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의 기적 - 정수

모든 것은 이 날을 위하여

by YeonJeong

11월 15일, 수능 예비소집일, 어디선가 첫 눈이 온 날, 누군가는 사랑을 시작하고, 또 누군가는 사랑을 정리하는 날, 그리고, 나의 디펜스 당일.

지난 5년, 6년, 8년, 12년의 기억, 추억, 회한, 감상 따위가 밀려들 법도 하지만, 긴장이 감상을 말려버린다. 자신의 연구는 자식같다는 말이 있다. 아직 자식을 낳아본 적이 없어서 오히려 일반적인 감상에서 다소 멀어지지만, 글쎄, 처음에는 누군가 싶다가, 어느 순간 의무감에서 비롯된 관심이 내 삶을 뒤덮다가, 한 때는 그렇게 못나보이고 밉다가, 언젠가는 단점을 포함한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되고, 마지막에는 그를 통해 모든 것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기가 막히게 맞는 비유이다. 나는 지난 5년 간 3편의 아이를 만났다. 2019년 스승님과 함께 만난 첫번째 아이는 내 부족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아이였다. 한번 제대로 가본 적도 느껴본 적도 없는 이역만리 타국을 마음으로 이해하는 건 지금으로서도 벅찬데 그 때는 오죽했으랴. 자그마치 4년을 엎어치고 메치며 포기를 염두에 둔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스승님이 아니었다면, 빛을 보지 못했을 친구다. 2020년 말에 만난 두 번째 아이는 날 때부터 좀 못나게 태어났지만, 자라기는 잘 자란 아이다. 스승님께서 보시고 '쟤는 일찌감치 평생 먹고 살만한 기술을 가르쳐 보렴.' 조언을 하신 셈인데, 모든 상황이 맞아 떨어진 셈이다. 가장 최근에 만난 아이는 스스로를 잘 꾸미는 아이다.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을 줄 알게 태어났으며, 아직 여물지 않아 깊지는 않아도 예쁨받는 방법을 몸소 가지고 태어난 아이다. 이제 이 세 편의 아이를 옹기종기 데리고 '얼마나 잘 키워왔나 보자~' 눈을 번뜩이는 마을 어른들께 나아가는 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학위심사라는 공식적인 명칭을 쓰지만, 영어로는 디펜스(defense), 즉 방어전이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말인 '심사'보다는 영문명칭인 'defense'를 조금 더 좋아한다. 말 뜻을 한번 곱씹어보면, 지원자(applicant)에 대한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심사(審査)는 말대로 살피고 조사하여 당락을 결정짓겠다는 뜻이다. 이 행위에 대상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 최선을 다해 내가 열심히 준비한 것을 발표하고 나면, 심사는 위원들의 몫이다. 대상자는 단지 기다릴 뿐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은 반대로 말하면, 내가 할 일을 다하고(盡) 나면 그 뒤에 할 수 있는 건 기다릴(待) 뿐이라는 뜻이다. 최선을 다하라는 격언이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수동적인 모습이 기다리고 있다. '심사'라는 말이 이런 면에서 동양예법의 근본을 반영한다. 디펜스는 아니다. 적극적인 모습이 말에 담겨 있다. 그 동안 열심히 연구한 내용에 대해 학계 전문가들이 학문적 엄밀성, 주제의 적합성, 기존 연구와의 일관성 등에 대한 총체적인 질문을 던지면, 지원자(applicant)는 수용할 내용은 수용하고, 설명할 내용은 설명하면서 논리적인 방어를 한다. 일종의 설전이다. 마치 철저하게 예의를 지키면서 동시에 지원자에게 박사가 될 자격을 증명하라는 난장이다. 亂場이 亂杖이 되지 말기를 바라며 필사적으로 준비한다.

학위심사(Defense)는 학자들의 초대이자 환영회이다. 학위심사를 통과하면 개념적으로라도 학생에서 동료로 바뀐다. 남은 학생의 시간은 행정절차와 미처 이루지 못한 학생으로서의 마무리의 시간이다. 과도기다. 이제 더 이상 학문적 미성년자가 아니다. 머리를 틀어올리는 관례(冠禮)다. 그때부터는 교수님들도 동료 학자에 대한 예를 갖춘다. 호칭도 바뀐다. 하지만 어른이 마냥 좋아보이기만 한다면, 그것은 아직 어른이 될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얘기다. 박사모가 그렇게 탐나기만 한다면, 그것은 자격 미달이다. 나도 Mr. 보다는 Dr. title을 달아보고 싶어서 시작한 게 있다. 크다. 사실, 엄청나게 크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 것도 모르는 치기. 일전에, 절친한 누나이자 나보다 1년 먼저 박사를 마친 동료 박사님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서 "이건 그냥 뇌피셜이지만," 이라고 겸양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물린 적이 있다. (이때는 둘다 박사가 아니었다.) 나는 즉시로 말을 끊고 대꾸했다.

누나, 박사학위의 의미가 '너의 뇌피셜을 존중해주겠다.' 아닌가요. 자신있게 말씀하시죠!

꽤나 시건방진 말과 태도였지만, 그만큼 꽤나 인상적이었나 보다. 이제서야 감상에 빠지는 말이지만, '뇌피셜'이라는 현대적 조어법을 잘 이용하면서 박사학위의 본질과 의미를 잘 설명한 순간이 아닐까한다. 박사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제시하도록 요구받는다. 그 자격이 됐는지 확인하는 축제의 자리이다.

도전적인 방문을 시작했다. 원래는 맏이부터 소개를 하는게 모두가 생각하는 순서겠지만, 막내를 먼저 데려나갔다. 첫째, 둘째가 못나서가 아니라 셋째가 세상에 나온지 얼마 안 돼 농도 짙은 사랑을 주고 싶어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나를 몰랐던 게 아닌가 싶다. 나는 첫번째 시도에서 성공한 예가 드물다. 수능도 첫번째는 대차게 실패했고, 박사 논문도 첫번째 아이디어는 마음 속에 묻어둘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 첫번째 발표 논문을 미처 익지 못한 아이를 데려나갔을까.

처음에는 피아식별을 완전히 실패했다. 교수님들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질문을 논리에 대한 지적이라 착각하고, 미처 벼리지 못한 칼을 정신없이 휘둘렀다. 제대로 눈을 뜨지도 않고 허공에다 휘휘 휘두르는 모습이 가히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급기야 스승님께서 중재에 나섰다.

인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맞는 말씀이에요. 맞는 말씀하시는 거예요.

번뜩 눈이 떠졌다. 내가 뭘 하고 있는거지? 냉큼 "맞습니다!" 소리지르듯 수용하고, 발표를 이어나갔다.

앞서 예쁘다예쁘다 말했지만, 언뜻 아직 태어나지 얼마되지 않은 늦둥이라 깊이가 부족하다고 한 말대로 논문의 과학적 엄밀성에 대한 지적이 이어졌다. 한 교수님의 구체적인 예시를 통한 타당성에 대한 지적이 뼈아프게 날아들었다. 다시 한 번 글의 흐름을 지엽으로 날리자면, 과학자들은 다소 억울할 때가 있다. 일반적으로 주장(법정에서의 주장 등)은 논증의 책임을 주장하는 자에게 부여한다. 어떤 사실을 주장하는 자가 그 주장의 근거를 적절하게 제시해야 그 주장이 신빙성을 얻고 받아들여진다. 그러한 점에서 학계는 다소 가혹할 때가 있다. 주장을 들고 나온 사람(여기서는 학위심사 대상자)는 본인이 주장하는 바에 대한 근거를 스스로 제시하여야 한다. 이것은 당연하다. 다소 억울하다고 하는 점은, 내 주장이 틀리지 않았냐고 하는 청자의 주장에 대해서 청자가 논증할 필요가 없다. 단순한 의문제기가 청자의 역할의 끝이다. 그러면 주장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음을 논증해야 한다. 모든 논증의 책임은 주장하는 사람에게 귀속된다. 그럼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청자가 애써 의문에 대한 논증을 제공하기 시작하면, 주장을 들고 나온 사람은 한없이 고통스러워 진다. 의문제기만 해도 발표자는 숨이 막히기 시작하는데, 그 의문제기가 구체적으로 칼날을 벼리기 시작하면 발표자는 속으로 '제발 그만해주세요.' 기도하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진인사대천명이 아니다. 천명을 기다리다가는 내년 디펜스를 기약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붙어 싸워야 한다. (이런 면이 '학위심사'보다는 'defense'가 더 적합하지 않나 하는 것이다.)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전문가의 폭넓은 배경지식에서 나오는 구체적인 예시는 나도 내 주장이 틀린게 아닐까 의심하게 만들었다. 나름대로 최선의 설명을 하려고 했지만 한 교수님은 개운하게 납득하지 못하셨고, '발표 후반에서 다른 근거를 제시하겠습니다.'하며 꽁무니를 내렸다.

'발표 후반'을 결론 뒤로 넘겼다. 사실 사회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을 자랑하기 위해 결론에 공을 들였는데, 앞서 넘지 못한 타당성 논쟁에 막혀 시간만 잡아먹고 있었다. 스승님께서 "마지막으로 IV 한번 소개 해보시죠." 발표의 키를 잡아주셨다. IV가 먹혀 들어가는 눈치이다. 꽤나 강력한 도구지만, 얻을 수 있는 정보의 한계를 염려하며 부록으로 빼둔 게 먹혀들어가는 중이다. 한 교수님의 표정이 다소 풀려가면서 내 마음에도 춘풍이 날아들었다. 며칠 전, 스승님께서 "그걸 주장할거면 appendix로 빼더라도 슬라이드는 만들어둬야지."라고 조언해주신 것이 마지막 단계의 안전장치마냥 곤두박질치는 나를 잡아냈다. 이제야 교수님들이 웃기 시작하고, 한숨 쓸어내릴 수 있었다.

사실 과학자로서는 기왕 맞을 매를 일찍 맞은 셈이다. 셋째가 아직 내 눈에 예뻐 보이는 이유는 반대로 말하면, 아직 못난 모습을 볼 만큼 연구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반대로 첫째와 둘째는 만난지가 오래되어 서로 알만큼 안다. 첫째는 워낙 많이 헤매고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던지라 생각만 해도 애잔하기 그지 없다. 처음에는 고양이를 그리려고 시작했다가 1차 수정, 2차 수정, ..., n차 수정을 거치고 나니 고양이의 머리에 코끼리 코가 달려서 빙글빙글 돌아가고, 앞다리 대신에 오토바이 바퀴가 달려 있으며, 꼬리에는 리본 대신 멋진 최신 전투기 모형이 달려있는, 그야말로 기괴한 '뭔가'가 그려지는게 논문작업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첫째가 딱 그런 녀석이다. 하지만 그 '뭔가'는 여전히 뛰어와 고양이같은 애교를 부린다는게 내 연구라는 변치않는 사실이다. 참 슬픈 시행착오의 결정체가 첫번째 논문이다.

'서로 알만큼 안다.' 라는 말은 이 연구도 나를 어느 정도 안다는 뜻이다. 데이터라는 것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수십 페이지의 영어로 된 자료설명서(data dictionary)를 제대로 읽지도 않아 출판사(journal)에서 평가절하를 당하기도 하고, 전혀 경제학적이지 않은 방법론을 따라다니다 1년을 허투루 낭비하기도 하며, 내가 쓰는 방법론의 이름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해 급기야는 스승님께서 직접 교과서를 뒤져 찾아오시기도 하는 등, 논문의 입장에서도 참 애처로운 연구의 역사라 한다. 연구가 가끔 나에게 가끔 말을 건다. "잘 좀 해봐. 이 모지리야."

기괴한 '뭔가'라고 폄하아닌 폄하를 했지만, 가장 많은 시간을 고민한 연구이기도 하다. (3개의 학위논문 중 스승님과 협업한 유일한 연구이니 애초에 폄하를 하는 것도 대단히 경솔한 언사이다.) 21세기 초 응용계량 분야에서 주제를 초월하여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방법론을 적용한 논문이며, 현재 학계의 첨단(frontier)에서 논의되고 있는 방법론의 이슈들을 모두 고민한 결과이다. 시각적으로도 결과를 잘 보여주었기에, 연구의 역사를 알고 있는 내 눈엔 '뭔가'지만 청중에 보기에는 그 결과물이 그럴싸한듯하다. 그리고 학과 세미나, 학위논문계획서 심사 (프로포절) 등 심사위원들께 이미 수 차례 소개한 연구이기도 하다. 큰 걸림돌 없이 발표가 진행되었다.

그러다보니 둘째 논문이 마지막 발표 차례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당히 많은 감정이 올라온다. 둘째의 자리는 언제나 불만족스럽다. 올림픽에서도 환호하는 금메달과 기뻐하는 동메달은 있어도 만족하는 은메달은 찾기가 힘들다. 첫째는 집안의 대들보로 온갖 기대를 받고, 막내는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지만 둘째라는 위치는 여러모로 불만족스러울 때가 있다. 우리 둘째는 어떤가. 둘째 논문의 입장에서 어떤 불만족스러움이 있을까.

국내 연구를 하나는 해보는게 좋겠다. 사실 사회과학이라는게 그렇다. 아무리 연구자가 똑똑하다고 한들 그 사회에 직접 사는 사람이 피부로 예민하게 느끼는 것만큼 그 사회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이 한국에서 미국 사회를 느낀다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한국 연구를 해보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동기에서 한국의 부동산 시장에서 주제를 잡으려고 했다.

연구는 가끔 보면 사람같다고 생각될 때가 많다. 생후 두세시간만에 일어나서 걷는 야생동물과는 달리, 사람은 걷는데까지만 해도 1년이 꼬박 걸린다. 한 사람이 사회 구성원으로 제 역할을 다하기까지 제도권이 보살피고 기다려주는 시간은 장장 20여 년을 필요로 한다. 논문도 그렇다. 한 번에 툭하고 나오는 논문은 본 사례가 없다. 별의 별 이유로 고꾸라지고 엎어진다. 한국 부동산 시장을 관찰하겠다는 연구도 엎어지고 넘어지기를 반복하다가, 까짓거 기본으로 돌아가자 싶어 하게 된 연구가 이전 정부의 부동산 정책의 효과 분석이다. 앞서 '날 때부터 조금 못났다'라는 말은 딱히 주제가 학문적으로 재밌지도 않고, 자칫하면 다른 이에게 오용될 수도 있는 여지도 있다는 뜻이다. 심지어 반짝거릴지도 모르는 다른 주제가 자료의 한계로 엎어지고 난 직후에 포기하듯 선택한 주제였기에 내심 불만은 가득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작업을 하면서 가장 값진 두 개의 기술을 배운 논문이기도 하다. 첫번째, 매칭(matching)이라는 방법론을 이 연구를 통해 아주 잘 이해할 수 있었고, 나아가 부동산 시장에서의 응용에 대한 통찰을 제시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주택 시장의 자료를 깊게 이해하여야 보이는 매칭의 기준이 있다. 이에 대한 기준을 제시하는 방법론 논문이다. 두번째, 주택법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었다. 우스갯소리로 '주택법 63조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 알아'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책은 결국 법을 근간으로 할 수 밖에 없기에, 내가 연구하고자 하는 정책의 기초가 되는 법을 수 백번은 읽었을 것이다. 어찌나 읽었는지 행정부에서 업무에 도움이 되라고 만든 업무편람에 미세하게 틀린 점도 찾아낼 수 있는 정도였다. 나아가 그 법 조항의 개정의 역사를 다 봐야했기에, 몇 년 몇 월에 법 조항의 표현이 어떻게 바꼈으며, 시행규칙에서 시행령으로 법 조항이 옮겨진 것도 찾아내는 정도였다. 더군다나 내 학위 논문은 영어로 작성하였기 때문에, 관련 법 조항을 전부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도 필요했다. (도대체 '소급하여'라는 법 조항의 표현은 영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법제처의 외국어번역 서비스가 없었으면 지금도 아찔하다.) 오죽했으면, 주택법 63조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 안다고 단언하였겠는가.

연구자로서, 그리고 과학자로서, 철저하게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아니, 처음에는 자극적인 결론을 마음에 품고 시작했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햇병아리 연구자의 실수가 있다. "너네 다 틀렸어. 내가 그 논쟁을 평정해주마." 오만함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는 당연히 그런 실수를 했고, 당연히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두번째 연구를 발표하고 결과를 그림으로 제시하는데, 인 교수님께서 감탄을 연발하신다. 경제학 이론 분야를 오래 연구하신 인 교수님의 눈에는 매칭이 일종의 miracle로 보이시나보다.

실증연구 방법론을 잘 모르는 제 눈에는 기적처럼 보입니다.
- 아 그렇습니까. 혹시 의문이 드는 부분이 있을까요?
아뇨. 놀라워서 그럽니다. 어떻게 저렇게 결과가 확 바뀔 수 있을까요.
- 음.. 그래서 Heckman이 노벨경제학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Heckman이 이걸로 노벨상 받았거든요.

모든 교수님이 폭소했다. 내가 바라는 디펜스는 축제였다. 기나긴 학생의 신분을 마무리하고 학자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순간이다. 축제라면 자고로 즐거워야 한다. 웃음이 가득하고, 도끼눈을 뜨고 들어오신 교수님들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발표를 즐길 수 있어야 그 축제는 성공이다. 나는 그 축제의 호스트다. 그래서 나의 디펜스는 얼마나 많이 교수님들께서 너털웃음을 터뜨리셨는지가 관건이다. 교수님들의 파안대소에 나는 성공을 기대했다. 인 교수님께서 경상도 어투가 가득한 영어로 축제의 흥을 돋우셨다.

I like matching!

그 뒤에 아기자기하게 준비한 여러가지 결과들로 두번째 논문을 성공적으로 발표할 수 있었다. 자료의 오염(contamination)으로 관찰이 제한적이었던 것을 불완전하지만 관찰하는 방법을 찾을 것을 스승님께서 재치있다고 평가해주셨고, 그 때도 인 교수님은 매칭에 잔뜩 반한 표정으로 흐뭇하게 바라봐주셨다.

발표가 마무리 되어갈 때쯤, 질문 두 개가 날아들었다. 하나는 매칭 방법론을 아주 잘 아시는 한 교수님의 기우에서 나온 "여러가지 매칭 다 잘 해보셨죠?" 하는 확인의 질문이고, 다른 하나는 매칭 방법론이 익숙지 않은, 하지만 아주 호의적이신 인 교수님의 "매칭을 하는 기준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있나요?" 하는 호기심의 질문이었다. 두 질문의 본질은 동일하다. 매칭을 하는 기준에 대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다양한 매칭 방법론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결과를 얻어야 그나마 믿을 만하다.

하지만 나는 "확실한 기준이 없는게 매칭의 단점입니다. 그래도 다 해봤습니다."라고 말을 맺기에는 억울하다. 애초에 "다 해봤어요." 라는 근거없는 말은 내가 청자라도 안 믿는다. 나는 주어진 시간의 제약으로 건너뛴 5분 분량의 매칭 방법에 대한 통찰을 지금이 기회라는 듯 설파했다.

제가 이건 진짜 열심히 했다는 자랑을 하고 싶어서 조금만 더 시간을 쓰겠습니다. 5분이면 됩니다. 이게 왜 이렇게 해야되냐면요...

의문을 제기하신 한 교수님께서, 이미 인트로에서 '믿을게요, 믿을게.' 하는 표정으로 즉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시고, 다시 한번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하는 웃음을 터뜨리신다. 인 교수님은 그 와중에도 끄덕끄덕, 심사위원 교수님들 중 가장 연장자이신 교수님께서 대만족을 하시는데 분위기가 좋지 않을 수 없다. 뒤이은 몇몇 질문에도 내가 찾은 방법이 최선임을 납득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내가 준비한 모든 발표는 매듭을 지었다.


"이제 잠시 바깥에 나가 계시면 교수님들과 심사하는 시간을 잠시 가지겠습니다." 위원장을 맡고 계시는 스승님께서 위원회의를 진행하신다. 이제는 어쩔 수 없는 기다림(待)의 시간이다. 휴대폰만 급하게 챙겨서 냉큼 문 밖으로 나갔다. 문이 충분히 두껍지 않아 안에서 진행되는 회의 내용이 들리기에, 내용을 알고 싶지 않아 내부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충분히 먼 곳으로 자리를 옮겨 쪼그려앉았다. 축제에서 심사로 장면이 급격하게 전환되면서 상황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긴장도 별로 되지 않았다.

잠시 뒤 문이 열리고 한 교수님께서 "이제 들어오셔도 될 것 같아요." 불러들인다. 15분 전까지 발표하던 자리로 올라가서 자리를 잡으니, 스승님께서 회의 결과를 발표하신다.

회의 결과 교수님들의 만장일치로 박사학위 심사는 통과한 것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축하합니다. 발표에서 지적되었던 부분은 잘 보완하셔서 학위논문 제출 전에 한번 더 교수님들께 회람하시는 것으로 하고, 심사위원 교수님들께 감사인사 한 번 드리는 걸로 마치겠습니다.

사실 "축하합니다." 뒤는 잘 안들렸다. 그래도 끝났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정리된 소감을 발표하기보다는 연신 "감사합니다" 외에는 나오지 않았다. 그 응축된 감정을 담아내기에는 "감사합니다." 라는 다섯 글자는 역부족이다.

교수님들께서 퇴장하시면서 그 감정을 내가 모르겠냐는 듯 한마디씩 어깨에 툭툭 얹어주신다.

나 박사님, 축하드립니다. 다른 게 아니고 다음 주에 MBA 회식이 계획돼 있는데...
아이구 나 박사님, 악수 한번 하시죠. 고생하셨습니다.
예 교수님, 우리 나 박사님하고 잠깐 얘기 좀 하고...

스승님마저 '나 박사님'이라고 우스갯소리를 보태셨다. 자잘한 행정서류를 작성하고 나서도 한참을 몸 둘 바를 모르다가 마지막으로 불을 끄고 나왔다.

저녁 사 줄까요? 다른 일정 있어요?

오늘은 모든 게 잘 풀리는 날인가보다. 미식을 즐기시는 스승님께서 내가 추천한 식당을 마음에 들어하셨다. 스승님의 농도짙은 축하와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는 제자를 향한 격언을 건네셨다. "다른 교수님들께 감사인사드리고, 이제는 구직에 집중하셔야죠. 구직은 야전입니다." 구직은 야전이고, 다가오는 열흘의 신호탄이다.


집에 올라왔다. 딱딱한 구두창을 밀어올리듯 집으로 올라왔다. 어제도 잠을 제대로 못자서 나른했지만, 집에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는 2시 반에 시작해서 두어시간 쯤 걸린댔는데 저녁 8시까지 소식이 없으니 오매불망하신 모양이다. 아버지는 당신의 가장 강렬한 무기, 눈물을 들고 나오신다.

고생했다. 고생했네, 이 사람아.

앞도뒤도 보지 않고 어느 순간 질주하고 있었다. 질주를 하다보면 뒤를 볼 수 없다. 하필이면 부모님은 항상 뒤에 계신다. 앞에 계시면 좋으련만. '좀 집에 전화도 자주하고 좀 의무적으로 집에도 좀 내려와라. 어떻게 너만 생각하니. 집에도 좀 들러서 효도해라.' 이렇게 말씀하시면 좋으련만. '바쁘면 안 내려와도 된다. 너 바쁜 게 우선이지, 우리는 괜찮다.' 괜찮지 않으면서 당신들은 항상 괜찮다. 나도 안 우는 디펜스날에 아버지는 우신다. 아버지의 눈물은 농도가 진하다.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너는 박사 받을 자격이 있니?

"저는 이제 해도 되는 말과 하면 안되는 말을 구분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2023. 12. 15. 그 날의 한 달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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