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두어 달 쯤 되었을까. 큰 맘 먹고 주문해서 오랜 기다림 끝에 받은 탁자가 사용한 지 한 달 만에 큰 생채기가 난 일이 있다. 잠시 집에 놀러 온 친구가 주변 청소를 돕다가 사고를 친 셈인데, 보면대를 쓰러트리는 바람에 탁자 가장자리가 찍혀 작은 흠집이 나고 만 것이다. 나름대로 깨끗하게 쓰고 싶어서 탁자보도 주문하고 애지중지하던 차에 눈 앞에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속이 쓰려 한바탕 쏘아붙였다. 그 쏘아붙이는 자신의 모습조차 보기 싫어 쏘아붙이는 이유마저 죄다 전가 해버리고 말 한 마디 섞지 않은 채 투덜거렸다. 누가 청소를 해달라고 했냐, 평소에도 실수가 많더니만 결국에는 사단을 낸다, 별별 못된 말을 한바탕 쏟아냈다. 참 부끄러운 모습이다. 탁자의 조그마한 흠집에 흔들릴 마음이면 평소 젠체하는 말씨라도 쓰질 말았어야 했는데 모순적인 모습이 마음을 파고 든다. 조그마한 쐐기가 큰 돌을 쪼개듯 찍힌 탁자의 흠집이 부질없는 마음을 쪼개 내리고 있었다. 그런 내 마음을 전시하듯 흠집 모양도 딱 쐐기가 박힌 모양새다.
우리 가족이, 나나 우리 어머니가 운전 미숙으로 차를 긁어와서 속을 떨었을 때 아버지가 자주하는 말씀이 있다. '이 놈아, 차도 소모품이다. 쓸만큼 쓰다가 다 쓰면 바꾸는 거지 뭘. 신경쓰지 말아라.' 이럴 때면 아버지다운 말씀이다. 나는 조그만 테이블도 소모품이라고 생각 못했으니, 이번 만큼은 아버지께 완패한 셈이다.
'소유물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는 이상으로 우리들 자신을 소유해 버린다.' 소유에 대해 누구보다 깊게 고민했을 법정 스님은 소유를 경계하셨다. 영혼을 지닌 내가 한낱 죽어 전시된 물건에 사로잡혀 마음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아주 조금 알게 되었다. 무엇이 무엇의 노예인가. 누가 누구를 소유하고 있는가. 정작 탁자는 자신을 찍어도 크게 한번 울고 후탈없이 존재하고 있는데, 마치 잡혀가는 주인을 보며 오래토록 울부짖는 머슴의 꼴이 아닌가 싶다.
주변을 둘러보니 수많은 주인이 나를 소유한다. 한번 제대로 쓰지도 않은 물건들이 내 주변에 즐비하다. 이 물건들이 사라졌을 때 내가 슬프면 이미 나는 물건에 소유된 것이다. 주인을 잃은 종비는 방향을 잃어 울어도, 시종이 없어진 주인은 울지 않고 다른 종자를 찾을 뿐이다. 물건이 나를 슬프게 할 순 없는 일이다. 그래서 어떤 물건의 존재가 나를 흔든다면, 나는 그 물건을 가질 자격이 없다. 소유의 멸실이 소유를 완전하게 만드는 모순에 이르니 비로소 소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얼마 뒤, 작은 텃밭을 일구시는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와서 산에서 멧돼지가 내려와 고구마 밭이랑을 죄다 흩어버려 속이 상하다는 얘기를 전한다. 이놈의 멧돼지가 고구마를 하나둘 남겨두고 다 먹어버렸다는 것이다. "아이고 어머니, 하늘 아래 고구마 주인이 어딨습니까. 멧돼지 보살께서 감사하게도 고구마 두어개 우리한테 보시하고 가셨네요. 제가 고구마 많이 사드릴게요." 당신이 직접 지으시는 고구마는 시장에서 구할 수 없다고 굳게 믿으시는 어머니가 너털웃음 웃으신다. "올해 네 건 없다. 이 자식아."
2024년 8월 9일. 환락의 마천루 위에서.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