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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멘트 Jan 21. 2024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례식

 

찌는듯한 무더위에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었다. 유난히 늑장을 부리고 싶었던 일요일 아침, 생각지도 못한 부고 전화를 받았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낯선 나라에서도 벌써 네 번째 참석하는 장례식이었다. 평생을 시골에서 동물들을 키우며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았던 그분의 대문 앞에는 풍선들 몇 개가 덩그러니 걸려있었다. 

집 앞에 도착하니 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모든 물건들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으며, 거실을 채우고 있던 삶의 흔적들이 잠깐 지워진 자리에 꽃과 고인을 모신 관이 놓여있었다. 그 옆에는 큰 촛불들이 쉴 새 없이 타고 있었는데, 돌아가시고 난 뒤 최소한 이틀 동안은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서 밤을 꼬박 새워 고인을 추모하고, 기도하며 함께 시간을 보낸다. (양초는 스페인어로 벨라(Vela)라고 하는데, 초를 켜놓고 밤새 이어지는 이곳의 삼일장 개념을 여기에선 벨로리오(Velorio)라고 한다) 


모셔놓은 관은 위로 정확히 반이 열려있어서 고인의 집을 찾은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직접 마주하고 작별인사를 나누었는데 어느 누구도 그것을 꺼려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았다. 나도 그 옆에 조용히 서니,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어디에선가 들어봤던 상투적인 말들이 정말 문자 그대로 와닿았다. 얼굴에 핏기나 생기가 없다는 것이 내가 발견한 그와 나의 가장 큰 다른 점이었으나 그래서 살아있다는 게 더 신비롭게 느껴졌다. 사람을 살아있게 하는 것은 생기(生氣), 즉 삶의 기운이구나. 


그 흔한 부조금을 받는 곳은 없어도 꽃은 시간이 갈수록 수북이 쌓여가고, 한쪽에서는 기도를 하고 또 한쪽에서는 두런두런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모두가 슬픔에 잠긴 표정과 눈빛을 지니고 있었으나 많은 이들과 나누었던 80년이 넘는 세월을 뒤로한 그의 죽음 앞에서 어느 누구도 지나치게 슬퍼하지는 않았다. 내게는 특히 인상적인 광경이었는데 그 사람이 떠나고 남은 나의 처지에 대한 슬픔이 아닌,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긴 여정을 떠난 이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이 가진 아이러니는 오로지 죽음을 단 한 번도 실제로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의 입장에서만 그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데에 있다. 그러니 고인이 사망하고 난 뒤부터 우리가 이 사회에서 관습적, 의례적으로 하는 모든 행위의 중심은 많은 경우에 죽은 이가 아닌, 살아있는 자들에 있을 터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허례허식은 최소화시킨 진정으로 고인을 위한 장례식을 봤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고 많지는 않지만 내가 한국에서 경험했던 장례식들과 오버랩되며, 모든 것이 너무나 편하고 빠르다 못해 장례 서비스마저도 이를 이용하는 고객들의 편의성에 딱 맞게 발전한 이 시대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마저도 산업화와 도시화가 된 것 같아 애석했다면, 나는 누구나 맞는 죽음을 지나치게 감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했던 티베트인들의 고전 경전 <티베트 사자의 서>에 의하면 사람의 숨이 멈추었다고 해서 바로 죽음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숨이 멈춘 후 20~30분 정도는 의식이 그대로 육체에 머무는데, 그로부터 다시 3~4일 (티베트 불교에 따르면 생전에 쌓은 업에 따라 이 기간은 대략 2일~7일까지도 늘어날 수 있다)은 되어야 비로소 의식이 육신을 벗어나 총 49일 동안의 여정을 떠나게 된다. 이렇게 삶(本有)에서 완전한 죽음(死有)으로 옮겨가는 이 시기를 티베트 불교에서는 중음(中陰)이라고 한다. 과학적인 증거가 있는 이론은 아닐지라도 (그 어떤 이론이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겠냐만은) 혹여나 이들의 믿음이 맞다면, 숨이 멎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을 바로 차가운 알루미늄 침상에 눕혀 냉동고에 넣어서 얼려버리고 2~3일 후 (어쩌면 의식이 아직 육신에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그때) 다시 뜨거운 불구덩이에 넣어버리는 오늘날 장례식의 재빠른 속도는 아직 우리와 매우 가까이에 있을지 모르는 사랑하는 이의 영혼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채 집으로 돌아왔다. 


아파트가 가장 대중적인 주거공간이 된 지금 현실적으로 티베트 사자의 서는커녕 집에서 며칠 동안 돌아가신 이를 모시는 것 자체가 뉴스에 나올법한 사회에서 살고 있지만 그래도 사회의 법을 반하지 않고 타인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는 선에서 그리 유쾌한 생각은 아닐지언정, 내가 사랑하는 이들과 그리고 나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맞이하고 싶은지에 대해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깊이 생각해보고 싶다. 


전해 듣기로는 내가 떠나고 난 뒤 그다음 날 벨로리오가 끝날 때쯤이 되자 온 거실바닥이 꽃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장례서비스라는 상품이 빠진 현대사회의 흔치 않은 장례식이었기에 아마도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례식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고인은 자신의 마지막을 배웅하러 기꺼이 와준 그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들과, 노랫말, 음악을 아주 흐뭇하게 같은 공간에서 듣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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