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의 기적 - 잠열

박사학위논문심사 이전을 톺아보며.

by YeonJeong

격정의 3주일 기록. 두 개의 이벤트: 박사 학위 논문심사(2023/11/15), 모 연구원 지원(2023/11/24). 이 글의 목적은 경험의 공유, 휘발성 정보의 유지, 그리고 수필의 기록. 아마도 오래 뒤에는 내 마음보다 이 경험의 왜곡 없는 기억이 남길 바라며.


2023년의 11월 3일 금요일 밤부터 이야기를 펴본다.

22시 52분. 절친한 김 모 박사가 보낸 하나의 메시지(카톡)에서 모든 일들이 시작한다. 모 처의 연구원의 채용공고가 떴다는 소식과 함께, 공인 어학성적이 있는지 묻는 물음과 함께. 당시의 정황, 주변의 향기가 너무도 생생하고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때 레몬청을 만들려고 레몬 2 봉지를 자르고 있어서 온 내 손은 레몬즙으로 자글하고 내 방은 레몬향으로 가득했기에, 그때의 모든 정황은 지금도 재현할 수 있기까지 하다. 김 박사의 순수한 나에 대한 호의은 그렇게 레몬향기에 섞여 날아왔다.

카톡을 보자마자 스트레스를 받았다. 뭔가가 시작될 것 같고, 그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걱정이 세포단위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물론 김 박사의 전언이 없었다면, 뒤늦게 기회를 놓침을 땅을 치며 후회했을 것이다. 김 박사에게는 저 소식을 전해준 것만으로도 무한의 감사가 아깝지 않았지만 내가 받은 스트레스는 단지 큰 일이 시작하고 있음을 알리는 몸의 반응이었다.

그럼에도 일단 디펜스에 집중을 해야할지 연구원 지원준비를 해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지도교수님께 여쭈어야겠다. 하지만 자정을 어루만지는 시각, 예약메일로 내일 아침 9시 30분을 겨냥하여 짧은 글을 써내렸다.

교수님, 연구원 공고가 떴는데 예정자를 받아주고 핏도 좋습니다. 그런데 디펜스 준비하고 끝나자마자 리비젼하려고 했는데 판단이 잘안됩니다. 어떡해야 할까요.

어느 순간부터,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문자 그대로 표현하는데 능숙해졌다. "어떡해야 할까요."라는 가장 원초적인 질문은 이제는 내 자랑이다.

공인 어학성적이 없었다. 얼마의 성적을 받아야 되는지 급하게 확인했다. 토익 730, 오픽 IH2. 보자마자 드는 생각은 오만함과 무용한 자존심이었다. 나는 영어로 논문을 쓰고, 영어권 학자들에게 미국의 제도를 영어로 설명하는 것이 일인 사람인데, 토익을 요구한다고? 그것도 자존심 상하게 730점을? 하지만 그런 것들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23시가 넘어갈 무렵, 나는 토익, 토스, 오픽의 시험 일정과 성적 발표일을 모조리 긁어모으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오픽은 거의 매일 시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토익, 오픽을 본지 오래돼서 이게 공부를 해야할지, 하면 얼마나 할지, 어떤 날짜의 시험을 보는 것이 최적일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너무 일찍보면 준비가 되지 않아 성적이 낮게 나올 수 있다. 지원서 제출 이전에 성적표가 나와야 하기 때문에 너무 늦어도 안된다. 디펜스 준비도 한참 남았기 때문에 시간을 많이 쓰면 안된다. 최적선택을 하기 위해 정보가 필요했다.


이튿날, 9시 31분 지도교수님으로부터 메세지(카톡)이 급히 날아왔다.

연구원 준비하세요!!

어젯 밤, 9시 30분에 맞춰 예약메일을 보냈기 때문에, 1분 만에 답이 온 셈이다. 평소와 다른 느낌표 두개는 확신의 답문이었다. 굳이 나의 들썩거리는 언어로 표현하면, "고민할 걸 고민해야지. 물어볼 걸 물어봐라, 좀! XX연구원 준비하세요!!"라고 조금 더 부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내가 할 일이 확고해졌다. 냉큼 학교 근처 백화점의 교보문고로 향했다. 온갖 형형색색의 영어시험 관련 서적들이 열맞춰 있었다. 열맞춰 있어도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길게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잡히는대로 참고서 몇권 짚어왔다. 순간순간 소위 현타가 왔지만, 깊게 음미할 새도 없었다.

저녁에 바이올린 선생님의 졸업연주회가 있었다. 이때는 그렇게 바쁘지 않았기에 (적어도 그렇게 착각했기에), 그리고 꽃도 주문해뒀기에, 기어코 나갔다. 비에냐프스키가 도무지 마음에 안드는 찡긋거림이 못내 미소짓게 했다. 연주가 끝나고 "왜 비에냐프스키 끝나고 투덜대세요."하니, "놀리지마세요." 한다.


시간을 잠시 속도감있게 달려보자. 11월 10일, 아침에 찬 바람을 맞으며 삼육대학교 병원 앞에 위치한 시험장에서 오픽 시험을 쳤다. 뭐 이렇게 시험장을 숨겨놨는지, 한참을 찾았다.

11월 12일, 숭인중학교에서 토익을 쳤다. 매번 수영하러 오다가 일요일에 와보니 느낌이 색달랐다. 감독관으로 들어온 선생이 심한 독감을 하나보다. 내장을 끌어올리는 기침을 연발했다. 속으로 후회했다. 아 오지말걸. 괜히 옮으면 디펜스 준비는 어떻게 하며, 앞으로 치러야할 일정에 심각한 차질이 생길 참이었다. 시험을 마치자 마자 휴대폰을 찾아와서 화장실로 곧장가서 비누를 칠해 씻었다. 감기나 독감은 지금으로서는 심각한 문제였다. 본디, 사랑은 여유에서 나오는 법이다. 저 모르는 이를 사랑하기에 나의 오늘 여유가 너무 없다. 불안을 마주하며, 오케스트라 합주를 다녀왔다. 친한 형님이 합주 사이에 '마치고 술 한 잔?' 손짓을 보낸다. 거절하는 법이 없던 내가 오늘은 여유가 너무 없다.


11월 13일, 평생에 기억에 남을 디펜스의 1주일을 시작한다. 아침에 교수님께 일정공유로 연락을 드렸다. '교수님, 디펜스가 지금 급한게 아니에요. 지원서가 급해요. 금요일에 미팅 한번 부탁드립니다.'라는 요지의 메일을 급하게 쓰고, 디펜스 관련 서류를 하나 둘 챙기기 시작했다. 담당 행정 선생님의 메일을 급하게 검색해서 시스템에 하나 둘 등록한다. 서류가 많기도 하다. 종합시험결과보고서, 위원 별 심사요지, 외부전문가 심사료 청구서, 외부전문가 이력서, 외부공저자 기여도 의견서, 학술지 게재 논문, 게재 논문 증빙자료, 지도교수 추천서, 위원별 추천의견서, 학술지 투고 증빙, 박사학위청구논문 심사 개최요청서, 박사학위청구논문 심사 개최요청서, 박사학위청구논문 심사 개최요청서 1부 (소정양식)......?

박사학위청구논문 심사 개최요청서 1부 (소정양식) 심사개최 15일전까지? 이게 뭐지? 언제나 허술했듯, 이번에도 허술했을 뿐이다. 오랜 학교 생활을 하면서 이런 일을 워낙 겪다보니 제출서류를 하루 이틀 넘기는 것은 예사긴 하지만, 디펜스 이틀 전에 '디펜스 15일 전에 제출해야 하는 문서'를 발견하는건 그렇게 유쾌하진 않다. '나'라는 작자의 사람됨을 읽었을 때, 이만큼 준비 해야할 문서의 리스트가 많다면, 하나둘 누락하는 것은 예상할만한 일이었고, 그렇기에 미리 준비하려고 체크리스트를 만든 것인데, 그게 늦은 셈이다. 하지만 놀라지 않는다. 행정실에 느릿하게 걸어가서 특유의 친근함과 반 거짓말로 상황을 파악한다.

선생님~ 디펜스 끝나고 제출해야 되는 서류가 뭐뭐 있죠? 심사결과보고서 1부, 심사요지 5부, 심사료 청구서, 이거는 당일에 하면 되고, 아 선생님 그 심사 개최요청서 그건 프로포절 때 제출한 그것 말이지요?
- OO 씨 어? 그거 디펜스 때도 따로 내셔야죠! 아직 안 내셨어요?

먹힐리가 있나. 두어마디 더 변명을 시도하다가 "최대한 빨리 받아다 드릴게요." 꼬리를 내린다. 하고자 하는 말을 문자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이번에는 한번에 성공하진 못했다. "선생님, 제가 경황이 없어 문서를 누락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받아드리면 될까요? 혹시 큰 문제가 될까요?"라고 말했어야지. 넌 아직도 한참 멀었어.


11월 14일, 디펜스 전날. '차분한 마음으로 준비를 해야지' 하던 계획이 무색하게, 행정업무만 한가득이다. 먼저 내가 누락해버린 심사요청서 서명을 받아와야 한다. 신세대 교수님들은 전자서명을 하신다. 메일로 pdf 문건을 보내드리면 전자서명으로 금새 돌려주신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보안이 걸린 문서라서 전자결재가 안된다며 파일을 수정하여 재송해달라는 요청이 왔지만 어쩌겠는가 졸업관리시스템이 애초에 보안을 걸어서 주는 문서인 것을. 다행이도 오늘은 교수님께서 수업으로 학교 나오시는 날이다. 수업시간에 맞춰 내려가 서명만 후다닥 받았다.

외부전문가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여하시는 스승님으로부터 제자에게로의 정중한 부탁을 받았다.

내일 일찍 갈 예정인데 머무를 공간이 필요합니다.

학교 시설을 담당하시는 행정선생님께 메일을 급하게 보내, 세미나실 하나를 하루 빼달라고 부탁했다. 사정을 충분히 봐주시어 외진 곳에 임시 연구실을 조성했다.

디펜스 장소의 예약은 일찌감치했지만, 컴퓨터를 치워버리면 그야말로 낭패이기에 전산실에 컴퓨터 설치가 필요하다고 신청했다. 온라인 회의가 필요하냐고 하기에 모든 교수님 대면 참석이므로 그것은 괜찮다고 답했다.

점심을 먹고 그래도 망중한을 즐기고자 자주가던 학교 앞의 카페로 갔다. 몸을 한 껏 의자에 녹이면서 휴대폰으로 메세지를 확인하고 있는데, 톡톡 누군가 조심스레 의자에 녹아내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내일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시는 스승님의 사제되시는 교수님이었다. 디펜스 준비가 잘되어가시냐는 얘기, 내년도부터 계량경제학 수업을 맡게 되었다는 얘기, 수업 조교를 나도 잘 아는 아득한 후배가 맡게 됐다는 얘기, 그리고 내가 계량 조교를 맡아주면 참 큰 힘이 될텐데 졸업하게 되어 못내 아쉽다는 얘기에 그만,

갈 사람은 가야지요.

로 대꾸해버린다. 그러면서 아차한다. 이 교수님은 나를 갈 사람이 아니게 만들 수 있긴 한데 말이지. 구차하게 말하는 것도 웃겨서 그냥 잘 봐주시겠거니 뒤통수를 긁적이며 카페를 나간다.

집에와서 보면대를 한껏 높여놓고 패드를 그 위에 올려놓고 스크립트가 입에 붙도록 여러 번 읽는다. 외운다 생각 없이 여러번 읽으면 입이 알아서 움직인다.



2023. 1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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