이 진정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길이지 않을까. 이것이 내가 오늘도 이 곳 중남미의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 앞에서 겸손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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