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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멘트 Feb 27. 2022

와인과 인생의 상관관계

진짜 와이너리 투어를 하며

나는 와인의 나라에 산다. 높고 깊은 안데스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어 남미의 섬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제조업이 약해 거의 모든 종류의 공산품이 꽤 비싸지만, 와인 하나는 전 세계로 수출을 하고도 너무 많이 남아 자국 내 대형 마트 진열대의 벽 한쪽을 늘 가득 차지할 정도로 풍족하다. 그러다 보니 저렴한 와인은 한 병에 우리나라 돈 2~3천 원대부터 시작해서 몇만 원, 몇십 만원대 와인까지 다양하지만 사실 우리나라 돈으로 만 오천 원에서 2만 원 정도 가격대의 와인만 돼도 잘만 고르면 정말 괜찮고 수준 있는 와인을 맛볼 수 있다. 술과 그다지 친하지 않아도, 여기에선 가장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편한 주류이기도 하거니와 이거, 은근한 매력이 있다.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

이번에는 운이 좋게도 기회가 되어 한 와이너리 투어를 제대로 했는데 해당 와이너리의 최종적인 와인의 맛을 구현하는 전문 Enologist와 함께 포도밭부터, 발효과정, 병에 담기는 순간까지 전 과정을 따라다니며 구경했다. 와인은 가장 일반적이고 저렴한 Variety 라인부터 Reserva 그리고 Gran Reserva로 이어지며 그 위에 가장 프리미엄급 라인이 추가되기도 한다. 하나의 와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고 테이스팅까지 해보니 신기하게도 와인의 세계도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원리와 꽤 비슷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Tasting Room


기본기를 갖추었다는 가정하, 가장 중요한 기준은 개인의 취향

이탈리아에서 발행된 한 커피 관련 서적은 커피 맛 감별 시 문화적, 사회적 요인이 포함된다고 했다. 이를 조금 더 넓혀서 생각해보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는 주말 아침 살짝 햇빛을 맞으며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마시는 신선한 커피일 것이고, 가장 맛없는 커피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 스트레스를 받으며 마시는 커피이지 않을까. 커피를 일상적으로 마시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사실 커피 자체가 너무 맛이 없거나 잘못 내려서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내가 마시는 커피에 대한 기억은 단순한 커피콩의 화학적 작용 결과가 좌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날의 날씨와 나의 기분, 같은 커피라도 월요일에 마시는 커피와 금요일에 가벼운 마음으로 마시는 커피의 맛은 다를 것이고, 마시는 공간의 분위기나 음악, 심지어 커피잔의 디자인이나 그 커피를 누구와 같이 마시는지도 커피의 맛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가. 


와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싼 와인과 비싼 와인의 차이를 결정하는 이런저런 요인들은 많지만 '저가 와인=나쁜 품질'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오크통에서 숙성한 와인은 좋은 와인인가?라는 질문에 얼핏 생각하면 '그렇다'라는 생각은 들지만 사실 꼭 그렇지도 않다. 진짜 중요한 질문은 '이 와인에서 오크통에서 숙성한 와인 맛을 내고 싶은가?'이고 와인 메이커의 판단 아래 오크통 숙성을 할 수도 있고, 아예 안 하기도 하고, 오크통이 아닌 다른 곳에서 숙성 작업을 하기도 하고 또 오크통 숙성 와인과 하지 않은 와인을 섞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구현하고 싶은 맛을 만들어내는 작업 자체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시중에서 접하는 고가의 와인과 저가의 와인의 가격차이가 10배라고 해서 꼭 그 둘의 품질 차이가 10배는 아니다. 가격과 상관없이 내 입맛에 맞는 와인이 내게 좋은 와인이고, 와인을 즐기는 데에는 그걸로 충분하다. 인생에서도 기본기는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최선을 다해서 '나 자신'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이런 게 아닐까. 유명하지 않더라도, 각종 경연대회에서 상을 받지 않더라도, 이 우주에서 유일한 나로서 충분히 어떤 이에게는 그의 인생 와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오크통은 보통 5-6년 정도 쓰이는데 해가 갈수록 오크숙성이 만들어내는 깊이도 달라진다. 오른쪽은 도자기 재질의 숙성통.


인간의 실험정신과 인내심이 만들어내는 결정체

비싼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보통 수많은 포도나무들 중에서도 건강한 포도나무들이 가장 잘 자랄 수 있는 지형과 기후 영향을 고려해 배치를 하다 보니 보통은 넓디넓은 포도밭에서 작은 일부 면적을 차지하는데 그러다 보니 사람이 더 신경 써서 나무와 열매를 보살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고, 수확 또한 기계가 아닌 사람 손으로 직접 하며, 해당 면적에서 나온 포도로 최상의 맛을 내기 위해 전문가들이 실험에 실험을 거듭하고, 병에 담기기 전 숙성과정을 거치고 또 마지막으로 와인병에 담긴 이후에도 추가로 숙성과정을 거친다. 즉, 비싼 와인은 다른 와인과 비교했을 때 완전히 처음부터 다르거나 엄청난 특별한 무언가가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있는 것 중 잘 선택하고, 선택한 것에 집중해서 거기에서 최상의 것을 뽑아내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이 시원치 않고 별 볼 일 없는 것 같아도 그중 기본기가 탄탄한 것을 선택해서 꾸준히 연마하고, 관심을 갖고 격려해주고, 그것이 잘 숙성될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다 보면 내 안에서도 꽤 수준 높은 무언가가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이치와 같다.  


좋은 와이너리는 단순히 와인뿐만 아니라 예쁜 정원, 호텔, 맛있는 음식 등을 모두 같이 즐길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당신 덕분에 내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 

예전에 프랑스의 한 와이너리에서 일을 해봤다는 사람의 이야기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인 테이스터들의 모임 장소에서 재미로 와인병을 모두 가리고 잔 내부 내용물이 보이지 않게 한 뒤, 이 와인이 화이트 와인인지 레드 와인인지 같은 아주 기본적인 질문부터 시작해서 어느 나라 와인인지, 종류는 무엇인지, 몇 년도 산인지 등등을 물어봤는데 이를 꽤 잘 맞췄던 사람 한 사람 정도만 제외하고는 다들 틀려도 너무나 틀린 대답을 했단다. 심지어 라벨을 가린 와인 중에는 완전히 똑같은 와인도 서너 개 섞여있었는데 세계적인 와인 테이스터들이 똑같은 와인을 마시면서 첫 번째 와인은 분명 프랑스 와인인데 두 번째 와인은 칠레산 와인이라고 확신한다고까지 하는 답변도 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끼리 엄청나게 낄낄대며 웃었다. 그런데 나는 그들이 실력이 없는 와인 테이스터라는 생각보다는 그토록 와인이라는 세계가 주관적이고도 다양한 요인이 작용하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먹는 게 싼 와인이라고 생각하면 왠지 그냥 그런 것 같은데 진짜 비싼 와인을 마실 때는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다르게 느껴진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이렇게 일부러 가격대를 나눠놓고, 그 안에서 저가 라인, 중간급, 프리미엄 급등을 나눔으로써 중간급 라인에 위치한 와인들이 최저가 와인의 싼 이미지를 피할 수 있게 도와주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쉽게 사 먹기 힘든 초고가 와인이 있는 덕분에 그 바로 아래급 라인이 가격에 비해 꽤 괜찮은 품질의 와인으로 매력 어필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말해, 그들이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때는 '그냥 와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을 어떤 카테고리에 위치시키고 다른 와인들과 비교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해당 상품의 존재 가치가 새로 정의되는 것이다. 내가 지금 나로 존재하는 것 또한 타인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와인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은 없지만 그래서 매우 주관적인 해석을 해버렸는지도 모르겠지만 이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는 자연의 원리와도 비슷해서 결국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그 뻔하디 뻔한 삶의 중요한 가치들을 와이너리를 나서며 다시 한번 곱씹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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