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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멘트 Apr 07. 2019

'너는 누구냐'는 질문에 대해

# 어느 날 우연히, 진짜 나를 보다

정신을 차려보니 외딴 도시였다.

이 멀리까지 와서도 쉼 없이 밀려드는 일에 원래 계획했던 일정을 그냥 포기하고 홀로 어두컴컴한 호텔방에 앉아 기계적으로 메일을 보내며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여기까지 무엇 때문에 왔는지 조차 망각하게 되는 상태에 이르렀을 즈음.. 앞으로 살면서 다시는 올 일이 없을지도 모르는 이 낯선 나라에서 이 곳을 떠나기 전 내게 주어진 약 한 시간 반 정도의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이 도시를 머리에 담아보겠다는 요량으로 일단 컴퓨터를 닫고 호텔을 박차고 나갔다.



주머니엔 7천 페소(한화 2500원) 남짓한 소량의 현금과 현지용 칩을 갈아 끼우지 않아 인터넷도, 전화 신호도 잡히지 않는 먹통 휴대폰이 전부였다. 전 세계에서 치안이 안 좋은 것으로는 손에 꼽히는 이 곳에서 나의 가장 큰 위협은 내 타고난 길치 감각이었으나 주머니가 가벼워서 그런지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늘 그렇듯 걸으면서 나를 짓누르던 많은 생각들은 조금씩 흐려지고, 그렇게 터벅터벅 걷다가 빵 굽는 냄새와 커피 볶는 냄새가 풍겨오는 한 작은 카페 앞에 멈춰 섰다.


@ Bogotá, Colombia. Café Anna

 

세계적인 커피 산지인 이 곳에서 갓 볶아 내려 커피 향이 진한 맛있는 커피 한잔을 앞에 시켜놓고, 먹통인 휴대폰은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가... 를 반복했다. 무엇을 보고 싶지도, 쓰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누구와 이야기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눈을 감으니 세상은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눈을 뜨니 이 곳은 콜롬비아라는 낯선 나라의 한 골목에 위치한 작은 카페였다. 다시 눈을 감으니 내가 어렸을 때 기쁘고 슬펐던 모든 과거의 순간들이 영화의 한 장면들처럼 머릿속을 긋고 지나갔고, 다시 눈을 뜨니 길 앞으로 목발을 짚어서 거동이 불편한 할아버지가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한 번 더 눈을 감으니 며칠 전 내 마음에 상처를 내었던 회사로부터 온 비난의 메일들과 나를 속상하게 했던 타인의 음성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고 다시 눈을 뜨니 따뜻하게 마시기 좋은 온도가 되어있는 커피 한잔이 내 앞에 있었다.


대학교 시절 좋아했던 불교철학 강의와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부분들이 오버랩되며 마음으로 다가왔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하는 가장 큰 질문이자 근원적인 물음인 '나는 누구인가?'라는 대목이었다. 흔히 떠올리는 대답인 '내 이름은 OOO이고, OO살이며, OO학교를 나와서 OO에서 일하고 있고, 취미는 OO이고, 나는 이렇게 생겼고, 성격은 어떻고, 앞으로는 OO을 하는 것이 목표인 사람'이라는 설명은 '나'의 본질을 꿰뚫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누군가가 나를 비난하는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속상함과 억울함, 모멸감등의 감정 자체는 내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나를 칭찬하는 말을 들었을 때 느꼈던 우월감과 기쁨도 그 자체는 내가 아닌 것이다. 감정들과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나를 통해 흐를 뿐이기 때문이다. 진짜 '나'는 과거의 이 모든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현재에 있는, 그리고 앞으로 있을 '변하지 않는' 관찰자, 즉 주체다.


나는 이 순간을 바라보고 있는 관찰자다

그간 나를 죄여 오던 스트레스와 괴로움이 내게서 한 발짝 물러나는 기분이었다. 그 무거운 감정은 나를 스쳐갔을지언정 그것 자체는 절대 내가 아니라는 것, 그렇기에 그 감정 속에 너무 몰두해서 허우적거리며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내 영혼을 조금이나마 자유롭게 했다.


지금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가 뜬다. 이미 콜롬비아에서 우연히 들어갔던 카페의 풍경은 내게 이미지로만 남아있고, 마셨던 커피의 맛도 과거가 되어 흘러가, 내게 한 조각의 기억으로만 남았다. 앞으로 살아갈 모든 시간들을 거쳐 생의 마지막 순간에 다시 눈을 감으면 나라는 사람의 한 인생 전체가 한 편의 영화처럼 수많은 영상, 이미지, 소리로 남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인생에 대해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이 조각들의 묶음이라면, 앞으로 어떻게 남은 시간을 보내야 할지에 대한 답도, 그리고 나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답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불합격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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