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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멘트 Sep 03. 2023

나는 우울할 때 공부를 한다.

공부가 치유가 되는 때

#에피소드 1: 1패

그날은 오랜만에 아끼는 니트 재질의 흰색 치마를 입은 날이었다. 친구와 점심약속이 있어서 사무실 근처 한 페루식당에 가서 페루 전통 음료 중 하나인 보라색 옥수수로 만드는 치차모라다(chicha morada)를 시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웨이터가 음료를 가지고 오더니 그 컵을 채 들어 올리기도 전에 그 보라색음료가 가득 든 컵을 내 앞에서 다 쏟아버렸다. 내 흰색 치마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겠다... 그런데 그 순간 식당 지배인이 나에게 처음으로 한 말, '원하시면 자리를 옆테이블로 바꿔드릴게요.' 어이가 없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최대한 빨리 화장실로 뛰어가 옷을 다 빨아야 했으니까.. 대충 불완전한 응급처치를 마치고 다시(!) 우리는 그 식당으로 돌아와서 식사를 하고, 식당에서는 사과의 의미로 맛없는 작은 푸딩하나를 내왔지만 우리 둘 다 아까의 그 사고 수습에 너무 많은 시간을 써버린 탓에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푸딩은 거의 그대로 두고, 경황없이 계산을 하고 나와버렸다.

내 흰색 치마 위에 거침없이 흩뿌려진 페루의 전통음료, 치차모라다

사무실에 돌아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는 그곳에서 식사값 전체와 음료값, 그리고 10% 팁까지 계산을 하고 나왔다는 사실에 순간 머리가 띵 했다. 칠레에서는 10%의 팁이 의무개념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당연히 우리에게 팁을 포함할까요라고 한마디 묻지도 않고 청구를 해버린 것이다. 물론, 그 자리에서 정정을 하지 못한 내 불찰도 있었지만.. 아끼는 옷 한 벌을 망치고, 돈을 다 내고, 거기에다 팁까지 내고 나왔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어 올라 다시 돌아가서 팁을 돌려달라고 할까, 세탁비를 달라고 할까 고민했지만 결국 나는 그냥 잊기로 했다. 내가 아무리 그런다고 한들 바뀌는 것은 없을 거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에피소드 2: (소심한) 1승

회사 사람들과 오랜만에 스타벅스를 갔다. 사람들이 꽤나 많이 오가는 곳이었지만 들어가니 주문을 받는 직원이 "그란데 사이즈 컵이 없어서 톨 사이즈랑 벤티만 가능해요."란다. 여기는 뭐든지 툭하면 재고가 떨어진다. 나는 벤티 사이즈 1잔과 톨사이즈 2잔을 시켰는데 주문을 받는 친구가 옆의 바리스타에게 벤티 컵 2개와 톨 컵 1개를 전달하는 것을 보고 이상해서 다시 확인했더니 주문받는 직원이 내게 하는 말, '아, 벤티 2개로 입력을 이미 해버렸는데 그냥 벤티로 드시면 안 되나요?'. 그때는 결제도 하기 전이었고 커피를 내리기도 전이었는데 내가 이 친구의 실수로 내 주문 내역을 바꿔야 하는지, 이것도 그 페루식당 에피소드처럼 그냥 참고 넘겨야 하는지 생각하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니요, 제 주문대로 해주세요.' 그러자 그 친구는 짜증이 났는지 한숨을 푹 쉬며(!), 뭐가 그리 복잡한지 한참을 걸려서 주문을 제대로 바꿨다. 



한국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참 이해가 가지 않고 어이가 없는 이런 상황들은 사실 다 열거를 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아무리 여기에 오래 살았어도 이럴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무슨 대단한 야심이 있다고 지구 반대편까지 와서 이렇게 당하고(?) 사나 싶어서 우울할 때도 많다. 잘 풀리는 일이 없는 것 같고, 복합적인 감정들이 온갖 섞여 정의 내릴 수 없는 분노와 우울감이 나를 엄습할 때마다 나는 때로는 그 감정 앞에 무너지기도, 포기하기도, 분노하기도 했으나 답답한 상황은 바뀌지 않고 그 상황에 대한 나의 감정도 바뀌지 않는다면, 상황을 바꾸는 게 빠를까 아니면 나의 감정을 바꾸는 게 빠를까? 어려운 질문이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정들에 쓸려 다니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나 자신이 저 멀리 떠내려갈 것 같았다.  


나는 이에 대해 나름대로 질문을 던져보고 이에 대한 나만의 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예를 들면 이번에 이 두 에피소드를 겪으며 내가 던진 질문은 다음과 같다. '내가 느끼는 칠레의 서비스 마인드는 왜 이렇게 낮을까?' 이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해 대략적인 칠레의 역사와 외식문화, 사고방식 등등에 대한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직접 경험한 것도 중요하지만, 경험은 늘 한정적이니까. 그리고 흥미로운 자료를 하나 발견했다. 남미 국가들의 외식산업을 조사한 한 연구자료에서 인구 1만 명당 식당이 몇 개가 있는지에 대한 수치를 발표했는데 다음과 같았다. (2022년 기준)


멕시코와 페루는 약 70개, 브라질은 47개, 콜롬비아는 22개, 그런데 칠레는 8개였다. 그러다 보니 식당 한 개당 평균 연매출도 다른 남미국가에 비해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공급보다 수요가 많은 철저한 공급자 시장에 가까운 것이다. 사실 나도 그날 웨이터가 내 옷에 주스를 다 쏟았어도 딱히 다른 곳으로 갈 데가 없어서 다시 돌아간 것만 봐도 칠레에는 정말 식당이 한정적이다. 이 모든 것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많은 경우 공급자 시장에서는 공급되는 상품이나 서비스의 질이 낮아도 수요가 있기 때문에 굳이 추가적인 노력을 하지 않기 쉽다. 


그렇다면 한국의 1만 명당 식당 수는 어떨까? 

무려, 142개!!! 

농축산식품부 2022년 7월 발표자료 (수치는 '21년 기준)

그러니까 나는 인구 1만 명당 142개의 식당이 있는 나라에서 자라서 인구 1만 명당 8개의 식당이 있는 이곳의 서비스 마인드에 대해 불평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서비스가 좋은 곳이 있고 한국에도 불친절한 곳은 당연히 있고 꼭 공급자 시장이 맛없는 음식과 안 좋은 서비스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냥 이 몇 개의 숫자들 만으로도 나의 분을 조금은 삭일 수 있게 되었다.


칠레에는 이렇게 멋진 식당도 있다!

어떤 상황이든 안에는 없는 많은 요소들과 다른 시각들이 존재한다. 이때 나의 개인적인 경험만으로 만들어진 나의 관점 하나만으로 상황을 이해하는 일은 거의 많은 경우에 좌절스럽다. 우리는 언제, 왜 우울해지는 걸까? 그 원인은 다양하겠지만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발생하는 감정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 대신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이성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해 보고 나만의 질문을 던지고, 또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공부를 해본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우울에 위안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위안은 타인이 내게 주는 위안보다 훨씬 더 강력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이 내가 우울할 때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 이유다.  


(내가 생각한) 우울감과 분노가 치유되는 과정


사유능력의 즐거움에서 관찰되는 특징은 해소되어야 할 고통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유능력의 즐거움은 어떤 결핍이 있다가 그것이 보충될 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고통을 전제로 하지 않기에 모든 고통과 양립할 수 있는 즐거움, 사유능력의 즐거움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런 즐거움을 우리는 보통 기쁨이라고도 한다. 기쁨이란 본래 투명하고 자유로운 것이다. 고통과 섞여있지 않고 고통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기쁨은 역설적으로 고통과 양립될 수 있다.         <서양고대 미학사 강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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