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어김없이 열대를 거닐고 있다. 베트남의 도로 사정은 익히들이 알고 있다. 악명 높다고 할까. 오만가지 위반이 매순간 벌어진다. 중앙선 침범에 역주행도 허다하고 보행자 횡단보도의 녹색불이 켜져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택시를 타고 이동해도 수십대의 오토바이가 비스듬하게 앞을 비껴 지나간다. 한둘이 이러면 저 사람이 나쁘다 하겠지만 모두가 이러니 비난조차 방황한다. 내가 탄 택시라고 해서 별다를 일도 없다. 애초에 핸들에 있어야 할 손이 경음기 위에 있다. 8대 중과실(이제는 12대 중과실이라 이름하는)이라 언급되는 신호위반, 중앙선 침범, 끼어들기 위반, 위반의 종류는 다 보고 있는 듯 하다.
평소 운전에 자신있던 나도 도저히 이런 환경에서 운전할 자신이 생기지 않는다. 친구에게 베트남에 있는 모든 운전 기사들은 나보다 운전을 잘하는 것 같다고 농담 섞인 비소를 흘려본다. 이 수 많은 위반 중 하나라도 한국의 도로에서 했다가는 술자리의 안주거리로 전락할게 분명하다. 그래도 이 곳의 운전자들은 화를 내는 일이 없다. 으례 그러려니 묵묵히 경적을 울려댈 뿐이다. 격정으로 비난하는 일도 없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수많은 생각과 이론들이 스쳐지나간다. 개인의 윤리와 사회의 윤리의 불가분성이라든지,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든지, 익숙한 무례라든지, 악의 평범성이라든지, 급기야는 열대의 환경이 이런 도로 사정을 만들었다고 가설을 만들어내게 된다.
혹시 8대 중과실, 12대 중과실. 숫자붙여 손꼽길 좋아하는 우리가 만들어낸 수단에 우리가 잡힌게 아닐까. 교통 법규의 본질도 사고가 나지 않길 바라는 우리네 인간들의 노력의 산물인데, 어느새 인간이 그어놓은 선이 신의 선이 되어 우리를 그어놓는다. 월남의 도로를 보고 있자면 마치 강물의 파도가 흘러가듯, 초원의 가젤이 마땅히 가야할 바를 알고 뛰어가듯 유려하기 그지없다. 상선(上善)의 흐름이 이와 같지 않을까. 나는 어느새 내 인생에 수많은 중앙선을 그어놓고 본질을 보지 못한 채 사고가 아닌 것을 사고라고 단정하며 살고 있진 않는가.
옳고 그름을 쥐고 흔들며, 옳고 그름에 쥐여지고 흔들려지는 사법(事法)과 이법(理法)의 계(界)에서 발버둥치는 나를 보며 한없는 답답함과 사랑을 느꼈다. 옳고 그름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옳고 그름을 더이상 생각하지 않는, 그저 살아갈 뿐인 경계의 초월에 잠시 다녀왔다. 내가 이 사람들에게, 내 옆의 운전기사에게 "방금 중앙선 침범하셨잖아요, 그러면 안되잖아요."라고 말한다면, 이 사람은 내게 뭐라고 할까. "Okay, Okay~" 능글맞게 웃으며 넘어갈 것 같다. 사고안났잖아 괜찮아. 사고가 났다면 뭐라고 할까. "Okay, Okay~" 사람 안 죽었잖아. 라고 할 것 같다.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는 친구야. 중요한 것도 사실은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괜찮아.
이쯤해서 '교도소에서 살아가는 거룩한 부처님들, 술집에서 웃음파는 엄숙한 부처님들'로 운을 떼는 성철스님의 축송(祝頌)이 떠오른다. 내 옆의 운전기사 부처님이 방금 경적을 길게 울리신다.
2024. 8. 5.
남방불교의 그늘 아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