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믿지 못한 건 아들이 아닌 나 자신이었다
사실 난감하다. 아들이 학기 중엔 반나절을 학교에서 보내니, 나머지 반나절만 집에서 해야 할 공부를 마치고 놀게 하면 그만이다. 보통은 아들이 좋아하는 유튜브 영상을 한두 개 정도 보게 한다. 가능하면 TV나 스마트폰 영상을 보여주지 않으려 하나, 또래들이 즐겨보는 채널에 나오는 유행어나 캐릭터 등을 몰라서 친구들과의 대화에 소외되도록 하는 게 그리 좋은 교육방식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때론 TV나 SNS 등에 나오는 영상이 창의적인 생각을 하거나 창조적인 모방을 할 때 도움을 주니, 무조건 ‘바보상자’라고만 깎아내리는 건 적절치 않아 보인다. 교육에 열정 있는 부모는 집에서 TV를 없앤다고 하나, 그렇게까지 한다고 자녀가 미디어 영향에서 자유롭게 되거나 공부에만 빠져 산다고 볼 수도 없으니 말이다. 볼 녀석은 학교든 학원이든 어디서든 볼 것이다.
문제는 방학이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으니, 오전에 해야 할 공부를 마치면 남는 시간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한두 개 영상을 보고도 오후 한두 시 정도밖에 되지 않으면, 내 안에서 슬슬 불안한 마음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물론 방학 중엔 공부를 더 시키면 되지 않겠느냐고 따질지 모르나, 초등학생 때부터 아들을 공부의 노예로 살게 하고 싶진 않다. 자고로 어린이는 어린이답게 열심히 놀아야 하지 않겠는가. 나도 초등학생 때 하지 않았던 공부를 아들에게 시키는 마음이 미안하긴 하나, 시대가 시대인만큼 공부를 시키되 정말 최소한 해야 할 문제집 정도만 몇 권 풀게 하고 마는 정도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앞서 말한 독서다. 책은 혼내서라도 읽게 하고 싶지만, 공부는 굳이 혼내면서까지 하라고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어쨌든 방학이 문제다. 아무리 내가 이런 고상한(?) 교육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나도 글 쓰고 공부하는 등 해야 할 일이 있는 마당에 아들과 종일 놀아줄 수는 없지 않겠느냔 말이다.
볼 수 있는 최대 한계치만큼의 영상을 보고 나면 아들은 슬슬 내게로 와서 귀찮게 하기 시작한다. 그 말인즉슨, 내가 편하게 볼일을 보고 싶다면 자기에게 영상을 더 보여달라는 무언의 협박인 셈이다. 처음엔 나를 짓누르는 아들의 무언 협박에 넘어가서 추가 영상을 보여주었다. 형제 없이 홀로 자랄 아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긍휼한 마음에 나라도 열심히 친구가 되어 놀아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교회를 사임하며 내게 주어진 많은 시간을 아들과 함께했다. 아들과 놀아줄 시간이 점점 부족해지면서, 영상으로나마 나의 미안한 마음을 아들에게 보답하려고 허락된 영상 외 추가 영상을 늘 허락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들에게 끌려가는 내 모습이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고 더는 보지 말라고 하면 내게 와서 귀찮게 할 게 뻔하니, 이거 대책이 필요했다.
먼저 아들에게 추가 영상을 보여주는 내 심리를 추측해 보았다. 그건 두려움이었다. 아들은 혼자 놀지 못하고 내가 하는 일을 방해할 거란 두려움이 아들에게 영상을 보여주도록 만들었다. 식당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와 주변 사람의 식사를 방해할 거란 두려움에 아들에게 쉽게 스마트폰을 허락했는지도 모른다. 내겐 단호함이 필요했다. 아들 본인에게 주어진 권리를 스스로 다 누리고 나면 더는 떼를 쓴다고 해서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아들에게 가르쳐야 했다. 내 할 일 하며 아들이 영상을 다 볼 때까지 기다렸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들은 내게 와서 슬슬 놀아달라고 요구했다. 마음 약해지면 진다. “영상 다 봤으면 이제 네 할 일 해!” 이 아빠가 오늘따라 왜 이러느냐는 표정이나, 평소와 다른 단호함에 당황하기 시작한다.
어디선가 이것저것 꺼내온다. 어느 날은 집에 있는 이불이란 이불을 다 끄집어내고 의자를 가지고 와서 집을 만든다. 어느 날은 그동안 사 모은 레고를 끄집어내서 건물을 만들기 시작한다. 또 어느 날은 종이에 지하철역을 그리거나 주식 차트를 그리기도 한다. 이런저런 것으로 성에 차지 않으면 책을 꺼내 읽기도 한다. 혼자서 장기하거나 보드게임을 하기도 한다. 그 모습이 짠하기도 하나, 혼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두려움을 떨쳐내니 길이 보인다. 시행착오가 필요하나, 혼자서 놀지 못할 거란 생각에 허락했던 추가 영상을 멈추니 아들은 혼자서 놀 방법을 찾았다. 난 무엇이 두려웠을까? 결국, 믿지 못한 건 아들이 아닌 나 자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