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출장을 다녀오며
페루에 다녀왔다. 그것도 일주일 씩이나... 어차피 내가 가는 출장지들은 거의 대부분이 오지라서 일주일 출장은 종종 가혹할 만큼이나 길다. 페루에 오는 관광객들이 들르는 대표적 여행지인 쿠스코(마추픽추를 가려면 쿠스코로 일단 가야 한다)는 그 도시만의 특색이 있고, 리마도 보통 관광객들이 가는 Miraflores, San Isidero 같은 곳은 꽤 모던해 보이기에 2014년 처음 페루를 여행했을 때 내게 페루는 참 특색 있고 예쁜 나라라고만 인식이 되어있었지만, 그 이후 내가 일로 다녔던 북쪽에 위치한 시골 도시들은 심란하기 이를 데 없다.
리마도 마찬가지지만 위에 사진처럼 공사 중인 건축물 뿐만 아니라 공사가 끝난 건물도 저렇게 위에 삐져나온 철근을 마감하지 않고 저대로 두는 건물들이 수두룩하다. 건물 공사가 마무리되면 완성된 건축물로 인정되어 세금이 나오는데 그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영원한 미 건축물'로 두는 것이다.
페루에 처음 왔던 2014년, 그리고 다음으로 방문했던 2018년, 4년이 또 지난 2022년, 그러니까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이곳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증축 이야기가 몇 번씩이나 나왔지만 여전히 미동도 없는 좁디좁은 리마 국제공항, 노후 차량 단속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하기에 언제나 심각한 매연으로 가득한 도로들, 시간 약속 안 지키는 택시 기사들, 낮은 시민의식, 그리고 무엇보다 정상적인 비지니스를 어렵게 하는 남미 사람들 특유의 무질서함 및 무책임함... 바뀐 게 정말 하나도 없다.
남미는 역사가 200년 남짓한 젊은 대륙이다. 잉카제국(15~16C 초), 마야문명(10C), 아즈텍 문명(16C) 등 같은 찬란한 문명이 아직까지 중남미 몇몇 국가에 유적지와 유물로 남아있긴 하지만 현대의 중남미 사람들에게 더 가깝게 남아있는 과거는 이러한 그들의 독립적인 문명의 역사라기보다는, 스페인의 정복과 그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독립을 하기까지 이들을 지배했던 유럽의 존재감, 그리고 독립 후 살짝 그을린 듯 남았던 그들의 선진 문명인 듯하다. 그래서 남미 사람들은 유럽을 막연하게 동경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절대 가까워질 것 같지 않아 보이는 그들의 현실을 비교하며 'inferioridad(열등감)'을 마음 한편에 늘 갖고 산다.
기름을 아끼려고 30도가 훌쩍 넘는 날씨에도 에어컨을 절대로 틀지 않았던 젊은 택시 기사 청년은 나를 기다리는 3시간 동안 그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그늘을 찾으려고 하지도 않고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견디고, 전날부터 몇 차례나 시간 약속을 확인받아도 태연하게 늦게 오면서 미안하다는 소리도 하지 않고(심지어 그 다음날에는 아예 나타나지도 않았다),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들렀던 공항 카페에서는 신경이 날카로워질 정도로 지저분하게 끊기는 음악소리도 아무렇지도 않게 듣고 있는 카페 직원들을 보며, 신기했다.
인내심과 참을성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견디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웬만한 불편함에는 무감각해졌다고 해야 할까?
60~70년 전 가난했던 우리나라도 비슷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왠지 모르게 그저 남일 같지만은 않아서 괜히 답답하고 속상하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것들을 견뎌왔고 지금도 견디고 있는, 어쩌면 자기가 무언가를 견디고 있다는 사실조차 긴가민가 해 질 정도로 불편함과 부조리를 오랜 시간 견뎌온 이들을 보면서 익숙한 무언가를 문제나, 불편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예민함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무엇을 견디고 참는 것이 때로는 필요하기도 하지만 꽤 많은 경우에 이런 태도는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고 현재 상태에 더 오랫동안 머물게 하는 것 외에 별다른 개선을 가져오지 않는듯하다. 내가 가진 예민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이 예민함을 잘 단련시켜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던 긴 출장을 끝내고,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