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의 기적 - 도약

by YeonJeong

디펜스 이후 약 열흘 간, K 연구원에 지원하는 과정을 담았다. 11월 16일 아침 일찍 부터 심사위원 중 한 분이셨던 H 교수님으로 부터 메일이 도착했다.

어제 고생하셨고, 축하드립니다! 졸업하시기 전에 식사 한번 어떠세요?

정말 감사하게 도와주셨던 H 교수님의 식사 제의를 거절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연기할 이유는 있었다. 연구원 지원 일정을 핑계로 1주일을 미뤄서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어젯 밤 스승님의 조언을 쫓아 심사위원으로 참여해주신 교수님들께 메일을 적었다.

다른 교수님들께 감사의 표시를 하라고 하셨지만, 그 처음이 교수님이어야 함을 이제는 모르지 않습니다.

심사위원 교수님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하라고 조언해주신 스승님께 가장 먼저 메일을 썼다. 그리고 행정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신 L 교수님을 필두로 나머지 교수님들께도 감사의 메일을 보냈다. 지도를 받지 않은 교수님이라 할 지라도 8년을 같은 공간에 있다보니 함께 곱씹을 추억 한 둘은 자연스레 나왔다.


이미 하루에 새벽 2시에 자고 아침 7시에 일어나는게 2주 째다. 지난 4년 동안 밤 11시반에 정리하고 날짜가 바뀔 때 잠자리에 들어서 아침 6시 20분에 일어나는 꽤나 건강한 삶을 잘 유지하고 있었는데, 2주 만에 표준이 바꼈다. 디펜스 준비를 하면서 이미 체력은 한계에 다다랐다. 몸이 부어서 땡땡해지는 느낌이다. 심혈관계를 느낄리 만무하지만, 컨디션은 차츰 떨어지고 있었다.

디펜스 전부터 생각해 둔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갔다. 연구노트 하나없이 머리 속으로 개요를 쓰는 동시에 글을 써내려갔다. 나는 딱히 개요를 깔끔하게 짜고 글을 쓰는 타입이 아니라 떠오르는 대로 쓰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글이 몰입도는 좋지만 방향을 잃어버리기 일쑤이다. 그럼에도 마음 속에 '무슨 말을 해야겠다'하는 주제 하나는 명확하게 가지고 시작하는데, 지금은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제출 마감일은 정해져 있었고, 이를 위한 미팅은 내일 아침 10시다. 연구원에서 요구하는 글쓰기 양식은 개조식이다. 생각나는 대로 글을 읊었다. 아이디어는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지만, 내가 지난 6년 동안 해온 일과는 주제가 약간 동 떨어져 있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금까지의 연구는 과거에 기댄다. 지난 정책을 평가하는 반추의 작업이며, 관찰만을 중시하는 형준(衡準)의 학문이다. 수치로 관찰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 사건이 벌어져야 하기에, 계량경제학은 시간의 흐름에 기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연구원에서 요구하는 내용은 다소 미래를 관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보니 일어나지 않은 사실에 대한 평가가 요구되었다. 원래는 GIS분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특장이라 내세우려 함이었지만, 그에 따르는 내용이 가볍지 않은 상황이다.

준비할 서류가 극도로 많았다. 서류번호를 하나씩 매겨보니 제출할 글이 8개가 넘었다. 그 중에서 가장 고심해야 할 것은 연구계획서였다. 특별한 주제없이 연구소에서 무슨 연구를 할지에 대한 주제로 글을 쓰는 것이었다. 지원자의 관심사와 연구소의 지향점이 얼마나 잘 맞는지 그 어울림(fit)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구계획서를 먼저 작성하였다. 나머지 서류는 이 연구계획서에 맞추면 된다.


11월 17일, 아이디어를 들어보시던 교수님의 고민이 깊어진다. 결국 내 아이디어는 GIS 스킬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경제학이 아닌 감정평가의 내용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두가지 문제가 발생하는데, 먼저는 상대적으로 잘하는 경제학을 내세우지 못하는 것이며, 감정평가도 자격증이 존재하는 전문분야인데, 그쪽 전문가가 들었을때 문제가 되지 않을까 염려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하루이틀만에 급조된 연구계획이라지만 디펜스를 통과했다는 것은 최소한 그 분야에서는 인정을 받았다는 뜻인데, 이틀만에 한 미팅은 낙제점이다. 결국 경제학으로 할 수 있는 부분을 새로 만들어 새로운 축으로 넣고, 감정평가는 내용을 다시 한 번 확인하기로 했다. 그리고 개조식 글쓰기에 대한 지적이 이어졌다.

글쓰기에 대한 머리가 아주 조금 굵어지고 나서는 개조식을 싫어한다. 애초에 개조식은 좁은 의미에서는 글이 아니다. 개조식 글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개조식 글은 수사가 없다. 글이 가지는 수많은 성질들을 모두 포기하고 오로지 정보 전달만을 위해 개조(改造)된 글이 개조(個條)식 글이다. 포기한 게 큰 만큼 얻는 것도 커야 하는 법이다. (스승님의 표현을 빌면) 개조식 글은 잘 읽히는 수준을 넘어서 조와 목이 눈에 꽂혀 들어와야 한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내 글은 줄글보다 안 읽힌다는 것이다. 내용만큼이나 심각한 문제였다.

미팅이 끝나고 감정평가사를 수소문했다. 나는 한낱 초짜 경제학자일 뿐이다. 감정평가의 내용은 아는 바가 없다. 디펜스가 끝나면 기고만장해질 법도 한데 바로 이렇게 큰 비용없이 겸손을 배울 수 있다니 나는 정말 운이 좋다. 주택관련 공기업에 다니는 친구를 통해 감정평가사 3분과 연락을 닿을 수 있었다. 병행전략을 취하기로 했다. 먼저 할 일은 감정평가와 관련된 내용을 더욱 구체화시켜 감정평가사의 의견을 의뢰하고, 감정평가사들의 의견을 받는 동안 경제학과 관련된 부분을 작성하고 구체화하는 것이다.


11월 18일 토요일 아침, 잠이 점점 줄어들었다. 다섯 시간의 수면으로 그나마 근근득생하던 생활패턴도 잠을 점점 줄일 수 밖에 없었다. 아침에 몸이 잔뜩 부어 손가락의 구부러짐이 어색해졌다. 벌써 1주일 째 제대로 몸을 풀지 못했다. 한시간 운동의 internal margin이 한시간 공부의 external margin보다 더 크다고 판단하여 아침 8시에 학교 뒷산 격인 천장산을 올랐다. 가는 길에 고려대에서 경희대로 향하는 방향의 편도 2차로가 꽉 막혔고 경찰이 출동하여 교통 정리를 하고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경희대 논술 내지는 면접날일테다. 우리 아이 면접 고사장 까지 편하고 따뜻하게 보내주려는 학부모들의 애닳는 마음들이 1km를 훌쩍 넘는 회기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버스도 같이 밀려 같은 번호의 버스가 100미터 간격으로 길을 맞잡고 있었다. 경희대 주차장은 이미 만차이고 약 10분만 걸어가면 된다는 경찰의 안내방송과 다양한 제조사의 엔진 소리가 주말의 아침을 할퀴고 있었다. 그래도 미래를 맞이하는 설렘의 소리다.

누구나 자기 직업과 관련한 취미가 있을텐데, 내 경우는 GIS 정보 구축이다. 행정구역으로 그어진 백지도에 각종 산, 강, 언덕 등 자연지형지물과 경사도 정보를 시각화하여 각각의 레이어로 깔고, 도로, 공원 등의 각종 인프라와 택지개발지역, 토지용도구분 등 토지관련 행정정보를 별도의 레이어를 추가하면 기초적인 공사가 끝난다. 이에 개별 건물 벡터를 깔고 건물의 정보를 병합(join)하면 바로 한 눈에 들어오는 재밌는 사실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해볼 수 있는 연습이 아주 많다. 이번에 연구소에서 GIS 작업이 가능한 사람을 필요로 하는데 내 취미 활동과 그들의 요구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11월 19일 일요일, 아무리 바빠도 '나'는 중요했다. 오케스트라를 나갔다. 더군다나 새로 들어오는 단원과 점심식사를 며칠 전에 제안을 받았는데 기수락한 바가 있었기에 할 일이 산적해있었지만 바삐 외출을 준비하였다. 몸이 피곤해도

이 날 믿음에 대해 생각했다. 도움을 구하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그 내용이 상대방의 객관적인 평가를 구하는 것이면 훨씬 어렵다. 자존심과 자기애가 너무 강하면 평가받기를 꺼린다. 상대방이 내 아이디어를 나쁘게 평가하진 않을까. 정말 악의없이 공정하게 내 아이디어를 평가해줄까. 상대방이 내 아이디어를 나쁘게 평가했을 때 내가 상처받지 않을까. 애써 가꿔놓은 내 성(castle)이 적들의 말발굽에 짓밟히는 듯한 느낌을 지우기가 참 힘들다. 지난한 수련 과정을 거치면서 배운 것 중 하나가 믿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한 믿음과 나에 대한 믿음을 모두 포함한다. 상대방이 나를 위해 객관적인 평가를 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믿는 것과 상대방의 평가가 뼈아플지라도 나는 그 평가를 이겨내고 내 결과물이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하리라는 기대를 믿는 것이다.

어쩌다보니 내 주변 사람들은 많이들 전문가이다. 전문가들의 시간은 돈이고, 전문가라도 친구들끼리 돈거래를 쉽게 할 수는 없으니 내가 그들의 지식과 통찰을 요구하는 것은 전적으로 호의이고 품앗이다. 그러면 내가 나중에 그들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최선을 다해 응답해주는 것은 물론이더라도 내가 부탁할 때 친구라고 예의를 저버릴 수는 없다. 평소 절친한 누나지만 예의를 갖춰 오 박사님에게 시급하게 새로 마련한 경제학 부분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지금 주변 분들께 무례한 부탁을 드리는 줄 압니다. 하지만 예의를 챙길 경황이 없습니다. 시종 부탁만 드립니다.

오 박사님도 현재 있는 기관에 일이 몰려 극도로 바쁜 상태이다. 매일 밤 늦게 야근을 하고 퇴근이 기본 10시인데도, '돈워리' 나의 무례한 청탁에 기꺼이 호응하였다.


11월 20일 월요일, 주택관련 공기업에 다니는 친구를 통해 감정평가사들에게 보냈다. 이 분들은 내 친구들과 다르게 개인적으로 처음 만나는 전문가들이다. 예의를 갖추면서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묻는 글을 쓰는 연습을 해본다.

비판에는 예의도 무용하오니 과객의 글이라 여기시고 어떤 형태든 비판적인 평가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오 박사님과 밤 10시에 미팅을 시작했다. 마치 두번째 디펜스를 하는 느낌이다. 날카로운 지적이 날아들었고 나름대로 왜 그렇게 했는지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전반적인 취지는 좋네요. 지금까지 하신 거랑 좀 다르긴 하지만, 이상하진 않고 무슨 말인지도 이해가 되는군요.

친분과는 완전히 별개로 평가가 후하지 않은 오 박사님으로 부터 받은 평가가 이쯤이면 극찬이라 생각한다.


11월 21일 화요일, 쟁여두었던 비상식량이 떨어졌다. 롯데마트로 달려가서 앞으로 1주일 먹을 간편식을 샀다. 시간을 뺏기는 것 같아 여유가 고갈되었다. 공연히 부아가 치밀어 햇반을 4박스를 샀다. 세일을 하길래 산 것이고 유통기한도 충분히 길어서 산 것인데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다 못 먹었다.

밤 9시 교수님께 내일 미팅을 해주실 수 있냐고 여쭈었다. 말도 안되는 부탁이었다. 원래는 1주일에 한번도 미팅이 잦은 것이다. 밤 늦게 메일을 보내서 내일 당장 미팅해달라는 요청은 매몰차게 거절당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제자의 무례한 청에 다음날 스승님은 친절하게 호응해주셨다.

밤 11시 E 감정평가사로부터 메일이 도착했다. A4용지로 7장에 달하는 분량이었다. 내가 궁금하던 감정평가의 내용의 모든 것, 아니 그 이상이 담겨 있었다. 감정평가의 기초 개념, 시나리오 별 고려사항, 업계에서 사용하는 비용편익 분석 방법의 예시, 과거 부동산 문화와 현재 부동산 문화의 비교를 통한 감정평가 방법의 변화, 그 외 궁금한 부분까지 한번에 긁어주는 전문가의 글이었다. 바쁜 것도 잠시 잊고 글을 읽으면서 감탄을 연속하였다. "전문가란 이런 것이구나"를 느낄 수 있는 글이었고 소정의 사례가 민망할 정도였다. 약속했던 사례의 2배를 송금하였다.

그만큼 할일이 많아졌다. 피아노 의자를 가져와서 보고서, 서류파일, 참고도서를 정리없이 쌓았다. 내일 교수님과 미팅을 하기로 되어 있으니, 결과물이 나와야만 했다. 10페이지라는 제한된 분량 안에 참조문항까지 포함한 각종 정보가 함축되어 들어가고 있었다. 새벽 1시 41분 지친 몸을 침대에 던졌다.


11월 22일 수요일, 오늘과 내일의 경계가 희미해졌다. 새벽 4시 43분 눈이 떠졌다. 딱 3시간 하고 2분을 더 잔 셈이다. 연말에 맞춰 매주 수요일 수영장에서 리그전이라는 이름으로 팀 대항전을 하고 있다. 도저히 3시간 자고 수영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3시간 전 잠자리 들기 전에 "오늘 못 갈 수도 있습니다."라고 연락을 취했는데, 5시 쯤에 일찍 일어난 팀 대표가 "당일에 안 오시게 되면 우리 팀은 자동으로 실격처리 됩니다."라는 규정을 알렸다. 도리없이 무리하지 말고 다녀와야겠다고 새벽길을 나섰다. 전혀 신경을 못 쓰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우리 팀 최강의 엔트리를 오늘 구성한 것이다. 자신있는 자유영을 숨도 안 쉬고 했더니 리그전 전체 최고 성적이 나왔다. 리그전만 참가하고 먼저 수영장을 먼저 빠져나왔다.

낮에 다른 감정평가사로부터 다른 코멘트가 도착했다. 먼젓번 평가사로부터 받은 의견서와 거의 일치했다. 감정평가사들의 글을 수습하여 교수님께 보내고 미팅을 시작했다. 꽤 많은 진전이 있었나보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그럴 수 밖에 없다. 5일 전의 '줄글보다 읽히지 않는 개조식 글'은 지금 보니 공부하면서 적어놓은 학습노트에 불과했다. 글의 재료들을 단순히 나열했을 뿐이니 읽히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사실 나는 처음 배운 글이 개조식 글이다. 글에 조금 가까워진것이 군(軍) 행정에서의 일이니, 예술로서의 글은 고사하고, 문장의 맺음도 불요한 글로 단련을 시작하였으니 개조식 글을 못쓴다는 것은 구과이다.

개조식 글의 발전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조목조목 부족한 점이 지적되었다. 글의 일관성과 유기성이 떨어지는 부분을 보완하고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하는 작업을 한시간 가까이 진행했다. 급기야는 조목번호를 도형으로 하는게 좋겠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할일이 산적되었지만 그래도 답이 보인다는 얘기다. 해볼만하다는 얘기다. 미팅이 끝나자마자 일을 쉬지 않았다.

연구계획서가 마무리되어가니 다른 준비해야 할 서류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학/석/박 성적증명서가 필요했다. 대학원 성적증명서야 학교에서 쉽게 협조를 얻을 수 있었지만, 학부 성적은 학부 학교 행정실의 협조가 필요했다. 학교 포털사이트에 접속하려하니 로그인부터 막혔다. 학교 행정실에 부탁해서 비밀번호 초기화를 부탁하니 실제로 요청하는 사람이 계정의 주인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한 절차를 알려주는데 그 방법이 꽤나 우스꽝스럽다. 신분증을 촬영하고, 신분증의 주인공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신분증을 들고 있는 본인의 사진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절차가 우습지만 시간이 아쉬운 건 이쪽인지라 군말없이 요구에 응하였다.

다른 서류는 학위논문요약서가 있었다. 다른 먼저 취업한 박사 친구들의 견본을 둘러보는데 학위논문요약서도 개조식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시간이 없어서 서론(Introduction)을 번역하는 수준으로 학위논문요약서를 작성하려고 했는데, 좀 더 노력할 여지가 있어보였다. 다행히 학위논문은 내가 지난 5년간 하던 내용이라서 진행이 빨랐다. 결국 밤을 새워 학위논문요약서를 대부분 완성할 수 있었다. 이튿날 새벽 5시에 겨우 잠깐 눈을 붙일 수 있었다.


11월 23일 목요일 아침 6시 20분, 평소라면 수영장을 가기 위해 일어나야 할 시간에 지친 몸을 채근했다. 몸이 피로에 절여지는 느낌은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피곤하지는 않았다. 나는 절대 잠을 줄여가면서 공부를 한 이력이 없다. 밤을 새는 것도 극도로 싫어한다. 준비가 안되면 안된대로 시험이든 발표든 임했었는데, 이번에는 밤을 새며 뭔가를 준비하였다. 몸이 붓는 느낌이 현현하게 들었다. 뒷목을 잡아당기며 당이 부족한 느낌이 지속되어 초콜릿을 계속 먹다보니 양치를 해도 입안에 단맛이 느껴진다. 살이 오히려 빠진다. 제대로 운동을 한지가 오래인데 체중은 감소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정신이 예리하고 맑았다. 적어도 그렇게 착각하고 있었다. 언제보다 합리적이고 어느 때보다 결정에 큰 고민이 없었다. 극도의 각성상태가 유지되고 있었다.

어제 거의 끝낸 요약서를 교수님께 보냈다. 아무리 예의를 챙기지 못한다고 하여도 또 미팅을 부탁하는 것은 염치의 문제였다.

한번 읽어보시고 정히 걸리는 바가 있거든 말씀해주세요.

라고 메일을 썼다. 몇시간 뒤, 잠시 온라인 미팅을 하자는 제안을 보내오셨다. 이미 넘칠만큼 지원해주셨기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학위논문요약서와 연구계획서를 중심으로 수정을 하면 좋을 사항들이 날아들었다. 그래도 대부분 완성이 되어 이제는 미세조정이거나 더 나은 문단의 배치를 찾는 작업들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미처 완성하지 못한 학위논문요약서를 완성하고 윤색하는 일만 남았다.

망중한의 여유가 있나보다. 그 와중에 불안에 관한 글을 읽고 내 생각을 첨언하였다. 불안은 항상 같이가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시간 가량의 여유를 즐기고 다시 작업에 몰두 하였다. 이제 실제로 글을 추려서 제출서류들을 체크하는데 써야할 글들이 자꾸 나왔다. 자기소개서도 두 페이지 분량의 글이 필요했고, 학위논문 요약서와 연구계획서를 다시 요약하는 글도 따로 작성해야 했다. 여러모로 서류를 준비하다보니 필요한 서류의 종류가 한 손으로 꼽을수가 없었다. 그리고 시간도 여전히 부족하였다. 다시 작업을 채근하여 실제로 서버에 지원서를 입력하였다.

함께 자라는 여인초가 진한 연두빛 잎살을 밀어보였다. 때로 잎은 꽃보다 예쁘다. 잎이 핀다. 오랜 잎들은 새 잎들에게 자리를 나눠주며 살짝 비켜준다. 같이 사는 법을 실천하는 양을 알려준다. 바탕화면이 갖가지 아이콘으로 채워져간다. 나는 컴퓨터 바탕화면에 아무 아이콘도 두지 않는다. 조용하다. 10년도 더 지난 업무환경의 정리법이다. 하지만 할 일이 단시간에 크게 벌려지고 정리할 시간이 없으면 업무환경을 점령당한다. 내게는 고요한 호수가 여럿있다. 그 호수에 작은 돌이 파랑을 일으킨다. 이미 내 호수의 삼 할을 온갖 색깔의 조약돌로 점령당했다. 다음 날을 시작한지 3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몸을 뉘었다.


11월 24일 제출 당일 아침 6시, 요 며칠 몸이 비정상이다. 다만 지금의 지금까지와 다른 양상이라면, 이번엔 내 기대치보다 월등하게 높은 퍼포먼스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온 몸으로 쏟아지는 체내 각성 물질이 느껴졌다. 동시에 며칠사이 드는 불안함도 있었다. 언제 기절한 듯이 잠들었다가 제출기한이 지나고나서 깨어나는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지진 않을까? 그 간의 수면 상태를 짐작해볼 때 결코 기우는 아니었다.

특별히 더 할 일은 없었다. 서버에 그간의 기록들을 입력하고, 최종 점검을 위해 교수님께 메일을 보냈다. 교수님의 답장이 다소 늦었다. 오늘은 무슨 일정이 있으신 듯 하다. 제목을 수정하고, 글을 윤색하며, 오타를 수정하면서 제출 서류의 준비를 마쳤다. 서버를 통해 제출을 하니 준비한 파일의 용량이 커서 제출이 되지 않았다. 연구원 인사팀에 연락해 메일로 제출을 하였다.


장장 20일을 처음 경험하는 집중력으로 달렸다. 그야말로 정신없이 지나갔다. 살면서 그렇게 잠을 자지 않고 오래 집중할 수 있구나 감탄할 수 있었고, 극한의 상황에서 예리한 정신에 감탄하였다. 이런 생산성을 계속 할 수 있다면 하는 생각도 있었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감사하였다. 교수님을 비롯한 모든 도와주는 사람들이 나를 안아주는 느낌을 받았다. 그동안 어찌나 자기 잘난 기분에 살았던지, 너무나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감사할 줄 모른다면 옳지 않은 것이고, 감사할 줄 안다면 형편이 좋지 않은 것" 이라는 괴테의 구절이 이 무렵 깊게 다가왔다. 미안하고염치가 없는 줄 알면서 도움을 받아야 할 때를 경험하니, 감사함이 미안한 감정 위로 올라왔다. 미안한 마음은 사실 욕심이었다. 받지 않아도 될 것을 받는 것이 미안한 마음이었다. 받지않으면 안되는 것을 받을 때는 감사함이 다가왔다. 지난 20일은 내게 그런 기간이었다.


그리고 다시 20일 뒤, 그러나 그 제출 서류를 다시 꺼내볼 필요는 없다는 연락을 받았다. 2023년, 겨울이었다.




2023.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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