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소환해 얻은 깨달음들
누구에게나 어렸을 때의 환경과 개인적 경험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삶에 훨씬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성인이 된 지금 나에게 같은 일이 일어났다면 큰 탈없이 훌훌 털고 일어났을 일이지만,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인 어느 날 친구와 아파트 비상계단에서 소꿉장난을 하다가 친구가 갑자기 말도 없이 집에 가버리고 난 뒤 홀로 남았을 때 그 차가운 시멘트 바닥의 온도와 이 세상에 마치 혼자 남겨진 것 같았던 무서움과 외로움의 감정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너무나 생생하다.
사람의 뇌신경 세포는 어렸을 때 더 많은 수가 활성화 되어있다가 성인이 되면서 그 수가 줄어든다고 하니, 어쩌면 성인이 된 누군가의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 뇌세포들 저 뒤편에는 그 사람의 과거 기억들의 조합이 현재의 나라는 사람을 프로그래밍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은 음악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나의 뇌세포가 지금보다 더 많고 훨씬 더 활동적이었을 때 나는 호기심과 떨리는 마음으로 기타를 배우기 시작해서 그 끝은 형용하기 어려운 복잡한 애증관계로 마무리되었었다. 그리고 한동안은 라디오에서 우연히 내가 잘 알거나 혹은 지겹게 연습했던 곡이 나오면 슬그머니 채널을 돌려버리기도 했고, 지구 반대편 멀고 먼 남미로 올 때쯤 이미 나의 연주용 기타 두대는 동생들이 퉁탕거리며 치는 장난감으로 전락했었다.
그러다가 예전에 여기에서 구한 방구석에 세워만 두었던 기타를 최근 우연한 계기로 다시 쳐보게 되었다. 몸의 기억은 놀랍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처럼 극한의 상황에서, 더군다나 피아노를 그렇게나 오랫동안 치지 못했던 상황에서도 완벽하고 감동적인 연주를 해내는 그런 주인공의 드라마틱한 모습은 재능 따위 없는 나에게서는 당연히 볼 수 없었지만 대신 그저 다시 기타를 잡고 튕기는 것만으로도, 이미 화석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기억들이 숨을 갑자기 몰아쉬며 먼지를 털고 콜록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어렸을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던 스승님들의 말들도 다시 들렸는데, 곱씹어보니 기타뿐만 아니라 인생의 많은 면들에서 적용할 수 있는 가르침임을 이제야 알겠다.
긴장하면 나도 모르게 숨을 참게 된다. 숨을 참으면 그 순간에는 뭔가 초집중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긴 하지만 숨을 쉬지 않으면 결국 손끝부터 시작해서 온몸이 굳고 저절로 몸에 힘이 들어간다. 몸에 힘이 들어가면 당연히 더 미스터치가 많아지고, 그러다 보면 또 더 힘을 주거나 숨을 참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기타를 칠 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어떤 순간에서든 일단 차분히 숨부터 쉬면 몸과 마음에 힘이 빠지고 지금부터 헤쳐나가야 할 것들이 보인다. 그러니까, 의식적으로라도 규칙적으로 숨을 쉬고 힘을 빼서 그 자리에 진짜 나를 채워 넣은 나만의 곡을 멋지게 완주할 것. 많은 경우에 그것을 얼마나 빨리, 잘했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찌 되었든 끝까지 해냈는지의 여부다.
언젠가 레슨을 받으며 선생님에게 속상함에 칭얼거렸다. "선생님, 저는 100%를 연습해도 꼭 실전에서는 80%밖에 못 보여 주는 것 같아요." 그랬더니 지금은 작고하신 그 선생님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내게 한 말, "그럼 120%를 연습해." 말장난 같은 이 말을 초딩의 머리로 제대로 이해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반박의 여지가 별로 없는 말이다. 내가 무엇을 100% 세상에 보여주고 싶다면, 내가 준비해야 할 양은 120%, 혹은 그 이상일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듯 음악에 특별한 재능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이 기타라는 어려운 악기를 다루며 실수를 안 하기란 보통일이 아니었다. 나는 기타를 치다가 틀리면 그 자리에서 멈춰버리곤 했다. 멈추고 그 부분만 다시 쳐보고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연주하기를 반복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선생님은 내게 '틀려도 멈추지 말고, 그냥 끝까지 계속해. 중요한 건 실수를 했다고 멈추는 게 아니라 네가 전체적으로 어떤 음악을 만들어내는냐야.' 라며 한번 연주를 시작하면 몇 번을 틀리던지에 무관하게 끝까지 마무리하기를 주문했다.
실제로 그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타리스트 존 윌리암스, 후쿠다 신이치 같은 엄청난 연주자들의 내한공연을 갔는데 이 엄청난 사람들도 곡의 순서를 바꿔서 연주하거나, 반복하지 않아야 할 곳들에서도 두어 번 더 치는 등의 실수를 하곤 했다. 하지만 기타를 치는 사람이 아니면 잡아내기 어려운 실수일 터였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음악은 아름다웠다. 그러니, 내가 나만의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면 된다. 실수는 세계에서 최고라고 손꼽히는 사람들도 하지만, 그들은 실수보다는 그들의 음악에 집중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의 연주는 내가 충분히 준비되었을 때 시작하면 된다. 그 누구도 나를 재촉할 수 없을뿐더러 내가 충분히 숨을 고르지 않고, 손을 풀지 않고 허둥지둥 시작한 연주는 얼마 못 가 페이스를 잃어버린다. 그만큼 내가 어떤 상황에서 시작을 하는지는 중요하다. 당연히 연주뿐만이 아니다. 회사에서도 어쩔 수 없이 시간과 여러 가지 상황에 쫓겨 메일을 보내거나 사람들과 정신없이 이야기하고 나면 꼭 빠진 부분이나, 괜히 필요 없는 말을 했거나 하는 때가 종종 있다. 그러니 무언가 행동을 하기 전에 내가 정말 준비가 되었는지 스스로에게 한 번만 물어봐야겠다. 내가 준비가 되었을 때가 어떤 일을 시작하기에 가장 좋은 때니까.
나는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나의 기타 스승님들의 가르침을 2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깨닫고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