越南鑑賞

by YeonJeong

베트남이다. 이상하리만치 베트남은 인연이 없었다. 그렇다보니 아는 바도 없었다. 이념갈등, 미국의 패전, 월남전참전과 고엽제전우회, 공산진영의 승리, 박닌성의 제조업, 중국과의 수자원갈등. 이 정도가 파편적 지식의 전부였다. 백문불여일견이라는 말은 누가 만들었을까. 여유가 없는 와중에도 장차의 여유를 계산하며 항공권을 결제하고 나니, 내 기억 속 저 멀리 있는 월남이 한걸음 크게 다가왔다.


법정스님의 담백하기 그지 없는 에세이를 한권 들고 여행을 시작하였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과 열대의 날씨는 한국의 여름을 피해 더 큰 여름으로 들어온 강한 느낌이다. 시작도 끝도 정해지지 않은 열대의 소나기, 스콜은 언제든 발을 묶어버린다. 강한 햇살과 그만큼 강한 강우는 8월 열대의 특징이다. 이러한 날씨는 곳곳에 부서진 도로 사정과 맞물려 쉽게 물웅덩이를 만들어내고 이내 발목을 적신다.


호치민 시티라는 이름이 주는 무자비함이 또 있을까. 그래 베트남에 특별한 관심이 없었던 나도 사이공이라는 지명은 들어본 듯하다. 아틀란티스, 폼페이 같은 이름만이 구전되는 어떤 도시처럼 더 이상 지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지명이 내가 있는 이 곳 이었다. 사실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 역사에 대해 잘 모르다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형님에게 이번에 호찌민 시로 학회 참석 차 가게 되었다고 하니, 사이공으로 가는 거냐고 되물어왔던 그 길로 알게 되었다. 같이 연구를 하는 박사님은 재미난 비유로 호찌민의 현대사를 단번에 이해시켜 주었다. 우리나라가 한국전쟁에서 패전해서 서울이 김일성 시로 바뀐 상황이라고 이해하니 단번에 그 이름의 역사를 공감할 수 있었다. 도시나 길의 이름이 어떤 위인이나 사람의 이름이나 호, 왕의 시호인 경우는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세종시라든지, 충무공동이라든지, 백범로라든지 그 사례는 무수히 많지만, 호치민 시티와 같이 한 사람의 이름이 기존 도시의 이름을 갈취한 사례는 현대에 들어서는 유일한 예가 아닌가 싶다. 모든 이름은 허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본질이기도 하여, 그 역사가 한낱 몇글자에 녹아 들기도 한다. 그 땅을 다녀간 수 많은 삶의 역사를 한 인물이 짊어 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 문명의 자의식 과잉이다. 기나긴 사이공의 역사를 기껏 100년 범부의 역사로 만든 것 같아 마음 한켠이 불편했다.


사이공에는 수많은 현판제작자들이 다녀갔다. 한적한 어촌 마을에 프랑스인들이 19세기 중반 점령하여 도시를 계획하였다. 도시에 있는 프랑스식 고전 건축물들은 150년 전 그들의 도시공학을 그대로 보여준다. 사이공에 위치한 호찌민 인민위원회 청사는 프랑스 통치자들의 공회당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고, 사이공 중앙우체국은 에펠 탑을 설계한 구스타프 에펠의 작품이다. 그 앞의 노트르담 대성당은 고딕양식 성당의 표본이다. 외세는 언제나 깔끔하게 다녀가는 법이 없다. 반드시 선주민족과 외세의 갈등은 업을 남긴다. 건축물은 그 중 하나이다. 그들이 남긴 그들의 건물을 어떻게 할지는 다음 세대의 선택이며 숙제다. 조선총독부를 시원하게 지워버린 한국도 있지만, 인도 콜카타의 동인도회사 건물이 먼저 떠올랐다. 10년 전 인도 여행의 시작지로 콜카타로 들어갔을 때 처음 본 풍경은 웅장하지만 관리되지 않은 영국식 건물과 그 주변의 정돈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동인도회사 본부 건물은 현재 콜카타 지방정부의 청사로 사용되고 있는데, 현재 사용 중임에도 불구하고 군데군데 깨진 유리창이며 건물 잔해가 건물 곳곳에 있었다. 이 차이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건물을 부수고 다시 짓는 일에 대한 경제적 선택일까. 외세에 대한 거부감과 현재의 관계의 차이일까. 그 건물이 가지는 의미가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한 날은 걷다보니 전쟁기념관을 다녀왔다. 어느 나라든 전쟁박물관은 현재 그 땅을 지배하고 있는 세력의 전쟁당위성기념관 내지는 적국비난기록관 쯤 되겠지만, 그 중에서도 사이공의 전쟁기념관은 그 정도가 강하다. 국가적 차원의 비난 현장을 보고 있으니 여간 불편하기가 그지없다. 그 중에서도 고엽제 피해자들을 전시해 놓은 전시관은 그 방점을 찍고 있었다. 증오에는 근본이 없다. 왜 싫어하는지 스스로도 납득하지 못한 채 서로를 싫어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나를 그 자리에서 구출하고 싶어 돌아보는 둥 마는 둥 빠져나왔다. 전쟁 시기 땅굴 생활을 했던 장소인 꾸찌 땅굴을 돌아보는 일정을 관광 상품화시켜 놓은 곳이 있다고 하여 남는 시간에 다녀와 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쟁기념관을 나오면서 그 생각을 완전히 접었다. 통일궁의 감상도 이런 생각으로 보니 애잔하기 그지 없다. 대통령 집무실을 몰아내고 관광객에게 개방한 셈인데, 망국에 대한 대우가 이보다 좋을 것도 없다 싶었다. 이제 사이공 시내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무미단조하다. 뭔가 감각이 마비되어가는 느낌이다. 대회의장에 걸린 금성홍기와 공산당기가 너무 시끄러웠다.


밤은 시원하고 서늘하여 걷기가 퍽 좋다. 낮에는 뜨겁게 내리쬐는 광장이며 시 청사도 밤에는 한결 시원해져서 사람들이 죄다 나온다. 그러다보니 낮에 보는 광장의 풍경과 밤에 보는 광장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밤이 돼서야 야외 활동을 즐기고, 그러다보니 모든 풍경이 낮보다 밤에 힘을 더 준 느낌이다. 프랑스 식 건물과 공원도시, 쉬지않고 울리는 경음기 소리, 그리고 그 위로 나부끼는 금성홍기가 또 다른 사이공의 풍경을 조성하고 있었다.


남방불교의 오밀조밀한 아름다움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사이공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곳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빈응이엠 사원을 꼽을 것이다. 한참을 보고 있게 하는 처마 위 토우, 현대식으로 지어올린 7층, 8층, 9층 석탑들, 분홍, 보라의 연꽃, 밀도높은 비단잉어들, 육각팔각 지붕의 처마, 경사높은 주홍색 기와지붕, 흩날리는 청황적백주의 불교기, 가사만 걸치고 정진하는 승려들. 주위가 요란하면서도 고요했다. 조용히 글을 쓰기에 더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미모사로 뒤덮힌 두렁, 진흙 속 연꽃, 여전히 일상 필수품인 논라, 메콩 강가의 야자수, 사이공 강변의 풍경, 분재라기에는 너무 큰 작품들, 타일로 만든 남방불교의 문 장식, 황토색 메콩강물과 그 위로 떠다니는 부레옥잠, 코코넛 엿을 만들고 있던 메콩강 삼각주 토이손 아일랜드의 초등학생 여자아이, 바글거리는 메콩강 악어와 더 바글거리는 메콩강 잉어, 논 한가운데 집집마다 조성한 조상의 무덤, 맛있는 쌀국수, 그리고 지금도 기억나는 Pho Chao의 Photine. 친절한 남베트남 사람들. 한낱 몇 글자로 표현 못 할 사이공의 밤낮이었다.


여행이 끝나고 한시진도 쉬지 못해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결국 가벼운 목감기에 걸렸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1주일을 꼬박 일을 미뤄놨으니 조바심도 들게 마련인데 충분히 쉬도록 몸이 스스로를 배려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심한 감기는 아니기에 이렇게 그 감상을 정리할 기회도 얻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우선순위에서 밀려 차일피일 미뤄지기만 하는 글이 될 것이 분명하다. 특히 이런 감상은 순간순간 그 가치가 무뎌지기 때문에 이렇게 바로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얼마 없는 기회이다. 유난히 더웠던 2024년 여름에.




2024년 夏末日

기억의 질감을 다시금 더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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