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다

사람은 호광성 생물이다.

by YeonJeong

가끔 나는 사람에게, 특히 후배나 동생들에게 "너 참 반짝인다."라는 표현을 쓴다. 학창 시절을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반짝반짝 빛나는 친구들이 있었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처음으로 반짝이던 친구는 중학교 때 만난 S이다. 까무잡잡한 피부 때문에 나는 그 친구를 볼 때면 초콜릿을 떠올리곤 했다. 언제나 주변에 친구들이 모여들었고, 공부도 체육도 곧잘 했기에 남중에서는 인기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심지어 그 친구는 과학고등학교로 진학을 해서 2년 만에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연세대로 진학을 한 수재였다. 반면에 나는 재수를 하는 바람에 대학 입학이 2년이나 차이가 벌어졌고, 나는 뒤처졌다는 느낌에 더더욱 보잘것없는 자신을 지켜봐야만 했다.

대학교를 가보니 그런 친구들이 넘쳐난다. 얼굴도 예쁘고 어느 모임에서나 이목을 끄는 친구들이 항상 있다. 어쩜 그렇게 끼도 넘치고 반짝이는지. 눈이 부실 지경이다. 중고등학생 때는 그래도 같은 교복에 같은 헤어스타일로 겉보기에라도 비슷해 보였다면, 대학은 그야말로 자유와 낭만의 캠퍼스, 열정과 사랑이 넘쳐나는 대학가였다. 어쩜 그렇게 다들 반짝이는지 소위 '개골목'이라고 불리는 대학가 술집 거리의 지저분한 모습까지 젊음의 상징인 듯하다. 대학 동기인 P는 스스로 잘 꾸미고, 다른 친구들에게 예쁜 말도 곧잘 해서 인기가 좋았다. 그 친구하고는 인사 한번을 해도 하루가 즐거운 친구였다. 어찌나 선망했던지 그 친구와 사귄 남자를 내심 싫어하고 질투했던 감정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대학원으로 진학해서 보니 학생 수는 적어도 세상은 더 넓었다. 한 때 통계를 과외해 줬던 K도 그런 친구였다. 외국에서 10대의 대부분을 보내서 한국어보다 영어가 훨씬 익숙한 그 친구는 경영대에서 통계의 기초를 몰랐지만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모르는 건 잘못이 아니라 앞으로 알아가면 되는 것이라는 태도로 항상 당당했다. 처음에는 선생으로서 다루기 힘든 학생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녀의 반짝이는 생각에 호감을 느끼는 데 걸리는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기 생각을 말할 때 눈을 마주치고 안광을 번뜩이며 확신에 차서 말하는 태도, 그리고 그만큼 올바른 생각, 그 근거 있는 자신감이 그녀를 반짝이게 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반짝이던 친구들, 후배들이 있었다.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아니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반짝거림이 주변에 있었다. 그들은 내게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다.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라는 표현이 더 옳다. 대조적이게도, 나의 20대는 반짝이지 않았다. 누군가는 20대로 돌아가게 해 준다면 무슨 비용이든 지불하겠다고 젊음의 가치를 한껏 끌어올리지만, 나는 아니다. 나에게 20대로 돌려보내 준다고 하면 지금이라도 손사래를 칠만큼 나의 20대는 그런 반짝임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러한 대조는 마치 따뜻한 가정집을 바라보는 성냥팔이 소녀를 연상시킨다. 반짝임은, 그것을 가져본 역사가 없는 나로서는 선모의 대상이다.

나는 아직도 그 반짝임이 뭔지 정확하게 모른다. 밝음, 해맑음, 때 묻지 않음, 당당함, 긍정적인 태도, 한편으로는 철없음. 그러다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한 가지 힌트를 얻었다. 빛과 소금. 빛이 반짝이는 것 아닌가. 그러고 나서 드는 생각. 사람은 호광성 생물이구나. 우리가 원시인하면 떠올리는 이미지 중 하나도 동굴 안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을 지새우는 모습이다. 아, 사람은 빛을 좋아하고 빛을 향해 다가가는 존재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어떤 완성된 사람의 형태가 있다면 그 속성은 빛과 같은 사람이 아닐까. 과거의 나는 그런 빛과 같은 사람을 좋아하는 한 명의 호광성 생물이 아니었을까. 진리가 나의 삶에 호응하고 있음을 느꼈다.


어느 순간 수많은 반짝이던 친구들이, 그리고 후배들이 오랜만에 만나니 반짝이지 않는다. 내 기억 속의 너희들이 너무 반짝거려 재회를 그렇게도 기대했건만 새로 만난 너희들은 반짝임의 빛이 바랬거나, 혹은 더 이상 반짝이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을 경험한다. 애처로운 감정을 넘어 때로는 절망을 느꼈다. 내 기억 속의 너희들은 그렇게 반짝였건만 취업하고 세상에 나간 너희들은 더 이상 반짝이지 않는다. 짐짓 "○○이 어른스러워졌네?"라며 둘러대 보지만 그렇게 진심은 아니었다. 보고 있기만 해도 기분 좋던 그 친구가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없다는 생각에 집에 오는 내내 입안이 까끌거린다.

반짝임의 정수는 무엇일까. 세상에 대한 감정이 아닐까. '낙엽만 굴러가도 웃을 나이'라는 표현이 있다. 무엇을 보든, 무슨 일을 겪든 웃는 어린 학생들을 지칭하는 말인데, 반짝이지 않는가. 취업한 지 얼마 안 된 까마득한 후배와 오랜만에 점심을 먹는데 반짝임에 대한 얘기를 하니 대뜸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투덜댄다.

아니, 안 그래도 며칠 전에 어떤 사람이랑 싸워서 반짝거림이 확 꺼져버렸잖아요.

누군가와 싸우면 반짝이지 않는 걸까. 싸우는 것도 상대방에 대한 기대가 있으니까, 나아가 세상에 대한 기대가 있으니까 싸우는 것이다. 물론 싸운다는 것은 위기이다. 무의미한 다툼이 지속되면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어지고 세상에 대한 소망이 금방 고갈된다. 결국 사랑할 수 없게 되면 그때는 빛이 꺼진다. 하지만, 싸운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명이며 촛불이 바람에 일렁이는 반짝임이다.

세상을 향한 모든 활발한 감정은 반짝임이다. 그러니 세상을 소망하자. 불의에 분노하며, 인간사를 사랑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자. 다들 반짝이는 나이에 나는 반짝이지 못했다. 지금 나는 반짝거린다. 다른 많은 반짝이던 친구들보다 20년이나 늦게서야 반짝이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내 이름은 밝은 불꽃이다.



2023. 12. 24. 전 세계에서 크리스마스트리가 반짝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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