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하는 마음을 미워하지 않도록

by YeonJeong

불행하게도. 불행하게도 우리는 너무나 많은 미움을 마주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미움을 미워하는 수만갈래의 미움을 마주한다.


늦은 오후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길이다. 내 앞의 앞자리에 한 아주머니가 그다지 크지 않은 목소리로 통화를 하고 있다.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 두런두런하는 정도였는지 나는 그냥 일상을 구성해주는 감사한 소음 정도로 생각했나보다. 딱히 통화를 하고 있는지도 몰랐으니. 수많은 소음과 수많은 경치에 어설픈 편안함을 누리려 할 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 안연한 일상을 부욱 할퀸다.

아줌마 버스에서 통화를 왜 하세요? 공중 도덕에 맞아요 그게?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초면 간의 비난이 갸날픈 버스 복도를 지나갔다. 비난을 맞은 초면은 민망한 듯, 나중에 다시 통화해.하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응답하라1988에서는 야자 시간에 떠드는 반 친구들에게 반장이 시끄러다고 대학 안갈거냐고 소리치는 반장에게 덕선이가 핀잔을 준다. "야. 니가 더 시끄러워." 하지만 현실은 귀찮은 일에 엮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임시로 20분만 우리 같은 반 합시다모였고, 그래서 임시반장은 있었어도 임시덕선이는 없었다.


그 후 몇 정거장을 지나며 나는 상당한 불편함을 느꼈다. 일본은 버스나 지하철에서 통화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고 하더라마는. (무슨, 두어 달 전에 일본 가보니 기차에서도 잘만 통화하더라마는) 우리나라는 그렇게 금기시되는 예절도 아니지 않나. 그렇다고 전술한대로 그 비난을 들은 아주머니가 아주 큰 소리로 떠든 것도 아니다. 내 기준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얼마든지 통용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이 정적을 숭상한 것도 아니다. 도란도란 얘기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었다. 더군다나 버스 안이다. 도로 위의 수많은 소리도, 버스 자체의 소리도 무임의 객이었다. 이렇기 때문에 나는 위의 비난이 부당하다 생각했다. 오히려 내 입장에서는 비난섞인 목소리가 가장 불편했다. 모르긴 몰라도 비난할 상대가 필요했던게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여러모로 만만한 아주머니가 옆에 있었을 뿐이었다고 생각했다.


휴대폰도 그 새 박살났겠다, 하릴없이 커뮤니티를 보고 시간을 죽이지는 않지만, 커뮤니티를 보다면 본문보다 댓글에서 각축장이 벌어진다. 그러다보면 종종 커뮤니티의 글을 보다보면 늦은 오후의 버스에 타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다. 한번은 과외 공고문이 글로 잡혀 보도된 적이 있다. 내 눈에도 과외 조건이 상당히 까다로웠다. 초등학생이고 월 30만원에 긍정적인 말을 사용해야 한다든지, 영어수업은 영어로만 진행해야 하되 독해와 문법은 한국어로 진행을 해야한다든지, 수업계획서와 실제 진도를 알려줘야 한다든지 하는 조건이 스무개는 넘게 붙어있는 글이었다. 댓글에는 비난이 넘실거린다. 아줌마가 돈을 벌어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 꼴랑 30주면서 말이 많다. 애가 불쌍하다.를 넘어선 수많은 평가와 분별이 방향을 모른채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사이사이 보이는 욕설과 저주는 덤이다. 익명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안락한 비난을 허락한다. 시비가 좀 더 명확한 범죄 보도의 경우에는 비난이 좀 더 순수하다. 때로는 통쾌한 비난으로 인기에 영합하는 사람도 있고, 때로는 비난을 직업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유를 막론하고 비난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모습이 싫은 것이다. 어떤 사람을 비난하는 현장에 있게 되면 1분이라도 빨리 스스로를 구출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비난하는 그 사람을 평가하고 비난한다. 저 사람이 더 시끄러워. 저 사람이 더 문제야. 그것 하나 이해 못해주다니, 참 딱하고 가엾다. 라고 하며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한다. 간혹 미워하는 모습을 보면 미워하는 의견을 보고 또 다시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 미움을 미워하는 그 모습도 참 밉구나하고. 미움의 굴레에 스스로가 있는지 모르는 채.


p-beauty contest라는 게임이 있다. 때로 금융시장을 설명하는 이 게임의 핵심은 (이론적) 정답이 중요한게 아니라 옆 사람의 생각이 중요하다고 가르침을 준다. 사고의 단계가 높아질수록 0에 가까운 답을 제출하게 되는데, 모든 게임이 그렇겠지만 유독 이 게임을 보고 있자면 3번 생각한 사람은 2번 생각한 사람의 머리 위에 뛰어노는 듯하고, 4번 생각한 사람은 3번 생각한 사람의 머리 위에서 뛰어노는 듯한 구조를 여실히 보여준다. 1번 생각한 사람을 2번 생각한 사람이 비웃고, 2번 생각한 사람을 3번 생각한 사람이 비웃고, 3번 생각한 사람을 4번 생각한 사람이 비웃는 연쇄 속에 사람들을 밀어넣는다. 이러한 단순한 논리를 확장하고 나면 0이라는 정답에 도달하게 되지만, 놀랍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게임의 결과가 0이 나오는 일은 없다.


세상의 수많은 비난과 미움을 마주하면서 어느 새 나도 그 미움의 연쇄에 다만 한 연결고리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미워하는 모습을 미워하는 것은 왜 미움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는지. 어느 순간 누군가를 미워하는 모습을 미워하는 스스로를 뒤에서 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미워하는 모습을 미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또 미워한다. 미움이라는 게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지독한 습기다. 미워하기 위한 이름은 기억해도, 칭찬하기 위한 이름은 기억하지 못한다. 미움은 이렇게 마음에 끈적한 염증으로 들러붙어 있다. 언젠가부터 덮어놓고 맞다고 하는 태도를 경계하기 위한 수많은 격언들이 우리를 에워싼다. 비판적 사고를 배우며, 평범한 악을 경계하고, 권위에 굴종하기를 거부하는 연습에 치중했다. 하지만 덮어놓고 수용하는 것은 역사가 없다. 왜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이고 힘드시겠습니다. 위로하는 연습을 하면서, 남이 남을 미워하고 비난하는 것은 오늘 참 안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하지 못할까.


살다보니 별별 부탁을 받는다. 얘기를 나누다보면 누군가의 흉을 들어야 될 때도 있고, 나아가 누군가의 흉을 청탁받기도 한다. 은근히 자신의 미워하는 마음에 동조해주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고, 자기가 흉을 보는 그 사람의 흉을 좀 더 능동적으로 주인정신을 가지고 욕을 해달라는 사람도 있다. 미워하는 마음을 미워하지 않으려니 숱한 지혜와 그 이상의 인내가 필요하다. 법륜 스님의 한국 불교 비판 토로를 몇 시간 묵묵히 들어준 서암 스님 같은 흔들리지 않는 정신은 여전히 부족하다. p-beauty contest에서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어 나온 답은 정답이 아니다. 한 단계 생각한 사람, 두 단계 생각한 사람, 그리고 열 단계 생각한 사람을 모두 아울러야 그나마 정답에 가까워진다. 미움의 연쇄에 서있으면 내가 비난하는 바로 앞 사람의 뒤통수만 보일 뿐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기 마련이다. 이러한 연쇄를 다른 차원의 축에서 볼 때 답이 마련된다. 다른 사람의 미워하는 마음까지 밀어낼 수 있는 사랑을 가지고 싶다.




2024년 가윗날 전야

미움을 대하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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