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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짱구아빠 Sep 10. 2019

『인류의 기원 』, 이상희, 윤신영 (1)

리뷰 작성자 :  Operarius Student

함께 모여 책을 읽고 자유롭게 글을 씁니다. 모두의 독서생활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북클럽 #책갈피



 전공 도서만 보다보면 이따위 것들이 모두 시시해지고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전공과 겹치지 않는 분야의 대중서적이 정말 재밌게 읽힌다, 어중간하게 걸쳐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아예 정반대편에 있는 그런 책들을 본다, 예를 들면 물리학, 생물학 같이 역사학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전혀 없어 보이는 분야의 책을 고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밖에도 유용한 아이디어를 얻곤 한다, 『인류의 기원』'도 그렇게 읽게 된 책 중 하나다, 『인류의 기원』의 서평은 이 책에서 내가 얻었던 자극들에 대한 언급, 바꿔 말해 내가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들을 보는 이유로 갈음하면 될 것 같다.



역사학의 주된 관심사는 당연히 역사시대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선사시대가 있다, '선사시대-역사시대'라는 명칭은, 일종의 이형태가 될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 하나를 꼽으라면, '자연상태-사회상태'가 있을 것이다, 물론 선사시대와 자연상태가 완전히 겹쳐질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선사시대는 분명히 실재했던 시공간이지만, 자연상태는 상정된 시공간이기 때문이다, 다만 각각 역사시대와 사회상태의 대립항이기 때문에 아울러 묶일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구분은 역사적(과학적‧생물학적)이기도 하며 은유적(사회적)이기도 하다, 역사적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들은 연속적인 단선을 전제로 하는 반면에, 은유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불연속적인 혼재를 전제로 할 것이다,



시간적인 불연속성 위에서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나타난다, 예컨대, 자연상태를 표현하는 유명한 경구 "Homo homini lupus"는 사회상태에서도 시대를 불문하고 (절대적으로 평등한 상태에서) 각자도생하는 상황이라면 은유적으로 붙일 수 있는 표현이다. 바꿔 말해, 현재의 사회현상을 분석하고 규정하는 데에 상상의 선사시대가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뒤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내가 굳이 『인류의 기원』이라는 고인류학 책을 읽게 된 이유이다. 이 말인즉슨, 나는 은유적으로나마 ‘선사시대’와 ‘역사시대’가 공존하고 있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역사학 전공자로서 이러한 생각을 가지면 꽤나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이 난관을 순차적으로 풀어서 설명해보자면, 가장 먼저 인간의 지위가 애매해진다. 구체적으로 ‘인간’과 ‘인류’ 사이 시간적인 격차가 무의미해진다. ‘인간’과 ‘인류’는 의미와 용례가 미묘하게 다르다. 사전적인 의미로 봤을 때 인류란 생물학적인 용어로, “사람을 다른 동물과 구별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다. 이에 비해 인간은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이라고 되어 있다. 특히 ‘인류’와 ‘인간’ 사이 반의 관계를 의심할 정도로 엇갈리는 핵심 지점이 바로 동물과의 구별이다. ‘인류’의 경우, 사전적 정의 말마따나 이것은 ‘이르는 말’이다.


 사실 동물과 큰 구별점이 없는데 굳이 ‘인류’라고 일컬어 여타의 동물과 구분한다는 이야기다. 또한, ‘인류’라는 단어는 시간성이 배제된 단어이기 때문에, 특정 시대의 사람들 가리킬 때에는 ‘고인류’, ‘현생인류’와 같이 시기를 따로 명시해준다. 이에 반해 ‘인간’의 경우, 애초에 동물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특징을 전제로 하는 단어다. 따라서 휴머니즘은 인류중심주의가 아니라 인간중심주의로 번역된다. 휴머니즘은 인간이 특별하다는 의식에서부터 출발하며, 그러므로 휴머니즘의 태동은 그 자체로 시간성을 가진 하나의 역사적 현상이다.



 정리하자면, 시대와 무관하게 동물에 속하는 하나의 종으로서의 의미인 ‘인류’와 별개로, 특정 시점, 이를테면 언어를 사용하고 사회를 이룬 시점 이후부터만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봤을 때 선사시대의 ‘인류’와 역사시대의 ‘인간’은 단선 위에 순차적으로 놓이며, 인류라는 종의 진보를 부각한다면 ‘인류’가 ‘인간’과 공존하거나 뒤이어 나타날 수는 없다. 그런데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일종의 은유로 본다면 ‘인류’와 ‘인간’가 병존할 가능성이 생기고, 둘 사이 강고한 선후관계가 무너져버린다. 동물과 뚜렷한 구별점을 갖지 못한 집단과 동물과 이질적인 특징을 가진 집단 사이 경계가 모호해짐과 동시에 마침내 인문학을 지탱하는 핵심 키워드인 휴머니즘이 토대부터 흔들리는 것이다.



 “자연은 귀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습니다.”(38쪽)라는 문장이 있다. ‘인류’와 ‘인간’을 분명히 구분하는 휴머니스트들은 이 문장을 이렇게 바꿔서 읽을 것이다. “인간은 귀한 에너지를 일부러 낭비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습니다.” 외부의 환경과 무관하게 발휘될 수 있는 인간의 의지와 능력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즉, ‘인간’을 자연 바깥에 두고 대결하는 구도를 상정하며 ‘인간’의 최종 극복 또는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반면에 ‘인류’와 ‘인간’을 분명히 구분하지 않는 집단들, 예컨대 생물학자나 경제학자들은 자연을 인류로 바꿔서 “인류는 귀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습니다.”라고 써도 어색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인류 또한 자연의 일부로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의 질서에 압도당하기 때문이다.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은유를 수긍하고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받아들인다면, 이는 곧 모든 인간의 특별함을 인정하지 않고 어떤 ‘인간’은 ‘털없는 원숭이’로 전락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그렇다면 앞서 말했듯 은유로서의 구분을 다소 긍정하는 나는 휴머니즘을 포기해야 옳을 것이다. 불감청고소원이라고 사실 요즘 휴머니즘에 대한 믿음이 신실하지는 못하다. 주체철학을 반박하는 책들을 유독 재밌게 읽었던 경험도 하나의 이유겠지만, 무엇보다도 요즘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사람들이 인간됨을 외면하고 자랑스레 ‘인류’의 길을 택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운운하는 뭇사람들의 ‘쿨함’이 처음에는 염증으로 다가왔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수긍을 한 상태이다. ‘인간’의 실격, 이것도 하나의 역사적 현상이며,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By. Operaius Stu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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