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냉수 한 그릇 Dec 04. 2023

내가 '달란트 잔치'를 싫어하는 이유

축구공을 받아오겠다며 호기롭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교회 어린이부에 등록한 뒤 맞이하는 첫 달란트 잔치다. 매주 예배 참석하면 달란트 한 개를 받는다. 아플 때도 달란트 받아야 한다며 기어코 출석했다. 매주 성경 구절을 암송해도 한 개를 받는다. 때론 난도 높은 어휘에다 두 구절이 넘어가는 암송과제가 주어질 때도, 욕(?)을 해대며 머리를 싸매고 암송했다. 한 달란트라도 더 받아서 축구공 받으려고 말이다. 포기할 만도 한데…. 그 의도를 탓하고 싶진 않다. 마음에 드는 이성과의 만남을 꿈꾸며 교회에 갔다가 신앙을 갖게 되는 예도 숱하게 보았으니 말이다.      


48달란트! 또래 친구와 비교하면 월등히 많은 달란트를 모았다. 아들로선 의지와 억지가 섞여 이뤄낸 쾌거다. 그렇게 들어간 뒤 나온 아들 손엔 축구공이 아닌 실내용 슬리퍼, 도넛, 얄팍한 필통 같은 것들만 잔뜩 들어있는 봉지가 들려 있을 뿐이었다. 한두 달란트짜리를 48달란트 어치나 가져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앞에서 좋은 건 다 가져가고 남은 것 중 겨우 골라왔단다. 그 와중에 알뜰한 아드님(?)은 각 달란트 가격을 합산하여 48달란트를 남김없이 사용하려고 머리 좀 썼단다. 낯빛이 창백하다. 아들은 분노에 가까운 말투로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초등학교 3, 4학년 각 여섯 개 반에서 대표로 한 학생이 나와서 가위바위보로 달란트 선물을 뽑을 우선순위 반을 정했단다. ‘어떻게 된 거지? 꼴찌 하다간 반 학생들의 원망을 사겠네!’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열두 반 중 두 개 반씩 나갔는데 네 번째 순서에 걸리다 보니, 반대표라며 나간 친구도 꽤 미안했을 것이다. 어쩌겠는가. 가위바위보는 가장 공정한 만국의 규칙 아니겠는가. 순서에 상관없이 아들이 제일 갖고 싶었던, 그리고 제일 값나갔던 선물이 축구공이니, 달란트 40 이상 모으지 못한 친구는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을 거라 안심한 아들은, 아내 까무러칠 뻔했단다. 글쎄 축구공은 가장 많은 달란트를 주어야 받을 수 있는데 그 가격은 25달란트이며 그것도 겨우 3개뿐이란다. 25달란트가 왜 충격인가 하면, 최소 출석만 해도, 거기에 반 선생님의 재량으로 보너스 달란트를 받기만 해도 25개는 충분히 넘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혹시나 내게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은 게 무색할 정도로, 축구공은 첫 번째 나간 두 개 반에서 이미 다 가져가 버렸다.     

축구공 받겠다는 일념으로 아픈 몸을 이끌고 교회 나갔고, 친구들은 힘들고 귀찮다며 포기한 암송도 매주 성실히 암송하여 48달란트를 모았는데 축구공은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무슨 의도였을까? 달란트가 한 개든, 백 개든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축구공의 기회는 주어진다는 걸 가르쳐주고 싶었을까? 그렇다면 가위바위보에 진 반 학생에게도 공평한 기회가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제일 값이 나가는 선물을 누구나 받을 수 있도록 25달란트로 책정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돈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게 아니란 사실을 가르치려고 했을까?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아닌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해당 상품의 가치에 걸맞은 금액을 지불하지 않으면 절대 내 소유가 될 수 없다는 사실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모든 교회학교가 달란트 잔치를 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부서가 이런 식으로 운영하는 것도 아니다. 고민했으나, 최선을 다해 달란트를 모으며 축구공의 꿈을 간직한 누군가는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사려 깊게 배려하지 못한 운영방식이 문제일 것이다. 아니면, 그저 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라는 미명 하에, 소수의 누군가가 받을 상처에 둔감한 일부 어른들의 문제이거나.    

 

흥분하며 토로하는 아들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축구공을 줄 거면 40달란트는 받아야지, 25달란트만 받으면 어떡하냐고? 아니면 다음 주에 주더라도 축구공 선택한 친구는 다 주던가. 이럴 거면 굳이 달란트 안 모았지!” 아들의 생각이 교회의 그것보다 더 합리적이란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잔인하지만 아들에게 말했다. 앞으로 네가 살아갈 사회의 모습이라고. 더 심한 일도 겪을지 모른다고.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고 서운해하거나 실망하지 말라고. 매 순간 하나님 지혜로 슬기롭게 살아가라고.


달란트 잔치는 또 다른 경쟁을 부추길 뿐이다. 많이 모으려는 열정이 나쁜 건 아니나, 많이 모은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이 가져갈 선물에 차별을 두는 것도 그리 좋아 보이진 않는다. 차별의 간격을 크게 두지 않으려고 축구공을 25달란트로 책정했는지 모르나, 그것 역시 48달란트로도 얻지 못한 아들에겐 또 다른 차별로 느껴졌으리라. 어차피 알게 될 자본주의 사회의 잔인함과 경쟁의 치열함을 알게 모르게 흡수할 어린 나이의 아이들이 안쓰럽다.

작가의 이전글 놓치기엔 아까운 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