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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멘트 Mar 29. 2019

불합격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칠레에서는 요근래 갈수록 더 많은 이민자들을 볼 수 있다. 
베네수엘라나 콜롬비아,  페루등에서 온 이민자들은 칠레의 최저임금보다 더 낮은 임금을 받으면서라도 일자리를 구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기에 아주 저렴한  노동력 공급이 가능하고 상대적으로 칠레사람들에게 취업은 하루하루 더 어려워지고 있다.
거기에 더해서  칠레의 최저임금은 한국보다 낮고, 월급격차는 더 큰 문제도 있다. 실제로 칠레에서 대학을 졸업하지 않고 일반적인 단순노동직에  취업해서 받는 월급은 25만페소.. 한국돈으로는 40만원 내외. 대학을 졸업하고 나와서 큰 대기업이나 외국계회사 등에 취업해서  받는 첫월급은 대략 80만페소 정도.. 한국돈으로는 140만원 내외로, 80만 페소를 못받는 직종도 정말 많다. (세금 제외후  실수령액 기준) 산티아고를 가로지르는 큰 길을 따라서 윗동네에서 아래동네로 걷다보면 한시간 안에 사람들의  옷차림의 변화를 단계별로, 심지어는 겉모습 뿐만이 아닌, 사람들이 쓰는 말투나 단어들, 표정까지.. 걸으면서 그 차이를 느낄 수  있는데.. 그래서, 이 곳은 때때로 이 시대의 현실을 너무나 잘 보여줘서 씁쓸하다. 

그래도  타 남미국가들보다는 그나마 낫다는 칠레의 경제상황으로 인해 이민자들은 밀려 들어오는 동시에 그로 인한 상대적 빈곤감은 커지고, 내  주위에도 취업을 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칠레 친구들이 많다. 그리고 그들을 보면서 내가 한국이라는 내 나라에서 겪었던, 그 '취업'이라는  20대의 최대 난제 앞에서 방황하고 고독했고 우울했던 지난날의 나를 돌아보면서 문득 든 생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순간에는  세상이 무너지는 것같이 아프고 힘들었던 불합격 통지들이 지금 생각해보면 참 감사하다는 것..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편안하고, 안정적이며, 나의 미래를 어느정도는 예상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았고, 반대로 내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거나, 사회적인 기준에서 조금 빗겨난 미래는 약간의 불편함과 불안함 그리고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또 다시 우울했다. 

며칠전에  어떤 강의를 보는데 강연자가 하는 말이, '여러분, 재수없으면 120살까지 살아야되요'. 그 말을 들으니, 120살까지 살고싶은  마음은 애초에도 없었으나 정말로 강연자의 말대로 '재수가 없어서' 120살까지 살게 되면 어쩌나, 차라리 그럴거라면 이왕에는 내  인생이 조금 더 다양하고, 더 risky하고, 더 다이나믹하고, 한마디로 말해서 더 굴곡이 많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사람의 성향에 따라 물론 다 원하는 인생의 형태가 다르겠지만, 지루하고 지겹고 재미도 감동도 없는 것을 기피대상 1위로 생각하는  나는 적어도 몸과 정신의 편안함보다는 몸과 정신의 긴 여정을 택하는 쪽을 택할 것을 알고 있다.  

뻔한  소리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직업활동이라는 것에 있어서 월급의 수준이나 복지 수준, 직장의 인지도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일이라는  행위를 통해 느끼는 자존감, 일상과 더 나아가서는 생 전체에 대한 긍적적인 감정, 나를 성숙시키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시간을 보낼 여유 같은 것들이지 않을까. 물론.. 물론, 내가 원하는 직장에 한번에 턱 붙어서 다녔어도 그 나름대로의 환경에서  좋은점도 많았겠지만, 더이상 내가 원했던 직장들을 생각하면서 속이 쓰리거나 같이 공부해서 붙은 친구들을 질투의 대상으로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평가하는 말들이나 의미없는 서열들에 관심을 가지거나 하는 일은 없다. 지금 나의 상황에 너무 만족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내가 생각했던 인생과 다른 인생을 살 수 있게된 계기가 되었으니, 그래서 조금 더 많은 감정들과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어서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내게 더 좋은 시간들이었다. 

지금  취업이라는 구렁에서 온갖 스트레스와 감정의 요동을 겪고 있는 이들도 모두 언젠가, 시간이 많이 지난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그 때 차라리 그 회사에 들어가지 않은게 참 다행이다..불합격 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자신의  일상 속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곁으로 들어가서 각자 나름대로의 평안과 행복을 찾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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