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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짱구아빠 Aug 28. 2019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장 지글러

리뷰작성자 개미

함께 모여 책을 읽고 자유롭게 글을 씁니다. 모두의 독서생활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북클럽 #책갈피

                    



 나는 보통 책을 사서 읽는다.  다시 파는 책도 없다. 책장에 꽂혀있던 책이 문득 눈에 들어올 때면 그 기억이 떠오를 때가 있다. 그래서 좋았든 아니든 다 남겨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대학생때는 그렇지 못했다. 과외로 먹고 살던 시절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책을 쌓아둘 공간이 없었다.



 얼마 전 서점을 들러 책구경을 하다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대학시절 읽었던 책이다.  입학 당시를 회상해보면 우리나라의 7%의 경제성장은 국민들에게 환상이 아니었다. 그 것은 지도자가 능력이 있다면 충분히 이룰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반값등록금, 대학생과 청년들의 주택마련 요구가 현실정치에서 논의되던 시기. 그러니까 고도성장의 향수와 복지확충이라는 현실이 공존하던 때였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정치가들과 소수의 자본가들에 의해 제 3세계의 기아가 사라지지 않는 이유들을 설명한 책이다. 성장과 분배의 논의가 정치공학과 시민사회의 담론으로 모양을 달리하여 논의되던 시절 읽었던 책. 가뜩이나 지금보다 세상을 보는 눈이 훨씬 단순했던 탓에 감정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났다. 



 매대에 놓여있는 책을 보며 괜시리 감상에 빠져있다 보니 저자의 신간이 눈에 들어왔다.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지금의 나라면 이 책을 어떻게 읽을까. 장 지글러의 주장들이 어떻게 들리고 다가올까. 궁금했다. 대학생때와 다르게 그 날로 책을 사들고 와서 읽었다.




 


너무 오래전에 빌려 읽은 탓에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는 근거와 통계자료가 꽤 있었던 책이었던 것 같다. 이번에 읽은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라는 책은 통계와 근거보다 저자의 주장이 많이 담긴 책이었다. 일단 책의 이야기 방식도 손녀와 저자가 대화하는 방식이다. 



 책의 이야기를 나름대로 단순화하여 정리해보자면.




1. 시민혁명에 의해 봉건질서가 붕괴되었던 시기. 인간의 기본권들이 논의 되었던 계몽주의 시대. 새로운 세상이 열리던 그 때에  '사유 재산권'이 인정되면서 부터 자본주의 안에 '불평등'이 내재되었다. 오늘날의 불평등은 예견된 결과이다.   



2.  역사적으로 북반구에 살고있는 국가들은 남반구에 살고있는 국가들을 착취하면서 성장해왔다. 그 것은 현재도 마찬가지다. 부의 집중은 날로 커지고 있고, 이익을 쫓는 행위는 자유쥬의자들의 주장과 달리 무제한적이고 탐욕적이다. 기술의 발달로 인해 더욱 부유한 세상이 되었음에도 수 없이 많은 인류가 가난과 고통 속에 있다. 자본의 논리 앞에 환경파괴 역시 심각한 수준이다.    



3. 이러한 세계질서는 소수의 자본가들에 의해 정립되고 있다. 다수의 사람들은 현재의 시장흐름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질서는 막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광범위한 로비활동, 이미 있는 축적된 자본의 힘을 이용한 시장에서의 우위 선점. 신자유주의적 자본 흐름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기, 조세 피난 등 '불평등' 속에서 그 들은 더 많은 이익을 취하고 지위를 공고히 한다.  



4. 봉건주의적 질서가 무너져내렸듯 지금의 체제역시 파괴될 것을 믿는다. 새로운 세상을 위한 움직임이 있다고 본다. 노예제도가 없어지고 여성의 참정권이 이루어졌듯 당시에는 불가능할거라 생각했던 일들이라도 이루어 질 것이다. 다만, 그 형태는 어떤것인지 알 수 없다. 그 것은 현체제가 붕괴된 뒤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 책을 두고 선동적이라거나 포퓰리즘이라고 말할 사람이 많을지도 모르겠다. 이상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얼마전 봤던 어떤 책리뷰에서는 앞으로 '어떤 체제가 올지 모른다.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라는 저자의 말을 두고 '열린결말이다. 대안없는 비판. 감성에 호소하는 책'이라 말하는 것도 보았다. 



 저자는 지금의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인간 이성에 대한 모욕이라고 한다. 해석하자면  봉건사회를 파괴한 뒤 그 곳을 채웠던 인간의 이성. 즉 계몽주의에 비춰 볼 때 '올바르지 못한 일'이라는 뜻이다. 마치 '노예제도'나 '여성과 흑인의 참정권' 처럼 언젠가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물러나고 보다 더 평등한 부의 분배가 이뤄지는 세상이 올 거라고 말이다. 그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에.




 

사실 잘 모르겠다.  '옳다 그르다'에 대한 가치 판단은 차치하고 '노예제도', '여성의 참정권'과 달리 '보다 평등한 세상'은 그 전선이 너무 넓다. 노예해방과 여성의 참정권은 단일한 구호가 만들어 질 수 있다. 그리고 '선 vs 악'이라는 직관적 대비구도를 짜기도 쉬워진다. '보다 평등한 세상'에 관한 논의는 이와 조금 다르다. 극빈층을 위한 사회보장제도 마련의 사회적 합의는 수월할 것이다. 하지만 인구 전반에 걸친 분배의 문제에는 얽혀있는 맥락이 너무 많다.    



 착실히 논의를 쌓아가며 주장한 이 책의 마지막 결론도 '대안없는 비판'으로 읽히는 세상이다. 저자의 말은 큰 방향성을 갖고 나아가면서 디테일을 쌓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단순한 문장에도 오해가 쌓이기 마련인데, 불평등에는 훨씬 더 많은 층위가 쌓여있다. 다양한 측면이 복합적으로 얽히기에 맥락화의 함정에 빠지기가 너무나 쉽다. 거기에 공산국가의 몰락이라는 역사와 매카시즘이  존재하는 한 평등에 관한 논의는 어느새 본질을 잃고 진영대립이 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새로운 세상을 향한 분배의 논의는 지금까지 인류가 발휘해 온 이성보다 한 차원 높은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이 시대의 중대한 문제들은 그 것을 만든 사람과 비슷한 수준으로 생각해서는 풀릴리  없기 때문이다



 우선은 '성장과 분배'라는 고전적인 사고방식에서 탈피해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이뤄진 노동환경의 변화들은 단순히 '인간다운 삶'이라는 당위성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휴식과 자율이 기업의 생산성 향상에 긍정적이라는 연구가 없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일들이다. 성장과 분배라는 이분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차원에서 자원의 분배와 사회의 성장을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사회적 논의들이 본질을 잃은 채 표류하지 않을 것 같다.      





인종, 장애, 국가, 출신, 민족, 종교 그리고 사상까지. 그 어떤 이유에서건 인간은 항상 차별을찬성해왔습니다. 그래야 이 전쟁같은 세상에서 자기가 조금 유리해지니까. 본능이죠. 

사람이니까 그 말을 함부로 입밖으로 꺼낼 수 없겠죠. 차별에 찬성한다는 말을 감히 할수가 없으니까요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 중-



  다시금 대학 입학 당시를 떠올려 본다. 경제 성장률 7% 달성. 이미 체급이 어느 정도 커진 우리나라 경제수준에서 달성하기란 쉽지 않은 수치다. 하지만 그 때 우리는 그 것이 가능하리라 부푼 꿈을 꿧다. 지난 고도성장기를 회상하며 그 향수에 젖은 채.  



 생각해보면 그 향수라는 것도 참 불평등한 것들이다. 고도성장기의 이면에는 열악한 노동 환경과 주거에 내몰린 채 절대적 빈곤과 싸워야만 했던 수 많은 이름없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것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는 열악한 현실은 체감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인간이란 현재 보이는 것이 세상의 전부인 존재들이다. 그런 존재들에게 주위를 살펴보자고 한들 그 목소리가 잘 들릴까. 무엇보다 내가 사는 세상의 풍경도 답답하고 막막한데. 



 책에서 말하는 불평등에는 감정적으로 공감하지만 처한 현실은 녹록치 않다. 무엇보다 먹고살기 바쁘다. 조선시대 왕보다 더 높은 소비를 누리면서 산다 한들 그런 것들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런 위로의 말보다 현실적으로 남들만큼 누리고 살고 싶다. 아니다. 남들보다 조금은 더 누리고 살고 싶다. 부의 간극은 줄여나가는게 맞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가진 것들은 조금이라도 뺏기고 싶지 않은게 솔직한 심정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차이는 두고 싶지만, 내가 차별의 대상은 되고 싶지 않은게 보통의 솔직한 마음아닐까. 그 다음의 행동은 각자마다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냥 개미처럼 살려고 한다. 그저  주어진 하루하루에  충실하면서,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면서 그렇게 앞만보고 묵묵히 살아가려고 한다. 한편으로는 극적인 부의 축적을 꿈꾸지만, 함께하는 공동체에 헌신을 꿈꾸기도 하는 삶.  그렇게 한마리 개미처럼 살아야겠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란 무기력과 싸우면서 말이다.        



신자유주의는 정복의 무기이다. 신자유주의는 시장에 맞서는 그 어떤 저항도 무용하다는 경제 숙명론의 도래를 예고한다. 신자유주의는 피해자들의 면역체계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에이즈와 비교할 만하다. 이 말은 곧, 신자유주의자는 피해자에게 자신의 무력함을 주입시킨 다음 그를 완전히 마비시킨다는 뜻이다.


자본주의 생산 방식은 날이 갈수록 부자들의 자유는 눈에 띄게 확대해주는 반면, 가난한 자들의 자유는 그에 비례해서 극적으로 축소해버린단다. 불평등뿐만 아니라 생산물의 잉여 가치를 공유하지 않고, 재분배하지 않는데서 자본주의 생산 방식의 기막힌 효율성이 태어나는 법이니까. 


빚이야말로 이 세상의 식인적인 체제와 모든 세계화된 소수 금융 자본 지배자들의 세력을 공고히 해주는 결정적인 무기라는 사실이다.

                        

나는 반계몽주의,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시장의 힘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소비자들에 대한 조종 행위 등을 인간의 이성에 대한 모욕이라고 받아들인다.








by. 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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