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고리 해도 상관없단다

귀고리 하든 화장하든

by 냉수 한 그릇

목회자 자녀를 PK(Pastor’s Kids)라고 부른다. 어쩌다 내 아들도 PK가 되었다. 태어나보니 <재벌 집 막내아들>이었다면 좋아했을까. 글쎄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그리 행복해 보이진 않더라. 분명한 건,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PK가 된 것보단 좋아했으리라.


PK의 고충이 있다. (대부분) 아빠가 목사이니, PK로서 아빠 체면 구기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도록 가르침 받을 것이고, 타인의 모범이 되고 신앙의 표준 모델이 되도록 강요받을 것이다. 목회자 자녀에 걸맞지 않은 언행에 “어머, 목사님 아들이 어떻게 저런 말을 해?”라는 말을 듣고 자라면서 교회 안과 밖에서 철저히 서로 다른 가면을 쓰고 살아야 하는 인생이라니, 불쌍하다. 어릴 때야 힘이 없으니 부모의 강요에 반항하지 못하나, 어느새 스스로 살아갈 힘이 생기니 이 지긋지긋한 PK 생활 때려치우고 우물 밖으로 뛰쳐나가고 만다. 자기 마음대로 살지 못하도록 꽉 눌러버린 인생은, 마치 용수철을 누르면 누를수록 응축된 에너지가 폭발하여 튕겨 나가듯, 그렇게 탈선하기 마련이다. 곁길로 벗어난 자녀에게 아빠 망신시킨다고 책망하나, 아들을 향한 안타까움보다 자기 체면 구겨진 걸 더 속상해하니 이것도 본말을 전도한 처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 위선적인 아빠의 모습을 보아온 자녀가 올바른 길로 걸어가길 바란다면, 애정을 쏟지도 않은 씨가 스스로 잘 자라길 바라는 것과 다름없으리라. 평생을 목회에만 전념하느라 가족, 특히 자녀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목사의 후회와 한탄이 늘 이거 아니던가. 선배 목회자의 충고를 늘 들어오면서도 여전히 목회에 충성하는 게 하나님 영광을 위한 거라고 생각하는 목사가 많으니, 안타까운 노릇이다.




애초에 난 아들에게 신앙 관련하여 강요하고 싶은 게 없었다. 딱 두 가지만 제외하고 말이다. 어디 넘어져서 찢어진 것인지 여자친구와 싸우다가 찢긴 것인지 알 수 없는 바지를 입고 다니든, 염색한 것인지 탈색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머리 색을 하고 다니든, 남자인지 여자인지 그 정체성을 명확히 알 수 없는 귀걸이를 하고 다니든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화장? 그래 상관 않겠다. 문신? 이건 좀 심각하게 고민이 되어 그 부작용에 대해 충고해 주겠지만, 본인이 죽어도 원한다면야 목사 아빠 망신시킨다고 말리거나 책망하진 않을 것이다. 막말로 문신하지 않고 교회 밖으로 나가느니, 찢어진 청바지에 화장, 귀걸이, 문신하고 교회 열심히 나오는 게 낫지 않겠느냔 말이다. 목사 아들이란 이유로 본인이 원하는 걸 하지 못한 채 부모의 체면 따위로 길들어야 하는 인생이라면, 사는 게 사는 게 아닐 것이다. 결국, 내 문제다. 아들을 진정 사랑한다면, 아들을 어떻게 저리 키우냐며 손가락질하는 성도들 눈치 보지 않고 아들 스스로 행복한 길을 선택하도록 할 것이다.


자녀는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기막히게 안다. 공부해서 남 주냐는 말로 자녀를 위한다며 학원을 보내나, 이번 시험에서 1등 했다며 자랑하는 저 옆집 아줌마의 꼴 보기 싫은 입술을 보지 않으려고 보내는 것이 아니냔 말이다. 결국, 자녀를 위한다기보다 불안한 자신의 마음을 달래려고 보내는 것인데, 자녀는 사랑을 가장한 부모의 자격지심이 부모 자신을 만족하려는 의도인지 정확히 알아차린다. 자녀라는 수단으로 ‘나 이런 사람이야!’라는 걸 자랑하려고 그토록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혈안이 된다.


난 아들이 목회자 자녀라는 이유로 탈선하는 걸 원치 않는다. 내가 목사이지 아들이 목사인가.


"귀고리 해도 아빠는 상관없단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네가 행복한 길을 택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