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기 싫어도 먹어!

그때 억지로라도 먹었더라면

by 냉수 한 그릇

난 먹는 데 진심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1시간은 줄을 서서 기다릴 수 있다. 그 이상 줄 서야 한다면 포기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릴 때 기억으론 먹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찍은 사진을 기억한다. 도로변에서, 바람에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서 있는 사진 속 내 얼굴엔 허연 버짐이 피어있다. 원인이야 여러 가지겠지만, 심각한 편식으로 인한 영양실조가 확실할 것이다. 중학교 때도 내 허리는 26인치를 넘어가지 않았으니, 남자치곤 마른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유전의 힘을 바랄 수 없는 형편에 먹기라도 잘했으면 지금보다 몇 cm 는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아쉬움이 남는다.


다행히 아들은 이것저것 잘 먹는 편이다. 또래 아이들은 잘 먹지 않는 간장게장, 나물, 청국장, 가지, 파프리카, 콩국수 등은 물론이요, 우연히 먹어본 산 낙지가 맛있었다며 할머니가 준 낙지 4마리를 그 자리에서 먹어치우는 걸 보았을 땐 경이롭기까지 할 정도로 잘 먹는다. 그건 분명 다양한 음식 경험의 결과이다.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을 먹어본 경험은, 또 다른 음식을 먹는 도전을 가능하게 했다. 물론 예상보다 입에 맞지 않아 다시는 먹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음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반대는 더 많다. 편견 없이 이것저것 음식을 먹어보게 하는 경험은 자녀에게 유익이 된다고 확신한다. 덕분에 아들은 또래와 비교하면 아직은(?) 평균 이상의 키로 잘 자라고 있다.


처음부터 잘 먹었던 건 아니다. 유독 먹는 데 진심이었던 난, 식사때마다 아들과 먹느니 마느니 하는 문제로 씨름해야 했다. 아들에겐 불행히도, 먹는 데 있어선 아내 역시 나와 같은 육아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밥을 끝까지 먹지 않고 남기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심지어 혼내서까지 먹게 했다. 밥을 잘 먹지 않는 것 같으면 앞으론 밥 주지 않겠다며 농담조의 협박까지 했다. 먹기 싫은 밥을 아빠, 엄마 눈치 보느라 억지로 먹어야 했던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다. 하지만 난 후회하지 않는다. 육아 전문가가 들으면 놀라 자빠질 일이나, 오히려 그것은 잘한 선택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내 자녀를 책임지지 않는다. 셀 수 없는 다양한 사정이 있는 집의 자녀들을 획일적인 원칙으로 기를 수는 없다. 내 자녀는 우리 부부가 책임져야 한다.


이유가 있었다. 잘못한 것은 고치면 된다. 못하는 것은 노력하면 된다. 뭐든 고치거나 노력하면 잘할 수 있다. 하나 성장기를 놓치면 키는 더 자라지 않는다. 먹기 싫은 걸 억지로 먹게 했다는 불만보다, 억지로라도 먹게 하지 않아서 키가 크지 않은 것을 더 원망하리라 생각했다. 어디까지나 내 경험에서 온 판단이었다. 비록 그 순간은 싫었을지라도, 내가 한창 성장기 때 부모님이 내가 억지로라도 먹게 해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전의 힘을 빌릴 수 있다면 그토록 가혹하게 먹게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어디까지나 이건 우리 집만의 문제이다. 크지 않은 내 키를 볼 때, 아들에게 작은 키를 물려줄 수는 없었다.


자녀에게 다정한 한 엄마를 보았다. 어린 딸이 먹기 싫어하니, “먹기 싫어? 그러면 안 먹어도 돼.”라며 상냥하게 웃어주었다. 자신의 의견을 존중받고 자란 그 딸은 영·유아 검진 키 백분위(상대적 위치를 나타낸 점수로 수치가 클수록 키가 큼)에서 측정 불가능한 수치가 나왔다. 1% 미만이었다. 어쩌면 키보다 딸의 존재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당연하다. 그 누가 부인하겠는가. 하지만 내가 살아보니, 키에 따라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도 달라지더라.


어린 나이엔 판단이 서툴다. 그저 먹기 싫은 걸 먹게 하는 부모가 야속하게만 느껴질 수 있다. 부모가 판단해야 한다. 아들에겐 우리 부부가 억지로 먹게 했다는 원망보다, 억지로 먹게 했다는 고마움이 더 클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지금 또 말해야겠다.


“먹기 싫어도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