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아빠가 되어 간다.
‘잼민이’라고 무시할 수 없다. 그들은 잼민저스(잼민이와 어벤저스의 합성어)가 아니던가. 할 말은 한다. 그날도 아들은 내게 할 말을 했다.
오전 10시 30분. 해맑은 햇살마저 깜짝 놀랄 해맑은 표정으로 난데없이 아들이 영어를 빼달란다. 요일별로 풀어야 할 문제집이 있는데, 온갖 이유를 들이대며 영어 하나만 글쎄 빼달란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하물며 사랑하는 아들의 부탁을 못 들어주겠냐, 라고 생각했는데 이 녀석이 꾀를 부린다. 방학이다. 이제 겨우 오전 10시 30분이다. 오늘 풀어야 할 문제집을 다 풀고도 놀만 한 충분한 시간이 있어 보였다. 심지어 태평양 같은 넓은 마음을 지닌 아빠인 난, 방학이라고 평소보다 더 많은 분량을 아들에게 요구하지도 않았다. 속일 사람을 속여야지. 아들이 산 날보다 몇 배 이상 살아온 날들에 아들처럼 내 부모를 속이려고 한 날이 없었겠냐 말이다. 그 어떤 잔꾀와 미혹에도 결연한 의지로 속지 않으리라 다짐한 내게 감히 잼민이의 머리로 날 속이려 들다니, 내 아들 참 용감하다.
아들과 매일 24시간을 보내다 보니, 화낼 일이 많다. 물론 사랑한다. 근데 사랑하는 것과 화내는 것은 별개더라. 아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십중팔구 책으로만 육아를 배운 사람이리라. “하지 마!” 내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그래, 키워보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거다. 고개를 심하게 끄덕인다면, 육아를 실전으로 경험한 사람일 것이고, 마뜩잖은 표정이라면 책으로 배웠거나 출산을 준비 중일지도 모르겠다. 자녀를 이미 키우는데 내 말에 동의가 안 되는 사람이라면, 존경해 마지않는다. 당신은 훌륭한 부모이다.
말도 안 되는 아들의 요구에 슬슬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들은 내가 진짜 화난 것인지, 잔소리로만 그칠 것인지 기막히게 알아차린다. 나 역시 스스로 알고 있다. 정말 화났을 땐, 스스로 주체가 힘들다. 내 안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땐, 아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분노란 불에 기름을 부어서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만든다. 그날이 그랬다.
“지난번 눈썰매 타러 갔을 때처럼 눈썰매 타느라 시간이 늦어서 빼달라는 거면 이해하는데, 방학이고, 시간도 많고, 이제 10시 30분밖에 안 됐는데 영어 빼달라고? 그건 상황이 안 된 게 아니라 그냥 하기 싫은 거잖아!”
신중하게 생각해서 물어보는 거라면 무어라 대답할지 고민이라도 하겠는데, 그냥 이것저것 얘기해 보고 하나라도 걸리라는 심산으로 물어보는 태도는 날 화나게 했다.
용감한 잼민이의 얼굴이 슬슬 달아오르더니 내게 따져 든다.
“아니라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가 너보다 몇 배나 더 살았는데 널 모르겠냐? 어디서 거짓말이야?”
아들이 내 분노란 불씨에 한 방울씩 기름을 뿌리기 시작한다.
“진짜 아니라고!” 서러웠는지 눈가에 눈물이 고인다. 하지만 내가 진짜 화난 걸 알아차렸는지 더는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 않는다. 더 따졌다간 평소에 보던 다정한 아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웬 정신 나간 아저씨가 자신을 혼낼 거란 걸 잘 알고 있다. 기대함으로 지원한 곳에서도 연락 없는, 참 더럽게도 안 풀리는 내 인생에 따뜻한 눈길로 아들을 바라볼 마음의 여유가 내겐 없었다. 이 뭐 같은 기분을 풀 데 없어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내게, 아들의 버릇 없어 보이는 말대답은 훌륭한 먹잇감이었다. 미쳤다. 날마다 후회한다.
침묵하며 끓어오른 내 감정을 정리하는데, 아들은 씩씩거리며 핸드폰에 열심히 뭔가를 기록한다. ‘그래, 속상할 땐 글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생각했다. 아니었나 보다. 그건 날 향한 반격이었다. 말보다 글에 힘이 있다. 감정이 정리된 자의 글엔 흥분했을 땐 미처 고개 내밀지 못한 정연한 논리만 남아 머리를 쑥 들이민 채 반격을 준비하는 법이다.
“아니 말을 할 수도 있지. 말도 못 하면 어쩌라는 거야? 아빠 생각을 바꾸는 게 좋을 듯. 바꾸기 싫으면 우린 말할 수 없지! 혹시나 문제 있으면 얘기해 봐!”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했다. 아들의 글엔 미처 말로는 다 담지 못한 서러움이 담겨있었다.
“화낸 건 미안해. 순간 네 태도에 화가 났어.”라는 말을 시작으로, 일단 얘기해 보고 하나만 걸리라는 심산으로 물어보는 태도, 방학이고 이제 오전 10시 30분밖에 되지 않았는데 빼달라는 말 등에 화가 났다는 걸 설명했다. 아들의 2차 반격이 시작됐다.
“내 말이 맞는데도 아니래. 아니 아빠가 40이든 환갑이든 내 말이 맞을 때도 있고 아빠 말이 맞을 때도 있는 거지, 나보다 더 살았다고 왜 아빠 말이 다 맞다고 해. 그런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내가 어처구니없이 혼나게 되면 어이없지.”
이건 뭐 정신없이 아들에게 혼나는 꼴이다. 문제는 이게 끝이 아니란 것.
“그리고 내 말도 들어 줘. 나도 할 말이 있어. 아빠만 할 말 다~~~~~~ 하고 내 말은 듣지 않는 이건 무슨 기적의 논리일까? 내 말도 들어 봐. 아빠 혼자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지 말고. 내 말 듣기 싫다고 나랑 말하지 말자고 하면 내가 어쩌라는 거야? 어쩔 땐 아빠 말이 맞지만 아빠 말이 다 맞진 않아. 꼭 기억해!
추신 1. 삶은 틀리면 고치고, 서로 부딪히면서 살아가는 것임. 꼭 아빠 말만 맞는 건 아님!
추신 2. 이런 일이 또 있으니 정말 화난다.”
아들은 추신 두 개도 모자라 추신 하나를 더 추가했다.
“추신 3. 10살도 이미 많은 삶을 겪어 봤다.”
와, 잼민이라고 만만하게 볼 게 아니다. 내 인생의 반의반도 살아보지 못한 10년의 인생에 많은 것을 겪었다는 아들이니, 황당함을 넘어 존경심이 몰려왔다. 그래, 본인도 힘들겠지. 내게 10년은 지나가는 아리따운 여성을 아내 몰래 흘끗 쳐다보는 찰나의 순간이겠지만, 아들에게 10년은 그의 인생 전부가 아니던가.
아들에게서 온 카톡으로 내 핸드폰이 떨린다. 투표다.
“Q. 어쩔 거야?
1. 아직까지 바보처럼 이해 안 된다.
2. 이해되고 같이 화해하고 싶다.
3. 다 싫고 아들을 미워하고 싶다.”
조용히 2번에 투표했다. 이어서 아들의 답변이 왔다.
“아빠, 사랑해요.”
글이 아닌 얼굴로 대면했다. 그리고 눈물 가득 고인 아들의 눈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사과했다. 아들의 포옹과 내 목에 떨어진 그의 눈물은 따뜻했다. 그리고 아들에게 화낼 당연한 이유가 있다며 합리화한 내 성난 목소리를 부끄럽게 했다.
부모도 잘못하면 자녀에게 사과해야 한다. 부모라고 자식의 속마음을 다 알 순 없다. 부모라고 완벽할 수 없다. 불완전하고 실수도 잦다. 내 잘못을 인정할 때, 비로소 자녀의 사랑을 받을 자격 있는 부모가 되는 법이다.
그날 난, 비로소 아들에게 사랑받는 아빠가 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